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뭐지? 이 남자 한 다스는 식후 디저트로 잡아먹을 것 같은 색기는?’
유혹 특성이 MAX에 달하는 레이라 공주가 작정하고 들이대니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어때요? 포레스트 백작? 이래도 나하고 결혼하기 싫어요?”
“아니 그게….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닌….”
“싫어요? 아니면….”
레이라 공주는 밀턴의 몸에 자신의 부드러운 부분을 슬며시 밀착시키며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좋아요?”
그 순간 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이성이 뚝 하고 끊어졌다.
그대로 손을 뻗어서 레이라 공주를 자기 품 안에 가둬 버린 것이다.
“흐읍!”
레이라 공주는 갑자기 밀턴이 자신을 꽉 끌어안자 숨을 깊게 쉬며 당황했다.
‘장난이 지나쳤던 걸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자의 품 안이라는 것이 이렇게 넓고 따뜻한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면서 죽음의 위기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지만 사내의 품 안에 이렇게 안겨본 것은 처음인 듯했다.
단단한 가슴과 두꺼운 팔.
온몸에 퍼지는 뜨거운 체온.
레이라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이 순간에 젖어 들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든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백작. 이제 그만….”
그때….
“주군, 보고드릴 사안이….”
막사 안으로 제롬이 들어왔다.
“어? 제롬? 아니 그러니까 이건 저기… 그게 저기….”
“테이커 경! 아아… 오셨군요. 그러니까 이건 오해입니다. 오해가 무슨 오해냐 하면….”
당황하는 둘을 보며 제롬은 담담하게 한마디를 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제롬이 나가 버리자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오해했을까요?”
“제롬은 입이 무거우니 다행이긴 하지만…. 아마 했겠죠.”
둘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남부군이 주둔하고 열흘.
그동안 수도 안에서는 개선식을 주장하는 귀족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부디 남부군과 포레스트 백작을 위해서 개선식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군주의 엄정함보다는 신하를 포용하는 자비를 보여야 할 때입니다. 부디 개선식을 열어 주십시오.”
“포레스트 백작의 공적은 개선식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아뢰옵니다.”
원래 개선식을 주장하던 귀족들은 일부분뿐이었다.
그런데 레이라 공주가 몇몇 귀족들에게 바람을 넣고, 그들이 다른 귀족들에게 다시 바람을 넣었다.
수도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포레스트 백작을 달래기 위해서는 개선식이 필수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자 자기 목숨이 아까운 대부분의 귀족들이 개선식을 열어서 포레스트 백작에게 일단 당근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개선식을 주장하자 오거스트 국왕은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개선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이 나라의 주인은 나다.’
오거스트 국왕은 욕심이 많고 국왕으로서 유능한 인물은 아니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 능력의 대부분을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사용했다.
그런 인생을 수십 년간 살아왔기 때문에 머리가 아주 그쪽으로 굳어 있는 게 오거스트 폰 레스터라는 인간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알고 있었다.
지금 개선식을 허락한다는 것은 권력의 중심이 자신을 떠난다는 말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절대 개선식을 허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귀족들의 청원을 무시하는 것은 무리였다.
개선식을 열어주지 않으면 남부군이 수도를 공격할 수도 있다, 라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는 거의 기정사실처럼 퍼져 있었다.
레이라 공주에게 감화된 귀족들은 물론이고 자기 목숨이 아까운 귀족들까지 모두 한목소리로 개선식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내전으로 왕권이 약화된 이 시점에서 귀족들의 주장을 마냥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오거스트 국왕은 칩거를 선택해 버렸다.
갑작스럽게 병환을 핑계로 자신의 궁에 틀어박혀서 외부와의 만남을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
이것이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내가 부재중이라면 개선식을 열기는 힘들 것이다. 설령 귀족들이 연다고 해도 내가 인정한 개선식은 아니지.’
오거스트 국왕은 자신의 궁 안에 독을 품은 뱀처럼 웅크려서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을 치열하게 계산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의 대세는 레이라 공주에게 있었다.
이럴 때 불리하게 맞서봐야 승산이 없으니 일단은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순풍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않는다.
언젠가 상대편에 빈틈이 보인다면 그때가 반격의 때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거스트 국왕은 장기 칩거에 들어갔다.
“어쩔 수 없군요. 우리끼리 개선식을 열도록 합시다.”
국왕이 칩거에 들어가자 귀족들은 예상대로 움직였다.
솔직히 수도에는 개선식을 여는 것이 내키지 않는 귀족들이 더 많았다.
밀턴 포레스트라고 해 봤자 얼마 전에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남부 지방의 봉토 귀족일 뿐인데 지금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 중에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순수하게 감탄하는 대인배보다는 밀턴의 공적을 질투하며 인정하지 않는 소인배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설령 그런 귀족이라고 해도 지금 수도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남부군의 창칼을 생각하면 차마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결국 귀족들은 오거스트 국왕이 병환을 핑계로 칩거 중인 틈을 타서 개선식을 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남부군에 알렸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요.”
밀턴은 귀족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레이라 공주에게 말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쓸데없는 미사여구가 많았지만 핵심은 개선식을 준비했으니 이제 화를 풀고 성 안으로 들어와 달라는 간청이었다.
일종의 항복 문서라고 여겨도 좋았다.
이 상황을 유도한 레이라 공주를 보며 밀턴이 속으로 생각했다.
‘무서운 여자야.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은 기어코 손에 넣으니 말이야.’
그리고 밀턴의 시선을 받은 레이라 공주는 슬쩍 밀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무서운 여자 취급하지 말아 줄래요?”
“…진짜 사람 속을 읽는 능력이 없는 것 맞습니까?”
“글쎄요? 없을까요? 아니면 있을까요?”
“…….”
몹시 찝찝한 표정을 하는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저 백작님의 얼굴 표정이 읽기 쉬울 뿐이에요.”
“그런가요?”
“어쨌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런 모습 보이면 안 돼요. 저도 겉은 가녀리고 청초한 여인이라고요.”
“그럼 속은 다르다는 이야기군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무렴 어때요? 어쨌든….”
얼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레이라 공주가 밀턴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그리고 제 아버지도 너무나 손쉬울 정도로 제 뜻대로 움직여 주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도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죠.”
“다음 계획? 그런 건 들은 적 없는데요?”
밀턴의 물음에 레이라 공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대해도 좋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방금 무슨 음모라고 말하려 했죠?”
“…….”
‘요물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요물임에 틀림없어.’
레이라 공주는 짐짓 토라진 것처럼 팔짱을 끼고 말했다.
“뭐, 좋아요. 일단 가르쳐 주죠. 어차피 무대 위로는 백작님도 올라와야 하니까요.”
“뭘 시키려는 겁니까?”
“그건….”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밀턴에게 자신이 미리 생각해둔 시나리오를 넘겼다.
그 시나리오를 들은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짜 그렇게 할 겁니까?”
“할 때는 철저하게 해아죠.”
밀턴은 오거스트 국왕에게 별로 좋은 기억은 없었다.
만남 자체가 짧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리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오거스트 국왕이 불쌍해졌다.
‘하여튼… 제대로 엿 먹이는 법을 아는 여자야.’
남부군의 입성.
약간의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개선식이 열리고 남부군이 수도에 입성했다.
“남부군 만세!”
“포레스트 백작 만세!”
“레이라 공주님 만세!”
수도의 일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와서 꽃을 뿌리며 남부군의 개선을 환영했다.
이들에게 남부군은 반란군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준 구원군이었고, 밀턴 포레스트는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레이라 공주는 현 왕실에서 유일한 희망의 별이었다.
레이라 공주가 미리 정보원을 통해서 민심을 확실하게 확보한 결과였다.
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밀턴은 선두에서 말에 올라타서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백성들의 환대가 끝나자 그 후에는 기사들과 귀족들의 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국의 영웅. 밀턴 포레스트 백작을 칭송하라!”
그리고 모든 귀족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밀턴을 맞이했다.
보통 귀족이나 기사는 자신의 주군이 아닌 이상 무릎을 꿇지 않는다.
하지만, 개선의 영웅은 예외다.
일시적이긴 해도 개선식에 한해서는 국왕조차 올려다볼 정도로 극상의 예우를 해 주는 것이 개선식의 의미인 것이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밀턴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 중에 몇 명이나 진심으로 저러는 걸까?’
밀턴은 순간 실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정치라는 것은 때로는 더없이 비굴하게 굴종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이들에게는 아마 지금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 진심을 기대하는 건 무리를 넘어 난센스로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귀족들의 환대를 받고 밀턴은 마침내 개선의 재단까지 도착했다.
이제 여기서 밀턴이 재단의 위에 올라서 국왕에게 훈장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개선식이 끝난다.
다만, 지금 오거스트 국왕은 병환을 핑계로 칩거에 들어가 있다.
그러니 귀족들 중에서 원로 귀족 한 명이 대신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밀턴의 앞에 나왔다.
그런데….
“잠깐만요.”
어느새 나타난 레이라 공주가 그 자리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원로 귀족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개선식에서 영웅에게 훈장을 내리는 것은 국왕 전하의 역할이죠. 그분이 병환으로 칩거하고 계신 이상 제가 그 대역을 하겠습니다.”
레이라 공주가 나서자 노귀족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당황했다.
“전하, 하오나 귀족원의 뜻은….”
“여기까지 와서 일을 망칠 생각인가요?”
레이라 공주는 뭐라고 변명하려고 하는 노귀족에게 은밀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가 슬쩍 시선을 준 곳에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밀턴이 있었다.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노귀족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남부군이 이 수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
그 말에 노귀족은 감히 뭐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대가 만약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노귀족은 레이라 공주에게 공손하게 훈장을 받쳤다.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밀턴의 손을 잡고 함께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구한 밀턴 포레스트 백작의 공적을 높이 사서 영광의 훈장을 내리겠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훈장을 밀턴의 옷에 달아 주었다.
원래의 의식과는 조금 달랐다.
국왕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내주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서 훈장을 직접 달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밀턴의 손을 잡고 재단에서 민중을 향해서 말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 위대한 영웅을 칭송하라. 이것은 레스터 왕국의 적법한 왕족이자 다음 왕위 계승자인 나 레이라 폰 레스터의 명이다.”
위엄이 실려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퍼져 나가자 모든 시민들이 열렬하게 환호했다.
“와아아아아아!!”
“포레스트 백작님 만세!!”
“레이라 전하 만세!!”
“레스터 왕국 만만세!!”
분위기에 도취된 시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그 환호 속에서 귀족들은 망연자실했다.
반쯤은 빵을 먹다가 돌이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다음 왕위 계승자라고 한 거지?’
‘완전히 당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지금 이 자리는 개선식이다.
굉장한 권위가 실려 있는 국가의 공식 행사다.
이런 자리에서 레이라 공주는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이 다음 왕위 계승자라고 공표를 해 버렸다.
공식 석상에서 나온 말에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곧 공식 선언으로서의 효력을 지니게 된다.
오거스트 국왕이 빠졌고, 1왕자가 사실상 실각한 틈을 타서 레이라 공주는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왕실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다음 왕위를 잇겠다는 사실을 공표해 버린 것이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보다 더 교묘했다.
그녀는 ‘다음 왕위’라고 하지 않고 ‘다음 왕위 계승자’라고 했다.
그녀가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말의 팩트 자체는 맞는 말인 것이다.
굳이 지적을 하자면 현 국왕이 자리에 없는 사이에 자신이 마치 다음 왕위에 오를 것이 확정된 것처럼 ‘뉘앙스’를 풍겼다는 것이 문제인데….
고작 이걸 꼬투리 잡자고 이 자리에서 지적을 한다?
개선식에서?
남부군이 가득한 이 자리에서?
백성들이 열렬하게 환호하는 이 상황에서?
그냥 미친 짓일 뿐이다.
유일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현 국왕 정도였지만 오거스트 국왕은 개선식에 공식성에 흠을 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참가하지 않았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는 차라리 정식으로 개선식을 열고 스스로 이 자리에 나왔어야 했다.
그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이상 레이라 공주의 발언에 제동을 걸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고, 그 결과 레이라 공주의 이 선언은 효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결국 귀족들은 서로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레이라 공주가 레스터 왕국의 정치판이라는 반상 위에 놓은 절묘한 한수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