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평소와 다르게 날이 서 있는 마리우스 후작의 태도에도 지크프리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응대했다.
오히려….
“수도 공격에 대해서 제가 바이런 전하에게 바람을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오신 것입니까?”
오히려 한발 앞서서 마리우스 후작이 할 말을 해버렸다.
“…….”
졸지에 정곡이 찔려서 뭐라 할 말이 궁색해진 마리우스 후작은 그냥 꿍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그런 마리우스 후작에게 말했다.
“무엇을 의심하고 계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사(國事)를 운영하는 후작님의 입장에서 충분히 타당한 의심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소.”
“하지만, 그런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바이런 전하에게 우리나라의 총통 각하이신 바하슈텐 각하의 여식인 록산느 님과의 국혼을 추진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저희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까?”
“그거야….”
사실 힐데스 공화국에서 국혼을 제의했다면 이건 의심은 고사하고 거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공화주의를 표방한 순간 모든 왕국과의 국교가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이 때문이다.
좋든 싫든 힐데스 공화국이라는 우방이 절실하다.
오히려 국혼을 제시해 준다면 감지덕지할 마당에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미안하오. 내가 실수를 했던 모양이오.”
단단하게 따지기 위해서 마음을 굳게 먹고 찾아온 마리우스 후작이었지만 상황을 인지하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런 마리우스 후작에게 지크프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도 한 말이지만 저는 후작님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그러니 사과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는 양국이 좀 더 원활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후작님이 가교 역할을 해 주실 거라고 기대해도 되겠지요?”
지크프리트의 말에 마리우스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가능한 최선을 다하겠소.”
결국 마리우스 후작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못 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그가 물러나자 지크프리트는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스스로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일수록 행동을 예상하기는 몹시 쉽지.”
***
북부의 정예 군단 3만이 수도 로렌시아를 목적으로 남하를 시작하자 레스터 왕국은 패닉에 빠졌다.
1왕자의 토벌군이 대패하고 왕국의 군사력이 최악인 상태에 북부군 3만의 남하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오거스트 국왕은 즉시 대책 회의를 열었지만 그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의 숫자는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다.
오지 않은 귀족들 중에 상당수는 1왕자의 토벌에 참여했다가 전사했거나, 혹은 북부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재산을 챙겨서 외국으로 도주해 버렸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자들이라고 해도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그러니, 2왕자님에게 왕권을 이양하고 평화적으로 화평을 맺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북부를 포함해서 중부 몇몇 영지를 2왕자님의 것으로 인정해 준다면 설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잠깐, 그럼 중부의 귀족들은 누가 설득한단 말이오?”
“나라의 위기요. 당연히 그들이 협조해야지. 그리고 협조하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그래서는 나라가 둘로 갈라집니다. 차라리 2왕자님에게 왕권을 이양하고….”
“어허! 2왕자님은 공화주의를 선언했어요. 들리는 소문에는 힐데스 공화국의 국혼도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정을 해요?!”
대전에서 격렬하게 회의를 하는 신하들을 보며 오거스트 국왕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이 레스터 왕국이 내 대에서 끝난단 말인가?’
지금 대전에 있는 귀족들 중에 그 누구도 2왕자가 이끄는 북부군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어떻게 항복하면 최대한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지킬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국왕인 자신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왕위를 이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불쾌함을 넘어서 분노가 치솟았지만 그런 귀족들을 벌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오거스트 국왕이 생각해도 최후에는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녕 방법이 없단 말인가?’
오거스트 국왕은 국정을 잘 운영한다거나 전쟁의 판도를 읽고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능력도 없었다.
그가 국왕으로서 있으며 갈고 닦아온 능력은 귀족들과의 줄다리기를 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인 뒷공작으로 정적을 해치우는 그런 국내 정치.
그것도 어디까지나 겉으로 대놓고 할 수 없는 방법들이 대부분인 뒷면의 정치 능력이었다.
지금처럼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스카이트는 왜 나오지 않았나?”
오거스트 국왕은 8만의 대군을 말아먹은 1왕자가 대전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추궁했다.
애당초 1왕자가 토벌에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아니 적어도 후퇴를 좀 빠르게 해서 군의 전력을 온전시키기만 했다면 지금처럼 치명적인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을 물어야 할 1왕자는 지금 대전에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1왕자파의 신하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왕자 전하께서는 토벌 중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서 자택에서 치료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토벌에 실패하고 비참하게 돌아온 1왕자가 하루 종일 술과 계집만 끼고 폐인처럼 지내고 있다는 말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태의 최대 원인이라고 할 있는 인물이 오지 않다니?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오?”
“그렇소. 1왕자 전하께서는 이렇게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것에 관해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당장 사람을 보내서 모셔 오도록 합시다. 여차하면 내가 직접 갔다 오지요.”
귀족들 대다수가 1왕자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1왕자 파벌의 귀족들은 그저 묵묵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옹호를 하려고 해도 이번 토벌의 실패로 인해서 세력이 많이 줄었다.
거기다 솔직히 말하면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때 대전의 안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회의를 소집하고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이제야 나타난 그 남자의 등장에 시끄럽던 회의장에 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이 남자의 존재감은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전하, 신 션 페일런이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이유가 있어 참석이 늦은 점을 사과드립니다.”
“오오오…. 페일런 공작. 그대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오.”
회의 내내 찌푸려져 있던 오거스트 국왕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찾아왔다.
레스터 왕국의 유일한 마스터.
그의 존재는 지금 오거스트 국왕에게 있어서 최후의 희망이었다.
국왕에게 인사를 올린 페일런 공작은 주변을 스윽 돌아봤다.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고 전부 고개를 숙이기에 급급한 귀족들을 보며 페일런 공작은 혀를 찼다.
‘이런 놈들이 귀족이라고….’
그는 그런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회의에 좀 늦게 참가했는데…. 그동안 모여서 어떤 얘기를 했는지 누가 좀 말해 주겠소?”
그 말에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몇몇 귀족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북부군의 위세가 강하고, 지금 중앙에 병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화친을 맺는 쪽으로 노선을 잡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이런 왕자 전하는 원래 우리 레스터 왕국의 정통한 왕위 계승자. 차라리 그분에게 왕위를 해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안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북부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그만.”
귀족들이 하는 말을 듣던 페일런 공작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리고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
“개 짖는 소리는 그 정도면 될 것 같소.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는 건가?”
대전의 귀족들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그가 이 나라의 유일한 공작이라고 해도 이건 심각한 모독이다.
명예를 목숨처럼 여겨야 하는 귀족이라면 이건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왜 그러지? 불만 있는 사람은 나에게 결투라도 신청하게. 내 시간이 좀 없으니 오늘 안에 다 정리해 주지.”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들에게 있어서 명예보다는 목숨이 더 소중한 듯했다.
평소 입버릇하고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페일런 공작은 주변 귀족들을 다 닥치게 만든 후에 오거스트 국왕을 향해서 말했다.
“전하. 바이런 왕자는 감히 공화주의를 주장하며 나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화평이나 왕위의 이양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페일런 공작의 말에 오거스트 국왕은 가슴이 후련해졌다.
하지만 기분과 현실은 엄연한 별개의 일이었다.
“지금 내 불효자식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도로 오고 있네. 수도의 병력을 아무리 끌어모아도 5,000이 되지 않네.”
3만 대 5,000.
병력의 차이가 무려 여섯 배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페일런 공작이 가세한다고 해도 이 차이를 메울 수는 없었다.
걱정스런 표정을 하는 국왕에게 페일런 공작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5,000이면 충분합니다. 신에게 전권을 맡겨 주시면 반드시 역도들을 물리치겠습니다.”
페일런 공작의 이 말이야말로 오거스트 국왕이 가장 바라던 말이었다.
“정녕 가능하겠는가?”
“예. 단, 신에게 전권을 맡겨 주셔야 합니다.”
“이를 말인가? 당연히 그대에게 군의 전권을….”
“지휘권만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포로의 취급과 전후의 상벌을 논하는 논공의 권리까지 그 모든 것을 저에게 일임해 주셔야 합니다.”
페일런 공작의 말에 오거스트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전후에 논공의 권리까지 모두 말인가? 그것은 왜…?”
국왕의 물음에 페일런 공작은 주변의 귀족들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신의 전쟁에 빌붙어서 기생하려 하는 기생충들을 떼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벌레들이 군의 사기를 깎아내는 법이죠.”
한마디로 주변 귀족들을 견제해서 함부로 끼어들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페일런 공작의 말에 귀족들은 다시 한번 심각한 모독으로 느꼈지만 역시 나서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거스트 국왕은….
“알겠네. 자네가 원하는 모든 권한을 위임하지.”
그리고 오거스트 국왕은 왕좌에서 일어나 페일런 공작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의 보검을 주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션 페일런 공작에게 전쟁의 전권을 위임하며 이는 전시 상황뿐 아니라 전후 논공행상에 관해서도 모든 상벌은 페일런 공작의 권한으로 이뤄질 것이다. 페일런 공작은 즉시 군을 이끌고 북부의 반역도를 토벌하라.”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레스터 왕국의 유일한 마스터인 페일런 공작이 5,000의 군을 이끌고 북부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출진했다.
하지만 이때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어째서 페일런 공작이 전시 작전권뿐만이 아니라 전후의 논공행상에 관한 권리까지 모두 동원했는지….
그리고 그게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인지도 말이다.
“페일런 공작이 출진했다고?”
당연히 2왕자의 귀에도 페일런 공작의 출전 소식은 들렸다.
북부를 나서고 남하를 시작한 2왕자군은 이제까지 일방적인 승리를 거듭하며 순조롭게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중간에 2왕자군을 막아야 할 영주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항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풀 수 없었던 것은 수도에 있는 션 페일런 공작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결국은 나서는군. 예상은 했었지만….”
마리우스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은 다른 북부 귀족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최근 스트라부스 왕국이 거의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한 방에 형국을 뒤집은 것 역시 마스터의 참전이 컸다.
비록 스트라부스 왕국처럼 마스터가 세 명이나 한 번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마스터라는 존재는 부담이 안 될 수 없었다.
“병력은 어느 정도라고 하던가?”
“5,000이라고 합니다.”
“5,000? 정말 확실한가?”
2왕자는 전령의 보고에 다시 한번 확인했다.
“틀림없습니다. 수도에 심어 놓은 세작과 장거리 정찰의 보고가 모두 일치한 결과입니다.”
“5,000이라…. 할 만하기는 하군.”
2왕자군이 이끄는 북방군은 원래 3만이었다.
그리고 수도로 남진을 계속하면서 지방의 귀족들이 항복한 덕분에 병력의 손실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병력의 숫자는 더 늘었다.
항복한 영주들에게 반 협박으로 병력을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지휘 체계가 달라서 제대로 써먹기는 어렵겠지만 후방 보급이나 전면에 화살받이로 써먹기에는 딱 좋은 병력이 8,000 정도 더 늘었다.
총 병력이 3만 8,000이었으니 상대와의 병력 차이는 사실 일곱 배가 넘는다.
“아무리 페일런 공작이 마스터라고 해도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소?”
2왕자의 질문에 곁에 있던 마리우스 후작이 대답했다.
“틀림없이 할 만은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가 문제라는 거요?”
“페일런 공작도 그 점을 알고 있을 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면 승부를 한다는 것은 뭔가 속셈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있다는 것일 겁니다.”
“음….”
2왕자는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능력을 보면 1왕자나 2왕자나 다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이다.
자존심에 비해서 무능하고 주변에 잘 휘둘리기도 했고 욕심이 많다.
다만, 2왕자가 1왕자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점이 있다면 그건 겁이 더 많다는 것이다.
겁이 많아서 일이 잘 풀려도 의심을 하고, 그 의심이 약간이지만 신중함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래봐야 대단한 차이는 아니지만 그런 면에서는 2왕자가 1왕자 보다는 조금 더 낫다.
참고로 1왕자가 2왕자보다 더 나은 점은 마누라가 똑똑하다는 것 정도다.
그런 2왕자에게 마리우스 후작이 말했다
“전하, 생각을 바꿔 말하면 페일런 공작이 수도를 벗어난 것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굳이 우리가 페일런 공작을 이겨야 할 필요는 없지요.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도의 함락이옵니다.”
마리우스 후작의 말에 2왕자는 솔깃한 표정을 했다.
“뭔가 묘안이라도 있는 것이오?”
“잠시 귀를 좀….”
그리고 마리우스 후작이 뭐라고 말을 하자 2왕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숙부님이오. 실로 묘안이오.”
“과찬이옵니다. 전하.”
마리우스 후작은 겸손하게 말을 하면서도 표정에는 자신감이 드러나 있었다.
사실 마리우스 후작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빛을 발하는 페일런 공작에게 일종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마스터라고 해도 조상 대대로 북부의 국경을 지켜온 변경백인 자신도 받지 못한 공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일런 공작. 당신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겠다.’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지략이 페일런 공작의 무력을 넘어선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호승심에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