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첫날의 전투에서 로비언스 성벽은 굳건하게 버텼다.
성벽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튼튼하게 지어진 성벽은 캐터필터에 제법 두들겨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버텨준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이겼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성공적인 수성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날이 밝자 남부군은 다시 2왕자군의 성벽을 공격했다.
공격 방식은 어제와 같이 원거리 투사를 주축으로 한 소극적인 공격이었다.
병사들을 밀어넣어서 본격적으로 성벽을 넘기 위한 공격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한 번의 승리로 인해서 자신감이 오른 북부군은 어제보다 더 능숙하게 적의 공격에 대응했다.
“화살을 집중시켜라! 방패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집중시키란 말이다.”
“발리스타의 조준으로 적의 캐터필터를 노려라! 적의 주 공격 수단을 파괴한다!”
원거리 투사로 공성을 진행하게 되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수성하는 쪽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성벽의 고저 차이를 활용해서 보다 안전한 위치에서 보다 멀리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틀째도 남부군은 아무런 실적도 남기지 못하고 들어갔다.
“와아아아!!”
“이겼다!”
“꺼져라. 남부 촌뜨기들아!”
성벽 위에서는 일반 병사들도 적을 조롱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그리고 사흘, 나흘….
시간이 흘러서 열흘의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열흘 동안의 공성전은 그야말로 뜨뜻미지근한 전투만이 계속되었다.
무슨 생각인지 남부군은 똑같은 공격만 무의미하게 반복했고, 이제 병사들은 안도감을 넘어서 전투가 지겹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저 멍청이들은 오늘도 저 지랄인가?”
“지겹지도 않나? 포기를 모르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이렇게 투덜거릴 정도로 전투는 매일 매일이 똑같은 일과의 반복이었다.
몇몇 지휘관들은 그런 병사들을 보고 있었지만 군기가 빠졌다고 질책하지도 않았다.
지휘관들 역시 나태함에 조금씩 전염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열흘이 넘어가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포레스트 영지 소속의 제롬 테이커다! 북부의 기사들 중에 나와 겨뤄볼 자는 누구 없는가?!”
한 명의 기사가 성벽 앞에 단기로 나와서 일기토를 신청한 것이다.
“저놈이 뭐 하는 거지?”
“일기토를 신청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러느냔 말이다?”
2왕자의 역정에 참모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별 성과가 없으니 저쪽에서도 군의 사기를 신경 쓸 수밖에 없어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기토를 통해서 사기를 올리려는 것 같습니다.”
참모의 분석을 듣고 2왕자는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 그렇다면 저놈의 목을 치면 반대로 적군의 사기를 바닥까지 꺼트릴 수 있겠어? 그렇지 않나?”
“예. 그렇긴 합니다만….”
“누구 없는가? 누구든 좋으니 저 건방진 놈의 목을 친다면 큰 포상이 있을 것이다.”
2왕자의 말에 몇몇 기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아닙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기필코 놈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제가….”
그런 기사들 중에 한 명의 거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외쳤다.
“모두 물러서시오. 나 리온 발로드가 나서겠소.”
그가 앞으로 나서자 다른 기사들이 순간 압도되어서 찌그러졌다.
“오오…. 발로드 경. 그대가 하겠는가?”
“예.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리온 발로드는 북부의 기사들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제가 나가서 저 건방진 놈에게 북부의 수준을 가르쳐 주고 오겠습니다.”
“그대를 믿겠다.”
2왕자의 허락을 받은 리온 발로드는 당당하게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 리온 발로드가 상대해 주겠다. 영광으로 알고 지옥에 떨어져라.”
당당하게 나서는 리온 발로드를 보며 제롬은 담담하게 맞섰다.
“누가 지옥에 떨어질지는 두고 봐야지.”
“하아!”
그리고 더 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리온 발로드가 말을 몰아서 제롬에게 돌격했다.
리온 발로드의 검에도 선명한 오러가 맺혀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익스퍼트라는 증거였다.
카아앙!
두 사람의 오러가 부딪히고 일기토가 시작되었다.
“와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
양 진형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고 두 기사는 서로 검을 섞으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콰앙! 콰아앙!
양쪽의 검이 부딪히면서 오러가 불꽃처럼 튀기고 굉음이 울렸다.
말들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해서 뒤로 밀려났다.
‘큰소리 칠 만하군. 남부의 촌뜨기들 중에 이런 기사가 있을 줄은 몰랐어.’
리온 발로드는 검을 겨루면서 실력이 제법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흐읍!!”
후우우웅.
리온 발로드가 전력으로 휘두른 공격이 공기를 가르며 제롬에게 날아갔다.
콰아아아앙!!
그 공격에 제롬은 뒤로 5미터는 밀려났다.
그 와중에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은 경탄할 만했다.
하지만 이걸로 리온 발로드는 여유를 찾았다.
“제법이긴 하지만, 동작에 미세한 끊어짐이 있어. 몸에 부상이라도 있나 보지?”
“…….”
제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온 발로드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앞으로 돌격했다.
“봐주지는 않겠다. 받아라!”
그리고 리온 발로드의 강력한 공격들이 계속되었다.
콰아앙!! 콰앙!!
거칠게 몰아치는 리온 발로드의 공격은 마치 폭풍 같았고 제롬은 가까스로 그 폭풍에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한계가 왔다.
“하아압!!”
콰아앙!!
상대의 검력을 이기지 못하고 제롬의 왼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끝이다!”
리온 발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결정타를 날리려고 하는 그 순간….
휙!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와서 리온 발로드의 미간을 노렸다.
“큭….”
카앙!
리온 발로드는 재빨리 검을 들어서 화살을 막았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제롬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서 자신의 진형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놈! 어디를 가느냐!?”
리온 발로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발했지만 제롬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도망갔다.
무리하게 추적을 하기에는 이미 거리가 벌어진 상황이라 리온 발로드는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그 대신 그는 검을 높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리온 발로드다!!”
그러자 성벽 위의 병사들이 크게 환호하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오오오오!!”
“발로드 경! 만세!!”
“북부군 만세!!”
비록 적의 목숨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아군의 사기는 확실하게 올렸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리온 발로드는 환호성을 들으며 성안으로 돌아갔다.
“수고했습니다.”
진형으로 돌아온 제롬을 맞이해준 것은 이 공성전에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세비안 자작이었다.
그는 어딘가 미안한 표정을 하고 제롬에게 말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제롬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오.”
“감사합니다. 완벽한 결과였습니다. 오늘 테이커 경이 제 요청을 들어주신 덕분에 작전의 성공률은 더욱더 올랐습니다.”
“주군이 당신을 믿고 있으니, 나 역시 당신을 믿을 뿐이오.”
그렇게 말하며 제롬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동이 다가오자 말했다.
“나보다 이 녀석이 피로가 꽤 쌓였을 것이다. 부드러운 여물을 먹이고 푹 쉬게 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롬은 오른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아서 자연스럽게 마동에게 내밀었다.
“하하하하! 역시 대단하군. 발로드 경.”
리온 2왕자는 몹시 기본이 좋았다.
일기토에서 자신의 기사가 호쾌하게 승리를 거두고 적의 기사는 꽁무니를 빼 버린 것이다.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가 한껏 올랐고, 자신의 체면도 섰다.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별것 아닌 상대였습니다.”
그런 2왕자를 보며 리온 발로드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주변에서는 그의 공적을 칭찬했고 리온 발로드는 기분이 들떠서 크게 외쳤다.
“언젠가는 페일런 공작의 목을 베어서 전하에게 바치겠습니다.”
“하하하…. 내 그대를 믿어 의심치 않겠네.”
쿵 짝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꿈이 크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지금 이들의 분위기는 좋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랄까?
일기토가 있던 날 이후로 2왕자가 이끄는 반란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적의 공격에 원거리 투사 공격으로 맞서는 것뿐만 아니라 기병대를 출격시켜서 적진을 헤집기까지 했다.
“공격하라!”
이제까지 소극적인 수성만을 하던 반란군이 과감한 공격을 시도하자 남부군은 크게 당황하며 공성 병기도 내버려두고 뒤로 허겁지겁 후퇴했다.
“공성 병기에 불을 붙여라!”
그리고 반란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성 병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적들이 대응하기도 전에 서둘러 성벽 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됐다!”
거슬리는 공성 병기를 모두 불태웠다는 말을 들은 2왕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유일한 공격 수단도 없어진 적들이 무엇을 할지는 몰라도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공격하라!”
“와아아아아!!”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본격적인 공성이 벌어졌다.
공성 병기를 잃어버린 이상 이제는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남부군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공성에 들어간 것이다.
궁수가 화살을 쏘고 병사들이 갈고리와 사다리를 이용해서 성벽을 오르려고 했다.
“놈들이 독이 바싹 올랐습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2왕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크게 외쳤다.
“겁먹지 마라! 북부군의 위상을 보여줘라!”
‘이번 위기만 넘기면 된다.’
2왕자는 이걸 적들이 보이는 최후의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고, 공성 병기도 모두 파괴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발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위기만 넘기면 이제 공화국의 원군이 올 때까지 무난하게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들을 구하라!”
“우오오오오오!!”
남부군의 뒤편에서 한 무리의 병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병력에 펄럭이는 삼색의 깃발은….
“공화국이다! 힐데스 공화국이다!!”
“원군이 왔다!!”
병사들도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드디어 원군이 온 것이다.
순간 2왕자는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드디어 반격의 때가 왔다.
“성문을 열어라! 기사들은 전원 나를 따르라!”
“전하,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다!”
참모 중에 한 명이 말리려고 했지만 지금 2왕자는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기사단을 이끌고 성문을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혼비백산해서 뒤로 후퇴하는 남부군의 모습이 보였다.
“전군 돌격하라!!”
“오오오오오오!!”
2왕자는 북부의 기사단을 이끌고 용맹하게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성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그 순간!
삐이이이이이이익!!
길고 긴 휘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이다!”
“포위망을 형성하라!”
이제까지 도망가고 있던 남부군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초승달 진형으로 2왕자가 이끄는 기사단을 감싸면서 빠르게 포위망을 구성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은 2왕자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완벽하게 퇴로를 차단했다.
“무…. 무슨?”
“퇴, 퇴로가 차단당했습니다.”
당황하는 호위 기사들을 보고 2왕자는 크게 외쳤다.
“큭…. 당황하지 마라!”
적이 아무리 기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은 자신들이 유리하다.
공화국군이 원군으로 온 이상 성안으로 후퇴할 것도 없이 이대로 앞으로 달려서 원군과 합류를 하면 되었다.
“활로는 전방이다! 달려라!”
판단을 내린 2왕자는 그대로 말을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후방에서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기사들 중에 릭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앞으로 달릴 거라더니? 진짜 그 양반 예상대로네.”
그 옆에서 토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이 전쟁도 끝이군.”
그들은 이 시점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거의 다 왔다!”
2왕자는 미친 듯이 말을 몰리며 앞으로 달렸다.
적이 후방을 차단했을 때 내심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눈앞에 공화국군의 원군이 온 이상 이제 상관없었다.
저 멀리서 펄럭이는 삼색 깃발만이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구원이고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가 막 깃발을 세우고 있는 병력에 도착했을 때.
“헉!?”
“전하!”
갑자기 삼색기가 모두 내려갔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올라간 것은 바로 남부군의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