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대범하군요. 아니 이 정도면 거의 아슬아슬하다고 봐야겠어요.”
“그래요. 대범하고 아슬아슬하죠. 하지만 몹시 치밀한 성격이기도 해요. 아마 파악된 계획 말고도 계획이 꼬였을 때를 대비해서 제2안, 제3안의 계획을 예비로 준비해 놨을 거예요.”
실제 레이라 공주는 자신과 밀턴이 반란군에서 수도를 구했을 때 클라우디아가 단독으로 몸을 빼려고 한 정황을 파악했다.
그때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도피 행각으로 간주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수도에서 몸을 빼고 스트라부스 왕국에 직접 찾아가서 원군을 청할 준비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군이 도착하면 아마 클라우디아는 사망한 1왕자의 유지를 잇는 미망인으로서 스트라부스 왕국을 등에 업고 나와 겨루겠죠. 명분은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국군에서 국토를 탈환하는 것 정도일까요?”
“무서운 여자들.”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하는 클라우디아나, 앉은 자리에서 그 속내를 모두 읽어내는 레이라 공주나 밀턴이 보기에는 둘 다 보통이 아니었다.
“…….”
레이라 공주는 여자‘들’이라고 한 말이 살짝 거슬렸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포레스트 백작, 나와 추가 계약을 하죠.”
“추가 계약이라고요?”
“예. 어차피 스트라부스가 우리나라에 개입해서 다시 한번 혼란이 시작되면, 백작이 남부에서 변경백의 칭호를 받고 칩거한다고 해도 평지풍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예요.”
유감스럽게도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 계약을 추가하죠. 계약의 목표는….”
레이라 공주는 자신과 밀턴의 계약에서 과정과 목표를 약간 수정했다.
그리고 그 수정하는 과정에서 밀턴에게 놀라운 제안도 있었다.
그녀 나름의 사죄랄까?
혹은 필요에 의한 제안일까?
어쨌든 밀턴은 크게 놀랐다.
“진심입니까?”
“이 상황에서 농담할 정도로 어설픈 여자로 보이나요?”
“하지만….”
“동의, 혹은 거부. 둘 중에 하나로만 대답해 주세요.”
레이라 공주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하며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양자택일을 제의하면 밀턴이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올라탄 호랑이… 아니 요물의 등이지.’
“다시 한번 묻죠. 일단 공표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굳은 입술을 다물고 말하는 그녀를 보고 밀턴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진짜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걸까? 아니, 그냥 이 시대에서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건가?’
국가의 정세부터 국제적인 정세까지 하나도 안정된 것이 없는 대립과 혼란의 시대다.
이런 시대에 밀턴 포레스트라는 이름을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제 밀턴이 각성하고 초반에 목표로 했던 중간만 가면서 적당히 잘 먹고 잘 사는 은수저 라이프는 글렀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죠.”
“감사합니다. 포레스트 백작.”
둘의 손이 굳게 마주 잡혔다.
그리고 밀턴은 남부군을 거느리고 수도에 조금 더 머물게 되었다.
며칠 후.
우선 레이라 공주의 또 하나의 지원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페일런 공작이 귀환했다.
북부를 차지한 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귀환이 늦었던 그는 일단 전선의 상황을 안정시킨 후에 최소한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귀환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아니요. 북부를 안정시키느라 수고했어요.”
페일런 공작은 주군을 모시는 기사의 예로 그녀를 정중하게 대했고 레이라 공주 역시 페일런 공작을 담담하게 치하했다.
그렇게 레이라 공주가 자신의 전력을 수도에 집중시켰고, 바로 다음날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대가 수도로 진격 중이라는 사실이 귀족들 사이에도 밝혀졌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째서 스트라부스 왕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는 말입니까?”
“1왕자 전하의 인장이 찍혀 있는 칙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1왕자 전하가 도움을 청해서 온 원군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걸 인정하란 말입니까? 1왕자 전하께서는 즉위해서 왕위에 오르신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사망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돌아가라고 한다고 돌아갈까요?”
귀족들은 둘 이상 모이기만 하면 스트라부스 왕국의 개입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걸 위기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고 기회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결국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대가 수도에 도착했다.
그 군세가 무려….
“5만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주군.”
레이라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보고를 받은 밀턴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5만이라… 아무리 스트라부스 왕국이 군사 강국이라고 해도 부담이 가지 않는 병력이 아니야. 그렇다면 그 정도 병력을 보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게 있다는 거겠지?’
스트라부스 왕국은 틀림없이 군사 강국이다.
서부, 북부, 동부.
이 세 개의 전선에 평소 유지하던 병력만 해도 30만이 넘고 그 외에 중앙에 집결한 병력과 각 지역에 나눠져 있는 병력을 더하면 총 병력이 45만에 달하는 군사 강국이다.
거기다 공화국을 견제한다는 의미로 다른 나라에서 군사 지원까지 받고 있기 때문에 군사를 유지하며 드는 자국의 부담도 적은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군사력에 자신이 있는 스트라부스 왕국이라고 해도 최근에는 그 힘이 좀 빠져 있다.
서부 전선을 넘어서 힐데스 공화국에 시도했던 공격이 실패했고,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의 연합 공격에 일시적으로 전선이 무너지기도 했다.
비록 저력을 발휘해서 위기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상처가 없었을 리가 없다.
즉, 이 상황에서 5만이라는 군사는 스트라부스 왕국이라고 해도 부담이 안 가는 숫자가 아니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어떤 계산을 하고 군대를 보냈을지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밀턴이었다.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했다.
“공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함께 자리에 있던 페일런 공작의 질문에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고 말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서 우리도 대응을 달리해야죠. 일단, 여기까지 와서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정식으로 맞이하도록 하죠. 아버지는 아직도 병환 중인가요?”
“예. 그렇다고 합니다.”
“꾀병도 이 정도로 오래 가면 어떤 의미로는 진짜 병이네요.”
레이라 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거스트 국왕이 자리를 비우고 있는 지금 그녀만이 유일한 왕실의 대표다.
사실 3왕자와 4왕자가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희박했다.
그러니….
“맞이하도록 하죠.”
레이라 공주는 오른쪽에 페일런 공작과 왼쪽에 밀턴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대는 절도를 갖추고 왕궁의 밖에 대기했다.
열을 칼같이 갖추고 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레이라 공주가 남부군으로 행했던 무력시위와 같았다.
하지만 이 무력시위에 레이라 공주가 대하는 방법은 전혀 달랐다.
“어? 저기 누가 오는데?”
“그거야 오긴 오겠지. 전령인가?”
병사들을 인솔하고 관리하던 기사들은 성의 정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나오자 시선을 모았다.
아마도 레스터 왕국의 전령으로 생각한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화려한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50여 명의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가 멈추고 한 명의 남자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엇?”
“어…. 어어….”
마차 안에서 여신이 걸어 나왔다.
적어도 스트라부스 왕국의 기사들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태어나서 이제까지 본 여자들을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버릴 것처럼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스터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나는 레이라 폰 레스터. 부족하지만 이 나라의 대표로 나왔소.”
레이라 공주가 직접 현장에 나온 것이다.
그녀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이 최소한의 호위 병력만 거느리고 스트라부스 왕국군의 앞에 섰다.
‘하여튼 배짱은….’
밀턴은 그런 레이라 공주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5만의 무장 병력을 눈앞에 두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런 위엄이 서려 있었다.
“아…. 저기 그….”
“저기 저희는…. 그게….”
오히려 레이라 공주의 모습에 당황하고 압도당한 것은 그녀를 맞이한 기사들이었다.
설마 자신들의 앞에 일국의 공주가 나타난 이 상황도 당황스러웠고, 레벨이 MAX에 달한 레이라 공주의 유혹 특성이 그들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허둥거리는 기사들에게 레이라 공주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 군을 지휘하고 있는 총책임자는 누구시죠? 미처 보고를 받지 못했군요.”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 한 명이 부리나케 후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갑작스럽게 일국의 공주님이 마중을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손님 대접에 소홀하지 않지요.”
보는 사람을 아찔하게 하는 레이라 공주의 미소를 마주했지만 남자는 담담했다.
그리고 밀턴은 그 남자를 보는 순간 확신했다.
‘강하다. 이 느낌은 설마?’
밀턴은 레이라 공주의 곁을 지키고 있는 페일런 공작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페일런 공작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정군 총사령관. 데릭 브란스 공작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역시….’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페일런 공작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대강 짐작은 했지만 정말이었다.
데릭 브란스 공작.
스트라부스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세 명의 마스터 중에 한 명이었다.
즉, 스트라부스 왕국은 5만의 병력에 더해서 무려 마스터까지 한 명 대동시켜 보낸 것이다.
밀턴은 즉시 브란스 공작의 상태창을 살펴봤다.
[데릭 브란스 공작]
기사 LV.8
무력 - 93 통솔 - 85
지력 - 45 정치 - 40
충성 - 00
특성 - 돌파, 특공, 분전
돌파 LV.9(MAX) : 기마대를 이끌고 적의 진형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적진에 혼란을 야기한다.
특공 LV.9(MAX) : 다수의 적을 상대로 단신으로 파고들어서 날뛴다. 30분 안에 막지 않으면 적진의 병사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다.
분전 LV.7 : 위급한 상황이 되면 발동한다. 자기 실력의 최대 70퍼센트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
‘뭐냐? 이 괴물은?’
마스터라고 해도 무력은 페일런 공작과는 전혀 달랐다.
페일런 공작의 특성은 호위, 감지, 신중 등이었다.
그건 페일런 공작이 누군가를 지키고 호위하기 위해서 특화된 기사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브란스 공작은 정반대였다.
돌파, 특공, 분전.
이건 철저할 정도로 공격에 특화된 특성이었다.
기사단을 이끌고 적진에 파고드는 돌파 특성.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미친 듯이 날뛰기 딱 좋은 특공 특성.
위기에 처하면 실력 이상의 저력을 보이며 더욱더 미친 듯이 발광하는 분전 특성.
‘무슨 버서커냐?’
페일런 공작과 달리 완전히 전쟁에 특화된 마스터.
그게 데릭 브란스 공작이었다.
‘도대체…. 뭘 얻어내기 위해서 이런 괴물까지 딸려 보낸 거지?’
밀턴은 몹시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레이라 공주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뇌부를 정식으로 초청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적으로서 온 것이 아니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말이다.
그 대신 지금 수도 안에서 5만에 달하는 병력을 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병력의 대부분은 외곽에서 야영을 하며 대기하게 했다.
대신 레이라 공주는 병사들을 위해서 술과 식량을 충분히 주라고 지시했다.
밀턴은 그런 레이라 공주의 지시를 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나쁘지 않아. 100점 만점에 120점이군.’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뇌부를 군사와 따로 분리해서 안으로 불러들였다.
거기다 병사들에게도 술이 하사되면 자연스럽게 군기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즉, 지금 당장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대가 수도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완화되는 것이다.
‘여차하면 수도 안에서 지휘부를 공격해서 인질…은 무리군.’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밀턴은 입맛을 다시며 브란스 공작의 등을 바라봤다.
‘저 남자가 있는 이상 불가능하겠지?’
아마 브란스 공작도 자기 무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레이라 공주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리라.
레이라 공주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뇌부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왕궁의 별궁 세 개를 통째로 내주며 귀빈 대우를 해 주었고,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연회를 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도 공식적인 만남은 최대한 자제했다.
왜 왔느냐? 목적이 뭐냐? 무엇을 원하느냐?
이런 질문을 직접 던지는 것을 최대한 미루고 대신 물밑으로 사람을 심어서 정보를 수집했다.
어차피 회담은 언젠가 이뤄질 것이고, 그 회담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정보를 한 조각이라도 더 끌어모으는 것이었다.
이건 순수하게 정치 파트를 담당한 레이라 공주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밀턴은 그 부분에서는 활약할 일이 없었다.
그 대신 레이라 공주는 밀턴에게 다른 임무를 내렸다.
수도 밖에 머물고 있는 5만의 군대가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책임지고 잘 챙겨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명령을 들었을 때 밀턴은 바로 이면에 숨어 있는 의도도 이해를 했다.
‘혹시 모르니 감시의 끈을 늦추지 말라는 거군.’
핵심 수뇌부를 분리시켜 두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감시의 끈을 늦출 수는 없으니 그 역할을 남부군을 이끌고 있는 밀턴에게 맡긴 것이다.
그리고 밀턴은 스트라부스 왕국군을 챙기다가 뜻밖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포레스트 경!”
“아니, 당신은…. 프랜시스 경? 여기서 다 보게 되는군요.”
캐르버 프랜시스.
예전에 밀턴이 서부 전선에 참전했을 때 함께 까마귀 요새를 지키며 싸우던 전우였다.
캐르버는 밀턴을 발견하자 다가와서 몹시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군요.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인연인 거지요.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활약을 하셨더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예? 그게 무슨…?”
“하하하하 여기 오면서 포레스트 경의 눈부신 활약을 들었습니다. 함께 싸웠던 전우로서 제가 뿌듯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