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69화 (69/257)

제69화

왕좌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왕좌에 가까워졌다는 말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추락의 의미와 같았다.

레이라 공주가 개선식을 기회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확립한 그 순간.

원래 레스터 왕국의 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남자는 술에 취해 있었다.

스카이트 폰 레스터 1왕자.

지난 내전에서의 패배 이후에 자신감을 완전히 잃은 그는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이 변해 있었다.

“제길…. 술 가져와! 술!!”

시녀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1왕자에게 잔뜩 겁을 먹은 시녀는 조심스럽게 술을 가져왔다.

하지만….

챙그랑!

“꺄아악!”

무엇이 거슬렸는지 가져간 술병을 도로 집어던지는 1왕자의 난폭한 행동에 시녀는 크게 겁을 먹었다.

“이런 망할 년! 이제는 너 같은 천한 것도 나를 우습게 여기느냐?!”

“저…. 전하. 그렇지 않습…. 꺄악!”

퍼억!

시녀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1왕자의 주먹이 시녀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쓰러진 시녀를 향해서 1왕자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다.

“아악! 전하…. 제발…. 용서를…. 아아….”

술에 취한 1왕자의 발길질에 거의 죽어가는 시녀는 용서를 빌었지만 눈에 핏발이 선 1왕자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1왕자의 무지막지한 폭행은 시녀가 대답도 못하고 축 늘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끝났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1왕자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잡고 병째로 들이켰다.

“배신자 새끼들…. 내가 왕위에 가까울 때는 꼬리를 흔들다가 이제는 코빼기도 안 보여?! 내가 결코 가만두지 않을 테다.”

1왕자는 자신에게서 멀어진 귀족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만 하면 그놈들은 모두 목을 쳐 버리고 가족들은 노예로 떨어트려서 광산에 처박아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과연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왕위에 오를 일이 있을까?

내전에서 크게 패배한 1왕자는 지금 국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미움 받는 대상 중에 한 명이었다.

내전의 패배 요인이 1왕자의 방심과 고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레이라 공주가 전국민에게 퍼트렸다.

그 내전에서 죽은 병사들의 유족들은 1왕자가 잘못해서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들들이 죽었다고 원망하며 1왕자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를 지지하던 귀족들 역시 진작 배를 갈아탄 지 오래였고, 이제 와서는 어떻게 해도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면….

“여보, 술이 너무 과하세요.”

“클라우디아….”

바로 아내인 클라우디아뿐이었다.

1왕자의 곁에 나타난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1왕자를 챙겨주며 말했다.

“건강을 챙기세요. 이러다 탈이 날까 봐 두려워요.”

“…….”

1왕자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1왕자는 진심으로 클라우디아에게 사랑과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물심양면 지원해주던 그녀는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

원래 다른 사람에게는 안하무인에 난폭했던 1왕자였지만 자신의 아내였던 클라우디아만큼은 아끼고 있었다.

그녀의 지성과 미모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 모두 없어졌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내가 있지.’

1왕자는 술에 취한 머리를 차게 식히며 자신의 아내를 끌어안았다.

“미안하오. 클라우디아.”

“여보….”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소. 어떤 굴욕을 감당해도 좋으니 반드시 살아남겠소. 그리고 반드시 당신을 왕비로 만들어 주겠소.”

1왕자의 결연한 맹세에 클라우디아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이 그저 곁에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행복한걸요.”

“아아…. 클라우디아. 나의 사랑스런 아내여….”

1왕자는 클라우디아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런 1왕자를 마주 안으며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그러던 중….

“…읍?”

1왕자는 자신의 입안으로 뭔가 들어온 것을 느꼈다.

작은 콩알만 한 것이 들어오더니 그대로 1왕자의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즉시 클라우디아는 1왕자를 거칠게 밀어냈다.

“클…. 클라우디아. 지금 무슨…. 크윽….”

털썩!

당황한 1왕자가 상황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숨…. 숨이….’

호흡이 점점 가빠져 오는 1왕자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왜…? 왜에…?”

목에서 쥐어짜는 그 목소리에는 원망보다 의문이 더 강했다.

그만큼 1왕자는 클라우디아를 믿고 사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클라우디아는 혐오스런 표정으로 1왕자를 내려다보며 자기 소매로 입술을 슥슥 닦았다.

그리고 1왕자를 향해서 말했다.

“쓸모가 없는 도구는 폐기해야지.”

“그… 끄르르르….”

얼굴이 보라색으로 변한 1왕자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클라우디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당신이 없다고 해도 나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갈 거야. 당신이 올려주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으로 말이지.”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의 독설을 들으며 결국 1왕자는 숨을 거두었다.

한때 이 나라의 왕권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남자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비참했다.

그리고 1왕자가 죽은 것을 확인한 클라우디아는….

“꺄아아! 의사!! 의사!!”

오열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모여든 사람들은 갑작스런 1왕자의 죽음에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를 의심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개선식 이후 밀턴은 조용히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레이라 공주가 권력을 잡는 것에 최대한의 협조도 했다.

지금 밀턴이 하는 역할은 실질적인 무력으로 존재하면서 주변 귀족들이 허튼수작을 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페일런 공작이 수도로 돌아오는 즉시 교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제 밀턴은 남부로 돌아가서 얌전하게 기다리다가 레이라 공주가 즉위하는 즉시 후작위와 변경백의 위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거야말로 내가 생각하던 안정된 미래고 평온한 생활이지.’

이런저런 굴곡이 있기는 했지만 마침내 인생의 목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미안해요. 백작. 남부로 귀환하는 건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레이라 공주가 밀턴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상황이 변했어요. 1왕자가 죽어 버렸어요. 자살…이라고 대외적으로는 주장하고 있어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밀턴이 들을 준비가 된 듯하자 레이라 공주는 피곤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상황을 설명했다.

개선식에서 민중의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립한 레이라 공주에게 더 이상 걸림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 오거스트 국왕에게 반 강제로라도 인가를 받아서 정식으로 왕위를 이양 받으면 실질적으로 그녀의 목적은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시작은 1왕자의 죽음이었다.

내전의 패배 이후에 술에 취해서 하루하루를 폐인처럼 지내고 있다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1왕자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사인은 독사.

1왕자 궁에 머물고 있던 시종들은 1왕자가 최근 심리 상태가 몹시 불안했다고 증언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상황 증거가 더해지자 1왕자의 죽음은 독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레이라 공주는 사건의 전말을 듣자말자 다른 결론을 내렸다.

1왕자의 시체를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 클라우디아 바모스라는 사실을 그녀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클라우디아가 자신의 남편인 1왕자를 죽일까?

레이라 공주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야심이 강하고, 그 야심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는 여자가 바로 클라우디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클라우디아는 평소에는 자애롭고 현명한 여인을 위장하며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레이라 공주가 딱히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클라우디아를 의심하면 그녀에게 동정표를 가지고 있는 이들, 혹은 레이라 공주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이들 모두가 레이라 공주를 비정하다고 공격할 것이다.

사실 1왕자가 실의에 빠져서 자살을 했다면 누가 봐도 그 원인의 첫 번째는 레이라 공주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레이라 공주는 이 시점에서 클라우디아를 함부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심증적으로는 이미 의심을 넘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 상황에는 어쩔 수 없었다.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레이라 공주는 빠르게 머리를 수비로 돌렸다.

‘그 암여우가 남편을 죽였다면, 왜? 라는 이유가 가장 중요해.’

그저 실패했으니, 이제 필요 없으니 죽인다.

그런 생각은 할 수 없다.

레이라 공주가 알고 있는 클라우디아는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이라면 계륵이라도 싹싹 발라먹고 뼈까지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을 만큼 욕심이 많은 여자다.

그런 클라우디아가 이 시점에서 1왕자를 죽였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뭔가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레이라 공주는 머리를 굴렸다.

‘일국의 왕자가 죽었으니 일단 국장을 치러야겠지. 국장을 치르는 동안 왕족인 나는 공식 일정을 멈추고 애도 기간을 가져야 해. 그렇게 하면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여기까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벌어봐야 클라우디아가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뭘까?

지금 그녀는 민중의 지지와 남부군이라는 실질적인 무력을 손에 거머쥐었고 그런 그녀에게 귀족들 역시 과반수가 넘어왔다.

그저 시간을 좀 끈다고 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레스터 왕국 안에서 레이라 공주의 위치는 이제 확고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잠깐…· 혹시? 설마?’

레이라 공주는 이 상황에서 클라우디아가 꺼낼 수 있는 가장 꺼림칙한 수단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서둘러 자기 사람들을 움직여서 클라우디아 본인과 바모스 후작가의 동향을 파악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그녀의 사람이 정보를 가져왔다.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레이라 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상대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막나갈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단기간에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마도…. 자기 남편이 내전에서 패배한 순간부터 준비를 했겠지.’

적의 수를 읽은 클라우디아는 바로 대응했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밀턴을 설득해서 남부군의 귀환을 미루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경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대가 넘어왔어요.”

“스트라부스? 말도 안 되는… 어째서 그 나라에서 우리 국경을 넘는단 말입니까?”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진심으로 놀랐다.

설마 이 상황에서 스트라부스 왕국이 레스터 왕국을 침략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승산은 10퍼센트도 될까 말까 하다.

최근 공화국의 침공으로 국력을 많이 소진하기는 했지만 군사 강국으로 이름 높은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면 군사력의 20퍼센트만 동원해도 레스터 왕국을 충분히 집어삼킬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전선에 참전해서 전쟁을 경험한 밀턴이기에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밀턴의 생각을 읽은 레이라 공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일단, 다행인 점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이 국경을 넘기는 했지만 침공은 아닐 거라는 거예요.”

“침공이 아니라고요?”

“예. 그들은 정식으로 원군으로 파병 요청을 받고 이 나라에 찾아온 것이에요. 국경 수비대도 그들이 왕가의 인장을 찍은 칙서를 확인하고 통과시켰다고 하더군요.”

“칙서? 설마 국왕이 스트라부스 왕국에 원군을 청했단 말입니까?”

“아니요. 아버지, 그러니까 현 국왕은 절대 자신의 권력을 넘볼 만큼 강력한 세력을 국내로 들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누가 그랬단 말입니까?”

“공식적으로 서류에 찍혀 있는 인장의 주인은…. 스카이트 폰 레스터. 최근에 자살한 1왕자의 것입니다.”

“1왕자가 원군을 요청했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상황의 앞뒤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가 자신이 추리한 상황을 설명했다.

“아마도 일의 전말은 이런 것이겠죠. 스카이트 1왕자가 2왕자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순간. 클라우디아는 더 이상 1왕자를 지지해도 자신이 왕비에 오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거야 그렇겠죠.”

‘단순한 패배를 넘어서 국력의 약화로 직결될 정도의 대패였으니 말이야.’

그 점은 밀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클라우디아는 그 시점에서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거예요. 2왕자가 공화국을 등에 업었으니 자신도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타국의 세력을 등에 업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그게 스트라부스 왕국이란 겁니까? 하지만 1왕자가 용케 그 사실에 동의를 했군요.”

“동의라…. 과연 그럴까요?”

레이라 공주의 의미심장한 말에 밀턴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클라우디아는 스카이트 1왕자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대외적으로 1왕자 파 전체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1왕자의 인장이 필요한 서류도 그녀의 손을 거쳤죠. 마음만 먹으면….”

레이라 공주는 말을 흐렸지만 밀턴은 그 뒷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독단으로 1왕자의 이름을 사칭해서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래요.”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잠시 한숨을 내쉬다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라부스 왕국의 원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1왕자에게 손을 쓴 거겠죠. 자신이 1왕자의 인장을 이용해서 멋대로 외국에 원군을 청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중죄니까 입을 막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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