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야습이다!”
비록 바이칼 요새를 공격하는 데 애를 먹고 있기는 해도 이제까지의 전황은 1왕자가 이끄는 토벌군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자연스럽기 지휘관들은 방심했고, 병사들은 피로로 경계를 게을리했다.
그 틈을 타서 2왕자군의 별동대가 1왕자군을 공격한 것이다.
“전부 불태워라!”
“지금까지 당한 걸 열 배로 갚아주자!!”
“우오오오오오!!”
갑작스런 야습에 당황한 1왕자군은 피해가 제법 생겼다.
다행인 점은 야습에 나선 적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과 그 지역 현장 지휘관이 제법 유능하다는 것이었다.
“허둥대지 마라!”
이 지역의 현장 지휘관인 기사 세이몬은 직접 검을 들고 나와서 적에게 맞서 싸웠다.
그리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며 용맹하게 현장을 지휘했다.
“적은 소수다! 맞서 싸워라! 전령은 본대에 습격 사실을 알려라! 거기 보병 100명은 나를 따라라!”
기민한 지휘관의 대응에 병사들이 정신 차리고 따르자 비교적 빠르게 상황을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미 발생한 피해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피해 상황은 어느 정도이냐?”
“인명 피해는 집계를 해 봐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냐?”
“캐터펄트 다섯 대가 파괴되었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기사 세이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양동이었구나.’
적은 공성 병기의 파괴를 노리고 잠입했던 것이다.
공격은 최선을 다해서 막았지만 너무나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다음 날.
“이 멍청한! 야습을 막지 못한 지휘관을 당장 참수하고 경계를 서던 병사들도 모두 참수해라.”
화가 간 1왕자가 참수 명령을 내리자 트라우스 후작은 기겁을 했다.
“전하, 여기서 책임자를 처형하면 군의 사기에 지장이 생깁니다. 벌을 내리되 차라리 스스로 책임을 지는 쪽으로….”
“야습에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한 지휘관 따위에게 무슨 책임을 바란단 말인가?”
“하오나….”
“그만! 이미 결정된 일이다. 썩 시행하라!”
트라우스 후작의 간언에도 1왕자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결국 현장 지휘관인 기사 세이몬을 포함해서 100명에 가까운 병사들의 목이 날아갔다.
“너무하는 것 아니야?”
“저 세이몬이라는 기사 양반…. 기사치고는 제법 괜찮은 인물이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공포심과 불안감을 느꼈다.
병사들의 머릿속에 1왕자의 포악한 이미지가 점점 굳어져 갔고, 이날을 시점으로 병사들의 탈영이 가속되었다.
처음의 야습에 재미를 본 덕일까?
밤마다 별동대가 1왕자군의 진형을 공격했다.
처음만큼 피해는 주지 못했지만 거듭된 야습으로 병사들의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지휘관들은 서서히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고,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을 앞에 두고 점점 사기가 떨어지자 탈영도 점점 늘어만 갔다.
그렇게 지휘관들의 위기감이 심각해지기 시작할 그 무렵….
“슬슬 시작해 볼까?”
공화국의 파견군인 지크프리트가 손을 썼다.
“전하, 급보입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전령이 1왕자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무슨 일이냐?”
“보…. 보급품을 호송하고 있던 세인브릿지 백작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급품 역시 모두 파괴당했다고 합니다.”
콰아앙!!
“그게 무슨 망발이냐?!”
전령의 보고에 1왕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급 부대가 공격당했다니?
지금 2왕자파의 군은 모두 바이칼 요새에 집중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혹시…?’
1왕자는 후방의 귀족들 중에 누군가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나를 배신한 것이냐?”
하지만 그런 1왕자의 예상은 틀렸다.
보급품을 공격한 것은….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입니다. 놈들이 이 전쟁에 개입하며 보급 부대를 공격했습니다.”
“…….”
1왕자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놈…. 놈들이 왜…? 바이런 이 개 같은 놈!!”
그제야 1왕자도 바이런 2왕자가 어째서 공화주의로 돌아섰는지 알았다
힐데스 공화국은 애당초 이 판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
전쟁의 초반에 승승장구하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1왕자군은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진 상황에 힐데스 공화국의 참전.
거기다 보급 부대의 괴멸은 치명타였다.
지휘관들은 서둘러 정보를 통제했지만 어느새 병사들에게도 모든 정보가 흘러 들어갔다.
“힐데스 공화국이 참전했다고?”
“젠장, 거기다 보급 부대도 괴멸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오늘 배식이 멀건 죽밖에 없었던 건가?”
“제길, 이 죽도 언제까지 나올지 몰라. 그런데 저 미친 1왕자 새끼는 계속 공격하자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XX!! 진짜 상황 X같네.”
병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것을 보고 란돌 세비안 자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화국 놈들이 병사들 안에 간자를 심었군. 이쯤 되면 뒤집을 수도 없는 건가?’
지휘관이 정보를 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소문이 빠르게 확산된다는 것은 이미 병사들 사이에 공화국에서 심은 간첩이나 혹은 그들의 사상에 넘어간 공화주의자들이 숨어 있다는 말이다.
공화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
‘진짜 그 말대로군.’
세비안 자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점에서 전쟁의 승산이 없다.
아니, 어쩌면 이 나라 자체가 멸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보급 부대가 괴멸한 상황에서 선택은 하나뿐이다.
내전은 길어지겠지만 어떻게든 퇴각해서 남은 전력으로 다음을 노린다.
그러나 1왕자는 현실을 받아들지 않고 바이칼 요새를 무너트리기만 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주장하며 고집을 부린 것이었다.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전쟁을 계속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었다.
열흘간 공격에도 바이칼 요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적의 반격이 시작되자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패배했다.
병사들은 싸우기보다는 항복하기 바빴을 정도였다.
1왕자는 남은 병력을 추슬러 비참한 퇴로에 올랐다.
퇴로는 악몽 그 자체였다.
보급선을 끊었던 힐데스 공화국의 군대는 그대로 후방에서 진을 치고 1왕자군이 함락시켰던 요새를 수복했고, 퇴로에 군을 배치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힐데스 공화국의 군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군량이 다 떨어져서 군마를 잡고 기사나 귀족들도 모두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그마저도 떨어지자 병사들은 근처 민가를 약탈해야 했다.
출진할 때 8만의 군세를 거느리고 출진했지만 비참한 패잔병으로 돌아올 때는 5,000명도 안 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하하하하!! 과연 대단하오. 역시 그 스트라부스 왕국과도 자웅을 겨룬다는 힐데스 공화국군다운 위용이오.”
한때 절벽 끝까지 몰렸지만 1왕자군을 완벽하게 박살내고 이제는 북부에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기쁜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상황이 여기까지 오자 2왕자는 욕심이 들었다.
“지금 적은 8만이라는 대군을 잃고 패퇴했소. 이제 수도까지 단숨에 진격하는 게 어떻소?”
2왕자는 지금이 하늘이 내린 기회로 보였다.
적은 대군을 잃고 회복이 힘들 테니 이틈에 공화국군과 함께 진격한다면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듯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2왕자의 말에 힐데스 공화국의 대표인 지크프리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훌륭한 혜안이십니다. 확실히 적은 지금 대군을 잃고 퇴각 시에 민가를 약탈하면서 인망도 잃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군을 진격하기에 최고의 적기일 것입니다.”
“오오오… 역시 공도 그렇게 생각하오?”
반색하며 기뻐하는 그를 보며 지크프리트가 살짝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오나….”
“응? 왜 그러시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2왕자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씁쓸하게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군을 진격시키고 싶어도 저에게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권한이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이오?”
“제가 본국에서 받은 명령은 공화주의를 천명한 전하를 도와서 레스터 왕국에 공화주의를 전파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하의 세력권인 레스터 왕국 북부를 수호하는 것이 제가 받은 명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도를 공격하는 것에 힘을 보태줄 수 없다는 말이오?”
“죄송합니다. 저도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제게는 이 이상 군을 움직일 권한이 없습니다.”
“으으으음….”
지크프리트의 말에 2왕자는 안타까운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좋은 기회인데 이런 기회를 그냥 날려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2왕자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그러나 전하. 저의 재량권 안에서 전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호오, 그게 무엇이오?”
“제가 본국에서 받은 명령은 어디까지나 전하의 영토를 지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와 공화국의 군대가 북부에 빈틈없는 방어진을 펼치겠습니다. 그 틈에….”
“나는 북방의 정예 군단 3만을 전부 이끌고 수도를 공격하면 되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2왕자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듣고 보니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지크프리트는 2왕자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권했다.
“무릇 전쟁이란 공격과 수비에 적절한 힘을 분배해야 하는 법. 저희 공화국군이 신명을 다해서 전하의 영토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용맹한 북부 정예 군단을 이끌고 레스터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킨다면….”
“과연, 훌륭한 의견이오.”
사실 2왕자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잘 모르지만 지크프리트의 부추기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공화국이 북부 영토를 지켜주고, 자신이 북부의 정예군을 이끌고 간다면 수도를 함락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끌면 이 기회는 지나가 버린다.’
결심을 굳힌 2왕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즉시 군을 움직인다. 마리우스 후작을 불러와라!”
2왕자는 공격을 결심했다.
2왕자가 자신의 일파를 모아서 진격에 관한 의사를 밝혔다.
“그러니, 공화국이 수비를 맡고 우리는 전군을 이끌고 수도를 공격하는 것이오.”
2왕자의 주장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그의 외숙부이기도 한 마리우스 후작이었다.
“전하, 그것이 정말 전하의 생각이십니까?”
“그렇소. 이상한 걸 묻는군.”
마리우스 후작의 말에 2왕자는 다소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마리우스 후작은 여전히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그놈이 옆에서 이상한 바람을 넣은 것은 아닐까?’
2왕자가 공화국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느낌을 받았다.
마리우스 후작은 필요에 의해서 힐데스 공화국과 손을 잡기는 하지만 공화국은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집을 텅텅 비우고 그 집을 공화국군에게 지키게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마리우스 후작만이 아니었다.
“전하, 지금은 우선 북부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 우선인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공화국이 우리의 영토를 지켜준다고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른 북부의 귀족들도 마리우스 후작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 북부는 그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 받아온 영지였다.
그걸 공화국에게 잠시지만 맡긴다는 것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왕자는 그런 귀족들의 반발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대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나 역시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공화국군에 우리 기반을 맡기고자 하는 게 아니오.”
그렇게 말하면서 2왕자는 품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이것은 힐데스 공화국의 총통 바하슈텐의 장녀 록산느와 나 바이런 폰 레스터의 약혼을 공식 서류로 남긴 것이오.”
2왕자의 말에 다른 귀족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공화국과 혈맹을 맺을 생각이십니까?”
이건 정말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설마 2왕자가 공화국과 단순 동맹을 넘어서 혈연관계까지 맺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놀랄 것 없소. 지금 우리에게는 공화국의 도움이 절실한 바. 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도 믿을 만한 우방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오.”
그 대가로 혈맹을 맺겠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동맹과 혈맹은 그 무게가 다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북부의 귀족들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야. 확실히 지금 수도는 텅텅 비었다고 해도 좋으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르지.’
‘북부의 세력을 공고히 해봤자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뿐이지. 하지만 우리가 수도를 함락하면?’
불안감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 북부의 귀족들에게 2왕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소. 더 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수도 공격이 결정된 것으로 알겠소.”
그렇게 북부의 군단 3만의 공격이 결정되었다.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일까?’
2왕자의 외숙부인 마리우스 후작은 불안감이 강하게 들었다.
북부의 정예군을 움직여서 수도를 공격하기에 지금이 좋은 기회인 것은 확실하다.
1왕자가 동원한 8만의 대군을 철저하게 패퇴시킨 지금이라면 북부 군단을 막을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부의 영지를 공화국에 맡긴다는 것은 역시 불안했다.
그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마리우스 후작은 지크프리트를 찾아갔다.
“이런, 마리우스 후작님.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지크프리트의 여유 있는 태도에 마리우스 후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