제71화
“아 예….”
밀턴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쑥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과의 재회를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캐르버가 고마웠다.
‘지금 우리는 전우라기보다는 암묵적인 견제 세력인데… 하여튼 사람은 진짜 좋다니까.’
어쨌든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된 밀턴은 잠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가까운 곳의 막사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후우우… 괜찮군요. 오랜만에 회색 산맥의 차가운 공기가 떠오릅니다.”
캐르버의 말에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회색 산맥에서 몸을 데우기에는 차보다 술이 더 좋았죠?”
“호오오… 역시 뭘 좀 아시는군요. 좋은 물건 있습니까?”
“기다려 보십시오.”
잠시 후 둘이 기다리고 있는 막사로 릭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주군, 지시하신 물건입니다.”
“수고했다.”
밀턴은 릭이 전해준 물건을 받고 미소를 지었다.
“발론워커 50년산이죠.”
“헉? 발론워커라면 설마 그….”
“예. 그 발론워커입니다.”
발론워커는 브랜디의 왕이라고 불리는 술이다.
특수한 공정을 거쳐서 숙성된 그 향기가 너무 황홀해서 브랜디 애호가들이 열렬하게 환호하는 명주이다.
더구나 50년산이라고 하면 가격이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설마 그 비싼 걸 돈 주고 사셨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 선물 받았습니다.”
최근 밀턴이 레스터 왕국의 실세로 떠오르면서 수많은 귀족들이 선물 공세를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 한 귀족이 아끼고 아끼던 물건을 밀턴에게 바친 것이다.
정작 밀턴은 그 귀족의 이름도 이미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선물을 받고 언제 개봉할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우와의 재회보다 더 좋은 핑계거리는 없겠죠.”
그리고 밀턴은 술병의 마개를 땄다.
퐁!
술병의 마개를 땄을 뿐인데 진하고 감미로운 향기가 두 사람의 후각을 자극했다.
“호오오… 이거 참….”
“저도 사실 처음이라서 기대되는군요.”
두 사람은 기대감을 가득 품고 투명한 잔에 발론 워커를 따랐다.
은은한 호박색의 빛깔이 마치 보석을 녹여 놓은 것 같았다.
“전우와의 재회를 위해서….”
“그리고 명주를 위해서….”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 모금 머금은 순간….
“우와….”
“오오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기대치가 너무 크면 정작 실제로 체험했을 때 실망감이 들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 환상의 명주는 두 사람의 기대치를 조금도 배신하지 않았다.
황홀한 향기, 은은한 감미, 부드러운 목 넘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되어서….
“말이 필요없군요.”
“정말입니다. 뭐라 표현할 말이 없네요.”
두 사람의 말대로였다.
그저 술 한 모금으로 사람을 이렇게 황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적당하게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밀턴이 말문을 열었다.
“설마 프랜시스 경을 여기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하하…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죠. 예상 밖의 일이 계속 벌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데 프랜시스 경.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우리 사이에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게 참… 윗사람들에게 오해라고 말은 했는데 좀처럼 믿지를 않아서 말이죠.”
밀턴은 어렵게 말문을 연다는 티를 내며 은근하게 말했다.
“혹시 이 군대가 우리나라에 창을 들이댈 일은 없겠죠?”
밀턴의 말에 캐르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아니, 뭐… 약간의 불안감이라는 거죠. 알다시피 우리는 최근 힘든 내전을 겪었고, 또 지금 북부에는 빌어먹을 공화국 개새끼들이 진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으음….”
‘자고로 공감대 형성하는 데 최고의 방법은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것이지.’
스트라부스 왕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공화주의라고 하면 질색한다.
그래서 밀턴은 북부의 공화국을 욕하면서 나는 너희하고 같은 편이야, 라는 의사를 은연중에 어필하는 것이다.
“그저 상황이 어렵다 보니 사람들도 많이 불안한 듯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원래 사람이 좋은 캐르버는 밀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리고 그도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제가 알기로 그런 의도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제가 알기로는 레스터 왕국이 공화국의 침략을 당해서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니 우리는 가서 공화국을 물리친다, 라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뭐, 국가 간의 일이니까 높으신 분들이 무슨 협상을 해서 이익을 얻을 수야 있겠죠. 하지만 딱히 레스터 왕국을 어찌 해보자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캐르버의 말대로라면 스트라부스 왕국의 명분은 대외적인 목적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원군이 지나치게 많은 것 아닙니까? 스트라부스 왕국도 최근 큰 전쟁을 겪었는데 5만이나 보내다니. 심지어 마스터인 브란스 공작님까지 오시다니?”
밀턴은 팔짱을 끼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좀 전력이 과한 것 아닙니까?”
“…….”
“이래서야 우리 쪽 귀족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영 무리만은 아니죠.”
이런 밀턴의 말에 캐르버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우로서 함께 싸운 포레스트 경이니 저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어째 여기서부터가 본론일 듯한 느낌이 드는 밀턴은 캐르버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 남자의 이름이 나왔다.
“혹시 지크프리트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지크프리트? 그런 이름은… 아!”
처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던 밀턴이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아련히 스쳐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남부군을 이끌고 2왕자의 반란군과 싸우는 도중에 공화국이 대범하게 수도를 직접 노렸다.
그럴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둔 레이라 공주가 페일런 공작을 시켜 대비했기에 그 시도는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틀림없이 그때 공화국군을 이끌고 있던 사령관의 이름이 지크프리트라고했어.’
기억을 떠올린 밀턴은 캐르버에게 말했다.
“기억은 납니다. 이번에 힐데스 공화국의 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침략한 자의 이름이죠.”
“역시, 여기에 있는 거군요. 그 망할 자식이….”
온화하고 예의바른 성격의 캐르버가 이를 갈면서 살기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모습에 밀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후우…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우선 포레스트 경도 들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스트라부스 왕국이 시도한 대공세가 실패했다는 것을 말이죠.”
“아 예. 뭐….”
물론 밀턴도 알고 있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힐데스 공화국에 시도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말이다.
무려 7만이라는 군세를 동원했지만 변변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사실, 스트라부스 왕국이 그런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밀턴이 회색 산맥에서 보급 도시인 프라티노스를 무사히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밀턴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힐데스 공화국에서 전선을 뒤로 물려 전력을 최대한 집중시켜서 버텼다고 하더군요. 그사이에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이 공격을 해 와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있군요. 대외적인 정보는 거기까지죠. 하지만….”
“뭐가 더 있는 겁니까?”
캐르버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경험을 설명했다.
그는 그 전쟁에 직접 동원된 당사자였다.
“후방으로 물러났던 적을 너무 길게 추적한 덕분에 보급선이 길어져 버렸죠.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점령했다고 생각한 회색 산맥에서 힐데스 공화국의 산악 부대가 우리의 보급선을 잘라먹었죠.”
“으음….”
“보급선이 끊어진 상황에서 7만이라는 대군은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하기로 했습니다.”
“…….”
전쟁터, 그것도 적국의 영토에 들어간 군대가 말하는 현지 조달은 결국 약탈이다.
기사도를 신봉하는 진중한 성격의 캐르버였지만 전쟁터에서 상부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약탈하기 위해서 인근의 마을을 찾아간 캐르버와 부하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폐허뿐이었다.
“스스로 마을을 다 부쉈단 말입니까?”
“예. 정말 철저하게 부쉈더군요. 사람 한 명 남겨두지 않고 모든 이들이 피난을 갔고, 마을의 우물에는 독이 풀어져 있었습니다. 아직 수확을 못 한 보리밭은 전부 불태워져 있었습니다.”
“그 정도였나요?”
“예. 지독했죠.”
보급이 끊어지자 군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그런 와중에 본국에서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이 연합해서 침략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이 걱정된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고, 지휘관들은 최대한 다독였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최악까지 떨어졌다.
결국 지휘부가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을 때 본국에서도 귀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퇴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진짜… 후퇴는 지옥 같았습니다.”
캐르버는 그때가 떠오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후퇴 중에 놈들은 집요한 추적으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힐데스 공화국의 국토는 절반 이상이 산악 지역이죠. 그런 지형적 유리함을 살려서 산발적으로 기습을 해 오는 놈들의 공격은 악몽 같았습니다.”
캐르버는 아직도 기억한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병사들과 어둠이 깔리면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 모르는 산악 부대의 기습은 단 1초도 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7만 중에 살아서 돌아온 것은 2만도 되지 않았습니다. 처참한 패배였죠.”
“그랬군요.”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당시 힐데스 공화국의 전군을 지휘해서 우리를 생지옥에 빠트린 남자가 누구인지.”
“그게 지크프리트라는 남자란 겁니까?”
“예. 그뿐만이 아니라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이 연합군을 결성하게 된 것도 그놈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
밀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크프리트를 위험인물 1급으로 분류했습니다. 이번 전쟁에 5만의 대군과 더불어서 브란스 공작님이 참전한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지크프리트라는 남자를 잡기 위해서란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캐르버의 말을 들으며 밀턴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지크프리트라….’
대륙의 제2순위 강국이라고 평가 받는 스트라부스 왕국이 이렇게 위험하다고 평가할 정도의 인물.
이때 밀턴의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지크프리트의 존재가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