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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62화 (62/257)

제62화

“응?”

레이라 공주는 마차에서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마차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밀턴이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공주님.”

“아니요. 어디서 누가 ‘독한 것.’이라고 말한 느낌이 들어서요.”

“…….”

“뭐, 아마 우리 아버지겠죠. 신경 안 써도 돼요.”

밀턴은 그런 레이라 공주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을 독하다고 할 사람이라면 세상에 널리고 널렸을걸?’

하지만 겉으로는 그 말을 하는 대신에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군요. 결국 공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두 이루어졌어요.”

밀턴의 말은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몇 번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레이라 공주가 적절한 도움을 주었고, 그것은 마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처방전을 받은 것처럼 잘 먹혀들었다.

남부 귀족을 하나로 모으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는 레이라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이제 공표하고 남부 귀족들에게 왕족의 뜻을 따르는 군대라는 명분을 준 것이다.

중앙에서 다소 차별 받고 있는 남부 귀족들에게 이것은 커다란 영광, 혹은 기회로 여겨졌다.

덕분에 밀턴은 순조롭게 남부의 귀족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그녀는 독자적인 정보망을 이용해서 밀턴에게 끝없는 정보를 제공했다.

북부에서 2왕자군이 출진한 것도, 페일런 공작이 중앙군을 이끌고 출진한 것도, 그리고 2왕자군의 병력이 둘로 나눠진 것까지….

그녀가 7년 동안 들판에 씨를 뿌리듯이 만들어둔 인맥이 종횡무진 발동했다.

그게 밀턴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2왕자군을 추적해서 반란군을 섬멸하고 북부를 되찾고 나면 공주님은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되겠죠?”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2왕자는 반란을 일으켰고, 1왕자는 그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최악의 실수를 해 버렸다.

그 밑에 다른 왕자들은 논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세력이 빈약하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라 공주가 남부의 지지를 받고 영웅처럼 등장해서 나라를 구했다.

여자가 남자에 비해서 후계자로 지목되기에 불리한 인식은 있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실제 레스터 왕국의 역사에 여왕이 몇 명인가 있었으니 말이다.

“제가 왕위에 오르면, 그때는 백작님은 남부에서 변경백의 직위를 받고 남부의 맹주가 되겠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거죠.”

“그렇죠.”

레이라 공주와 대화를 하며 밀턴은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하면서 일이 착착 풀리는 과정을 함께하고 있는 것은….

‘퍽 즐거웠지.’

그렇다.

그것은 묘한 즐거움이었다.

그런 시간도 이 전쟁이 끝나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밀턴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많이 아쉬운가 보죠?”

정곡을 찔린 밀턴은 움찔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진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공주님은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항상 읽을 수 있거든요?”

“…….”

순간 밀턴은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강한 충동 본능이 순간 몸을 지배할 뻔했지만 밀턴은 속으로 열을 센 후에 차분하게 말했다.

“공주님의 그런 말에 일일이 반응하며 속으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면 저 역시 공주님이 관리하는 어장 속의 물고기가 되는 거겠죠?”

그러자 레이라 공주가 아찔하게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싫으신가요?”

“…….”

순간 나쁘지 않을지도,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밀턴은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진짜 정신 못 차리게 하네. 레벨이 MAX에 달한 특성은 이렇게 무서운 건가?’

레이라 공주의 특성 중에 레벨이 MAX에 달한 특성이 바로 유혹이었다.

유혹 LV.9(MAX) : 타고난 미모로 이성을 유혹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상대방의 판단을 흐트러트릴 수 있다.

밀턴은 이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단둘이서 얘기를 할 때면 종종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정신이 좀 약한 남자들의 경우 그녀와 대화를 할 때 잘못하면 간 쓸개를 넘어서 오장육부를 다 떼 주고도 남을 것 같았다.

“크흠…. 어쨌든 지금은 전쟁에 집중하도록 하죠.”

“그래야겠죠. 반란군이 남은 전력은 아직 충분하니까요.”

레이라 공주는 그렇게 말한 후에 밀턴에게 말했다

“기습은 이미 한 번 했으니 안 통할 거예요. 이제 순수한 실력의 승부가 되겠죠. 자신 있나요?”

“그건 앞으로 두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밀턴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한 번 패배하기는 했어도 2왕자군의 세력은 아직 끝장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본대에 1만 정도의 전력이 남아 있었고, 페일런 공작과 대치하고 있는 곳에도 1만 5,000 정도의 병력이 있었다.

급하게 그 병력을 하나로 모아서 대략 2만 5,000의 군세를 회복했다.

이제 문제는 이 군세를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냐가 2왕자군의 문제였다.

“후퇴하여야 합니다.”

우선 마리우스 후작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은 후퇴를 주장했다.

“어차피 수도 공략이 실패한 시점에서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해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어서 후퇴해서 북부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마리우스 후작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은 발밑을 든든하게 다지는 것이 우선인 듯합니다.”

후퇴를 주장하는 귀족들은 대부분이 중년층을 넘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혈기가 넘치는 젊은 귀족들은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주장했다.

“북부에 기반을 다진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번 기회에 적과 확실하게 흑백을 가리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갑자기 남부의 촌뜨기들의 기습에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전력으로는 우리가 적들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이대로 북부에 기반을 다져봤자 공화국이 우리를 제대로 챙겨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왕국과 자신들 사이의 완충 지대로 삼아서 국력을 온전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귀족들은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결판을 내고자 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2왕자는 이런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사실 양쪽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었다.

군주로서는 가장 고민되는 형국이 바로 이런 때였다.

한쪽이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양족이 옳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말만 들어주기는 어려웠다.

이럴 때 옳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현명한 군주가 가져야 할 필수 요소였다.

그런데….

‘모르겠어. 어느 쪽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2왕자는 지금 어떤 쪽으로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번 패배로 인해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2왕자는 자신이 결단을 내리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결국 최악의 결정을 내려 버렸다.

“양쪽 모두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절충안을 만들겠다.”

이도저도 아닌 중도책을 선택해 버린 것이다.

순간 마리우스 후작이 기겁을 하며 말했다.

“전하, 후퇴냐? 전진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와중에 절충안이라니요?”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시행하겠다는 거요. 위급한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해야지.”

2왕자는 그렇게 말한 후에 신하들에게 말했다.

“북부에 주둔 중인 공화국에 전령을 보내서 원군을 청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우리는 군을 결집해서 공화국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거요.”

2왕자는 자기 나름대로 좋은 절충안을 내놓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하, 공화국에서 원군을 보내준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사옵니까?”

“지금은 위급 상황이오. 그들도 기껏 만든 동맹을 잃고 싶지는 않을 것이오. 무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일단 다 들어준다고 하시오.”

2왕자의 말에 마리우스 후작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전하, 저들이 어떤 요구를 할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있는 승리요. 모르시겠소? 지금 패배하면 우리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하오나 전하….”

“그만, 이미 정한 일이오. 당장 지시대로 움직이도록 하시오.”

2왕자는 고집을 부렸다.

“전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마리우스 후작은 몇 번이고 퇴각을 주장했지만 2왕자는 듣지 않았다.

원래 마리우스 후작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2왕자였지만 최근에 큰 패배를 겪고 나서 그 신뢰도가 많이 하락했다.

결국 2왕자군은 북부로 가는 길목의 성 하나를 차지하고 틀어박혀서 농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부지런히 농성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2왕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면 이길 수 있어. 바이칼 요새에서의 대역전을 한 번 더 일으키는 것이다.’

이전에 바이칼 요새에서 1왕자의 병력을 대패시켰던 승리를 한 번 더 재현하려는 2왕자였다.

과연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

2왕자가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밀턴은 즉시 공성 준비에 착수했다.

이전에 영지전을 하면서 생각보다 잘 먹혔던 운제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서둘렀다.

‘공성전이라…. 아무리 준비를 해도 저쪽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을 테니 피해가 제법 나오겠지?’

밀턴은 속이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공성전은 전쟁 중에서도 가장 아군의 피해가 큰 전쟁이었다.

그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사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밀턴이 공성 병기 제작을 직접 감독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주군, 주군을 찾아오신 손님이 계십니다.”

토미가 밀턴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나를? 레이라 공주가 아니고?”

“예. 그렇습니다.”

대외적으로 지금 이 남부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레이라 공주다.

갑자기 귀환한 그녀의 존재에 이미 수많은 귀족들이 어떻게든 끈을 대보기 위해서 전쟁터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와 선물을 주며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다.

밀턴은 전쟁터까지 찾아와서 권력의 한 조각이라도 챙겨 보려는 귀족들의 행위가 역겨웠지만 그래도 묵인했다.

원래 권력에는 더러운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다.

그런 인간들을 다루는 것도 왕도를 노리는 레이라 공주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니 밀턴이 마냥 보기 싫다고 해서 날파리들을 쫓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벌레들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레이라 공주의 영역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레이라 공주가 아니라 자신을 찾아왔다는 손님에게 밀턴은 생소함을 느꼈다.

‘내가 실질적으로 이 군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남부의 촌놈 대장 취급 받고 있는 게 고작인데 말이야.’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찾아온 목적이 뭐지?”

그냥 인사나 하러 왔다고 하면 바쁘다고 말하고 만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토미가 전한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2왕자군이 농성 중에 있는 로비언스 성을 무너트릴 계책을 준비해 왔다고 합니다.”

“…….”

갑자기 거절하기가 어려워졌다.

‘실무 얘기라면 사정이 다르지.’

“한번 만나보도록 하지.”

“예. 그럼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밀턴은 토미의 안내를 따라서 막사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밀턴은 한 남자와 만났다.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레스트 백작님. 저는 란돌 세비안 자작이라고 합니다.”

란돌 세비안.

진흙 속에 숨겨져 있던 보석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밀턴 포레스트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세비안 자작.”

밀턴은 란돌 세비안 자작과 악수를 하며 슬쩍 상대의 상태창을 살폈다.

그리고….

‘헉!?’

밀턴은 깜짝 놀랐다.

세비안 자작의 능력치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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