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지크프리트는 페일런 공작의 군세가 2왕자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남부군과 합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전쟁은 어디까지나 내전이고, 그 내전의 핵심은 2왕자이니 거기에 전력을 집중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페일런 공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공화국군을 맞이했다.
몇 번 가벼운 탐색전을 시도해 본 결과 지크프리트는 입맛을 다시며 포기했다.
수도 강습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정예였지만 5,000밖에 되지 않았다.
페일런 공작은 그런 소수의 병력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일단 대치하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2왕자군이 남부군을 물리치거나 혹은 선전을 한다면 페일런 공작의 군에 빈틈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려온 소식은 남부군의 대승이었다.
병력의 피해도 거의 없이 유인책으로 2왕자를 사로잡고 남은 반란군의 세력도 잘 수습했다고 한다.
이제 대치 상황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어쩔 수 없군. 여기까지로 할까?”
지크프리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철군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조용하게 두 명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남부군의 밀턴 포레스트, 그리고 레이라 공주라….”
자신의 계획의 막판에 재를 뿌린 두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린 지크프리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기억해 두겠다.”
내전이 끝났다.
하지만 내전이 끝났다고 해도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내전이 레스터 왕국에 남긴 상처가 실로 컸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1왕자의 토벌군이 대패하면서 수많은 남자들이 죽었다.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가장이고 아들이었음에도 말이다.
거기다 2왕자가 힐데스 공화국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북부가 고스란히 힐데스 공화국에 넘어갔다.
내전 전과 비교하면 국력이 반 토막이 났다고 봐야 했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나라가 입은 피해는 너무나 컸다.
당연히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특히 현 국왕인 오거스트 폰 레스터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시대적인 아이러니라고 할까?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존재도 있다.
밀턴 포레스트 백작.
수도의 함락 직전에 남부군을 이끌고 나타나서 수도의 백성들을 구하고 2왕자군을 압도적으로 패배시켜서 나라를 구했다.
술집에서는 음유시인들이 밀턴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거리에서는 아이들이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내가 포레스트 백작이다.’라고 외치며 다녔다.
새롭게 나타난 신성의 등장에 구원받은 백성들은 너도 나도 그 이름을 찬양했다.
바야흐로 영웅(英雄) 밀턴 포레스트가 탄생한 것이다.
군을 이끌고 개선하는 와중에 마차 안에서 레이라 공주가 밀턴에게 말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뭐가 말이죠?”
모르는 척하는 밀턴을 보고 레이라 공주가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 말대로 구국의 영웅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기분은 어때요?”
밀턴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나보다는 부하들이 좋아하더군요. 뭐, 저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수도로 개선하는 와중에 수많은 귀족들이 밀턴에게 다가와서 어떻게 눈도장 한 번이라도 찍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떤 이는 비싼 선물을 바치고, 또 어떤 이들은 미색이 뛰어난 자기 딸을 소개하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밀턴 포레스트 백작의 이름을 아는 귀족보다 모르는 귀족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구국의 영웅이 되어서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참 웃기는 세상이야.’
밀턴은 피식 웃은 다음 레이라 공주에게 말했다.
“그리고, 제가 아무리 잘나봐야 공주님만큼은 아니죠. 세력은 얼마나 만드셨나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조로워요. 딱 내 예상대로죠.”
밀턴이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했다면 레이라 공주는 차기 왕권에 가장 가까운 권력의 실세로 등극했다.
세상에 알려지기를….
남부에서 세속의 명리(名利)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국가에 충성하며 청렴한 인생을 보내던 밀턴 포레스트 백작을 설득시켜서 나라를 구하게 일으켜 세운 인물이 바로 레이라 공주라고 알려져 있다.
레이라 공주의 위엄과 지혜와 미모에 감탄한 밀턴 포레스트 백작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이 둘의 만남으로 인해서 나라가 구해졌다는 것이 세간에 도는 소문이었다.
거기다 결정타는 션 페일런의 레이라 공주 지지 선언이었다.
이제까지 1왕자와 2왕자의 왕위 다툼에서도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던 페일런 공작이 레이라 공주를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한다는 공식 선언을 해 버린 것이다.
왕국의 수호신과 구국의 영웅을 좌우에 거느린 레이라 공주는 지금 그 누구보다 왕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현 국왕이 신망을 잃었으니 약간만 압박을 가하면 왕위 이양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군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내 아버지이긴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이 보통이 아닌 인물이라서 말이죠.”
“흐음….”
“거기다, 수도에 머물고 있을 암여우도 거슬리네요. 그냥 당하고 있을 여자는 아니거든요.”
“암여우?”
밀턴이 되묻는 말에 레이라 공주는 잠시 밀턴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작도 알기는 알아야겠죠.”
그리고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1왕자의 아내인 클라우디아. 바모스 후작의 딸이죠. 들어 본 적 있나요?”
“예. 뭐 이름 정도는….”
“수도에 가면 아마 백작에게도 접근해 오겠죠. 조심하는 게 좋아요. 보통 여우가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라 공주를 보며 밀턴이 속으로 생각했다.
‘누구만 할까?’
하지만 후환이 두려우니 직접 말하지는 않고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수도는 이제 하루 거리군요. 이제 좀 편하게 지붕 있는 곳에서 쉬고 싶군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며칠은 더 노숙을 해야 할걸요?”
“예? 어째서 말입니까?”
“아버지한테 깨닫게 해 드리려고요.”
“그러니까 뭘요?”
두서없는 그녀의 말을 밀턴이 이해한 것은 이다음의 한마디를 듣고 나서였다.
“당신의 시대는 한참 지났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레이라 공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개선식(凱旋式).
레스터 왕국 전통의 행사로 큰 전쟁을 이기고 돌아온 군에게 주어지는 최고 대우 중에 하나다.
레스터 왕국의 역사상 오직 두 명 밖에 받지 못한 드문 행사이기도 하다.
수도의 모든 백성들이 꽃을 들고 나와서 개선군을 환영하고 모든 귀족들이 말에서 내려서 그들을 맞이한다.
그리고 국왕이 직접 중앙의 광장에 내. 려. 와. 서.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영웅을 단 위에 세우고 올려다보며 감사를 표해야 한다.
공적을 치하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신하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것이다.
즉, 왕권의 상징성에 흠을 남길 수 있는 행사이기도 했다.
앞서 개선식을 받았던 두 명의 영웅 중에 한 명은 그 자신이 왕족이었기에 괜찮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은 국왕이 친형제나 다름없다고 여길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기에 역시 괜찮았다.
하지만 밀턴과 오거스트 국왕이 그런 사이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권력에 욕심이 많은 오거스트 국왕에게 있어서 개선식을 연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떨어진 자신의 왕권의 추락에 박차를 가하는 꼴이 아닌가?
당연히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뭐라고? 개선식을 열어 달라고?”
국왕이 그런 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 밑에 귀족들은 이번에 밀턴 포레스트의 공적이 그럴 만하다고 주장했다.
“전하, 포레스트 백작은 내전을 종식 시키고 국가를 수호하였으며 간악한 공화국의 침략을 저지하였습니다. 이 공적을 생각할 때 개선식을 열어서 가라앉은 민심을 다스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아량을 베풀어 포레스트 백작을 치하하신다면 백성들 역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신하들이 개선식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거스트 국왕은 기가 막혔다.
자신은 생각도 없는데 귀족들이 스스로 개선식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건 자신의 왕권이 바닥에 추락했다는 증거와 같았다.
오거스트 국왕은 몹시 불쾌하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
“국가적인 대위기도 아니고, 고작 내전을 종식시켰을 뿐이다.”
충분히 국가적인 대위기였다.
“거기다 북부의 땅을 공화국에 빼앗긴 그대로이지 않는가?”
그건 오거스트 국왕의 아들인 바이런 폰 레스터 때문이다.
“개선식이라니? 있을 수 없다. 포레스트 백작에게 그 정도의 공적은 없다.”
오거스트 국왕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대전을 성큼 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
개선식을 주장했던 귀족들 몇몇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는데 역시 안 들어주시는군.”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하지 않았소?”
“그렇지. 우리는 우리 역할을 다했으니 이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합시다.”
“아아…. 역시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군요.”
몰래 수도에 심어 놓은 세작을 통해서 정보를 들은 레이라 공주는 미소를 지었다.
한평생 권력을 손에 쥐고 살아온 인간이다.
가족도, 국가도, 명예도….
그 무엇도 그에게 있어서 권력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들이 골육상쟁을 벌여도 무시했고, 자신과 한 이불을 덮었던 여인들이 목숨을 잃어도 냉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냉정과 무관심 속에서 레이라 공주는 너무나 큰 슬픔을 겪어야 했다.
“당신이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았으니….”
레이라 공주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듬직한 오라버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번에는 내가 당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주겠어요.”
그녀의 눈에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밀턴 포레스트가 이끄는 남부군이 수도 로렌시아의 지척까지 도착했다.
오거스트 국왕은 당연히 개선식을 준비하지 않았다.
다만 전령을 보내서 밀턴에게 어서 왕궁으로 와서 얼굴을 비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로렌시아를 바로 지척에 둔 남부군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 남부군은 왕도 바로 앞에 진영을 차려 버렸다.
마치 전쟁 중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소식을 전해지자 로렌시아는 평민부터 귀족까지 할 것 없이 엄청나게 난리가 났다.
“남부군이 수도에서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렇다고 합니다.”
“어째서? 설마 남부군이….”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수도의 귀족들은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2왕자가 반란군을 이끌고 바로 지척까지 도달했었다.
그때 자신들을 구해 주었던 것은 밀턴 포레스트가 이끌던 남부군이었다.
그 남부군이 이번에는 반대로 로렌시아 바로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귀족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인 인물도 있었다.
바로 현 국왕인 오거스트였다.
“감히…. 감히….”
오거스트 국왕은 차마 말을 잊지도 못하고 분노하기만 했다.
이건 무력시위다.
그것도 굉장히 노골적인 무력시위인 것이다.
자신이 불렀음에도 오지 않고 성벽 바로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로렌시아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굴욕이었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만약….
정말 만에 하나의 일이지만 남부군이 공격을 해 오면 오거스트 국왕으로서는 대응할 방법이 하나도 없다.
왕도의 모든 병력은 션 페일런 공작이 싹 쓸어갔다.
심지어 그 션 페일런 공작은 스스로 레이라 공주를 주군으로 공표하기까지 했다.
혹시 몰라서 전령을 보내 놓기는 했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분노에 몸을 떠는 오거스트 국왕이었지만 점점 분노를 넘어서 공포심이 들기 시작했다.
레이라 공주는 자신의 딸이지만 틀림없이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으리라.
7년 전에 레이라 공주의 친모와 오라비가 죽을 때 오거스트 국왕은 그저 중립을 지키고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그때 레이라 공주 역시 죽은 줄 알았지만 살아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아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오거스트 국왕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현 시점에서 그 딸이 자신을 뛰어넘은 힘을 가지고 있고….
하물며 자신에게 절대로 곱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기쁘기는커녕 머릿속으로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혈육의 온정?
그딴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애당초 오거스트 국왕 본인도 스스로 혈육의 시체를 밟고 왕위에 오른 왕이다.
자신의 딸인 레이라 공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오거스트 국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잡고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내가 살모사를 낳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