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귀족들과 국왕이 남부군의 존재에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때.
수도의 일반 백성들 역시 벌벌 떨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로 인해서 말이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그러게 말이야. 영웅에게 어떻게 그런 대우를 할 수가 있지?”
“내가 포레스트 백작님이나 레이라 공주 전하라면 무력시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군을 이끌고 확….”
“어허…. 이 사람아 입조심 좀 해.”
백성들은 하나같이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지금 수도의 일반 시민들 사이에 떠돌고 있는 소문 때문이었다.
남부군이 수도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이유는 수도로 들어가면 오거스트 국왕이 밀턴 포레스트의 목을 치고 레이라 공주를 구금할 것이 분명하다, 라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이 어디서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극히 짧은 시간에 퍼져 나가서 이제는 수도에 귀머거리에 장님이 아닌 이상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소문 역시 가지각색이었는데….
현 국왕이 질투심에 미쳐 영웅 밀턴 포레스트를 질투해서 제거하려고 한다.
이미 국왕이 보낸 암살자가 포레스트 백작과 레이라 공주를 공격한 적이 있다.
레이라 공주가 7년 동안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것도 국왕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레이라 공주의 모친인 아이린 왕비와 동복형제인 그레비언 왕자의 죽음의 배후에는 오거스트 국왕 본인이 있다.
대강 이런 종류의 소문들이 넓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소문을 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다.
다만 진실일 필요는 없다.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있다.’라는 정도의 신빙성만 있다면 소문은 금세 퍼지기 마련이다.
그게 바로 레이라 공주가 노린 바였다.
남부군이 무력시위를 하는 동시에 미리 잠입시켜둔 자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수도의 오거스트 국왕을 질투심에 미쳐 포레스트 백작과 레이라 공주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내전의 피해로 인해 가뜩이나 민심을 잃은 상황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라를 이 꼴로 만든 무능한 국왕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라는 생각을 가진 백성들이 알아서 소문에 살을 붙여 무섭게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레일라 공주는 외부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동시에 수도의 민중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안과 밖으로 국왕을 압박했다.
그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귀족들 중에 그래도 용기 있는 일부가 움직였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수도 밖으로 나가서 밀턴 포레스트 백작을 설득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설령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포레스트 백작을 설득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품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밀턴을 만나지 못했다.
“미안하군요. 지금 포레스트 백작은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벌어져서 절대 안정을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도에서 찾아온 귀족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이라 공주였다.
물론 밀턴은 부상 따위 입지 않았다.
다만,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이 밀턴의 역할이라면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었다.
잔뜩 겁을 먹은 귀족들을 보며 레이라 공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용기는 가상하지만 단순해. 다루기 쉬운 자들이군.’
그리고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찾아온 용건은 제가 백작님에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용건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아름다운 미소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는 레이라 공주의 모습은 귀족들이 보기에 무척이나 자애로워 보였다.
그들은 그런 레이라 공주에게 희망을 보고 용건을 말했다.
“공주님. 부디 남부군을 해산시켜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남부군이 수도의 외곽에서 주둔 중이라니? 시민들이 크게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못하면 백작에게 역심(逆心)이 있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귀족들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퍽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녀는 내숭과 가식을 가득 담아서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나요?”
레이라 공주의 물음에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렬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러다가는 폭동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되옵니다.”
“부디 남부군을 해산시켜 주시옵소서.”
그런 귀족들의 모습을 보고 레이라 공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레이라 공주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가 말을 이었다.
“저도 백작님에게 몇 번이고 군을 해산할 것을 주청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레이라 공주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뭐라고요?”
“아니, 백작은 공주님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설마 그가 공주님의 뜻을 거스른단 말이옵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귀족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레이라 공주는 담담하고 서글픈 표정을 하고 말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포레스트 백작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분을 쉽게 움직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분을 아군으로 만든 것입니다.”
“대가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레이라 공주는 말을 흐리면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시선을 살짝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양팔로 몸을 슬며시 감싸서 침묵했다.
‘헉?’
‘설마…. 포레스트 백작이?’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남부의 야만적인 백작이라면….’
‘거기다 레이라 공주님의 미모라면 남자로서 탐나지 않을 리가 없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에 뻔히 보이는 귀족들을 보며 레이라 공주가 처연하게 말했다.
“후회는 없습니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아까울까요?”
“공주님….”
“어찌 그런….”
이제 귀족들의 눈앞에 있는 레이라 공주는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런 분이 계셨다니….’
‘이분에 비한다면 1왕자나 2왕자… 아니 현 국왕 전하조차 모자람이 있구나.’
지금 이 자리에 나온 귀족들은 정치적 싸움에 소질이 없어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지만 그래도 근본 자체는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진짜 귀족들이었다.
그런 이들이기에 이런 위기 상황에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고 목숨을 걸고 예민한 남부군의 진형에 찾아온 것이다.
레이라 공주는 약간의 연기와 내숭으로 그런 자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고 있었다.
“저는 분명 백작의 주군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저 역시 그분의… 음, 뭐라고 말할까요… 일부분이기도 하답니다.”
레이라 공주의 말만 들으면 마치 밀턴이 레이라 공주와 장래를 확약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저 역시 그분에게 무조건적인 명령을 할 수는 없답니다.”
레이라 공주의 말에 귀족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런 것이군.’
‘공주님을 중앙으로 올리는 동시에 자신은 남편으로서 국가의 중추를 거머쥐겠다는 건가?’
‘밀턴 포레스트. 어마어마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군.’
귀족들의 안에서 밀턴에 대한 오해가 점점 더해져 갔다.
야망에 가득 찬 포레스트 백작과 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백작에게 자기 한 몸을 던진 헌신적인 레이라 공주.
대강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밀턴이 알았으면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피를 토할 오해다.
레이라 공주는 그들을 보며 머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미력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포레스트 백작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부디 민심을 다독이는 것에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공주가 직접 머리를 숙이며 간청을 하자 귀족들은 오히려 크게 황송해했다.
“공주님. 이러지 마십시오.”
“왕족의 피가 흐르는 자는 그리 쉽게 머리를 숙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습니다. 공주님.”
귀족들은 진심으로 황송해했다.
온몸을 바쳐서 이 나라를 구한 레이라 공주가 자신들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절대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헌신적이고 훌륭한 공주를 도와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중에 한 명이 레이라 공주에게 말했다.
“저희가 무엇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말씀… 아니 명령만 하십시오.”
“신명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만나고 10분도 되지 않아서 그들은 레이라 공주의 충신….
아니 자신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쯤 되면 그냥 추종자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신다면 저에게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레이라 공주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말의 내용은 냉큼 그들의 도움을 받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백작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저도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수도에서 그분의 공적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좋겠죠.”
레이라 공주가 그렇게 운을 떼자 귀족들은 냉큼 알아들었다.
“개선식 말이군요. 몇몇 귀족들이 주장하고 있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레이라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국왕 전하께서 그 개선식을 거부했다는 말이 백작님의 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알겠습니다. 저희가 수도에 돌아가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은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귀족들은 남부군 해산을 부탁하려고 왔다가 역으로 레이라 공주의 부탁만 듣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자….
“아주 사람 제대로 악당으로 만드는군요.”
레이라 공주의 뒤편에서 인기척을 죽이고 있던 밀턴이 나타났다.
“어머? 백작님 거기에 있었나요?”
레이라 공주는 밀턴이 거기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밀턴은 확신했다.
‘이 요물이 내 존재를 몰랐을 리가 없어.’
밀턴은 뭐 씹은 표정을 하고 레이라 공주에게 말했다.
“저 치들이 이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둬도 됩니까?”
“응? 뭐가요?”
“마치 저하고 공주님이 결혼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잖습니까?”
“그래서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습니까?”
“여차하면 정말로 저하고 결혼하면 되죠 뭐. 정략적으로 괜찮을 파트너 같은걸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순간 움찔했지만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공주님하고 결혼이요? 좀 봐주십시오.”
밀턴의 말에 이번에는 레이라 공주가 살짝 울컥했다.
“이건 자랑이 아니고 진실인데, 나 정도면 세상 모든 남자들의 소원 아닌가요?”
그 말에 밀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공주님. 남자들은 애인은 미모로 보지만 와이프는 성격으로 봅니다.”
“호오…? 그래요?”
“예. 어린 양처럼 순하고 상냥하고 포근한 성격의 아내야말로 모든 남자들의 소원이죠. 그런데 공주님은….”
밀턴은 레이라 공주를 위아래로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웃어 버렸다.
“훗.”
순간 레이라 공주의 머릿속에서 뭔가 빠직 하고 끊어짐을 느꼈다.
‘이 인간이….’
고작 ‘훗’이라는 짧은 단어 하나로 자신을 이렇게 분노하게 만들다니….
레이라 폰 레스터라는 여자는 받으면 최소 열 배로는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애당초 밀턴과의 정략혼은 그냥 반쯤 농담과 반쯤은 그럴 가능성도 있다, 라는 염두를 하고 말한 것뿐이다.
어차피 결혼은 해야 했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정략적인 조건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밀턴 포레스트는 충분히 좋은 조건의 정략결혼 상대였다.
그런데 상대가 성격 어쩌고 하면서 비웃으니 묘한 승부욕이 생겼다.
군주로서의 승부욕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승부욕이라고 할까?
그 미묘한 감정에 레이라 공주는 진한 미소와 함께 유혹적인 시선을 하며 밀턴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그녀는 밀턴의 목에 자기 팔을 부드럽게 감으며 자신의 붉은 입술을 슬며시 핥았다.
그리고 밀턴의 귓가에 속삭였다.
“반려의 성격이 중요한 백작님은 제가 아무리 유혹해도 아무렇지도 않겠군요.”
“그거야…. 꼭 그렇지는….”
밀턴은 자신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레이라 공주를 보며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