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전략 회의가 끝나고 트라우스 후작은 자신의 제자인 세비안 자작을 나무랐다.
“란돌, 너라는 아이는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것이냐?”
“전 그냥 참모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쯧, 같은 말이라고 해도 가려서 하는 방법이 있지 않느냐? 스카이트 왕자 전하의 성품을 알고 있으면서 어찌 물러날 줄을 몰라.”
스승의 질책에 세비안 자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하, 정말 저런 왕자를 주군으로 모시려 합니까? 한눈에 봐도 폭군과 암군의 기질이 둘 다 보이고 있습니다.”
“말을 조심하거라.”
트라우스 후작은 엄한 어조로 제자를 꾸짖었다.
“스카이트 폰 레스터 왕자 전하께서는 정통한 왕실의 핏줄이시다. 2왕자인 바이런 전하가 공화국의 사상에 물든 지금 왕실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왕국의 신하인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게 도리인 것이다.”
“…….”
“전하에게 다소 모자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옆에서 채워주는 것이 신하인 우리의 역할이다. 너는 그 점을 명심하거라.”
“…….”
“어허? 어찌 대답이 없느냐?”
스승의 추궁에 세비안 자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하지만 세비안 자작이 아무리 생각해도 1왕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라가 똑바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북부의 요새를 함락한 1왕자군은 그대로 진격하여 다음 요새를 공격했다.
그리고 두 번째 요새 역시 이틀 만에 떨어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로 맹위를 떨치며 진군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시간 휴식 후에 다시 진군한다. 전군을 그동안 체력을 회복하라.”
지휘관의 명령에 병사들은 분노를 넘어서 허탈감을 느꼈다.
“두 시간 휴식?”
“사흘 동안 전투를 두 번이나 마쳤는데 두 시간 만에 체력을 회복하라고?”
“미친, 우리가 무슨 소드 마스터인 줄 아나?”
사실 지휘관들도 지금 병사들의 행군이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1왕자는 최대한 빠르게 이 전쟁을 끝내려고 하고 있고, 그걸 말리려고 간언을 했던 세비안 자작은 목이 날아갈 뻔했다.
누구도 나서서 말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무리한 진격 명령은 병사들의 상태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병사들의 마음을 알고 있는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다독였다.
이제 곧 반란군의 근거지인 바이칼 요새다.
그곳만 무너트리면 이 전쟁은 끝이고 막대한 포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1왕자의 무모한 진격전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쾌승을 연이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당하는 입장인 2왕자에게 있어서는 섬뜩할 정도였다.
“정말 괜찮은 것이오? 이미 텍토린 요새와 브란트 요새도 무너졌소. 이미 적이 지척까지 온 상황이란 말이오?”
2왕자는 눈앞에 있는 두 명의 남자들을 향해서 애써 불안감을 숨기며 말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인물 중에 한 명은 북부의 변경백이라고 불리는 데릭 마리우스 후작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외숙부이기도 한 그는 지금 2왕자의 최대 지지자였다.
문제는 또 한 명에게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는 이미 상정 범위 안입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2왕자를 안심시키는 인물의 이름은 지크프리트.
힐데스 공화국에서 총통부 직속의 인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힐데스 공화국에서 이번 전쟁에서 2왕자를 돕겠다고 하며 보내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너무 빠르지 않소. 전쟁을 개시하고 열흘도 되지 않아서 적이 벌써 지척에 왔소.”
“아마 보급선에 한계가 있어서 전쟁을 서두르는 거겠죠. 오히려 더 잘된 일입니다. 병사들은 지쳤을 테고 적의 약점이 무엇인지도 명확해 졌으니까요.”
“맞습니다. 전하. 적은 무리한 진격으로 인해서 지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힘을 아끼고 전력을 비축해 둔 것입니다.”
지크프리트에 이어서 외숙부인 마리우스 후작까지 한마디를 거들자 2왕자도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했다.
“정말 괜찮다는 거요?”
“물론입니다. 우리를 믿어 주십시오. 그 강대한 스트라부스 왕국과도 자웅을 겨루며 싸워온 우리입니다. 저희가 보기에 이 전쟁은 이미 우리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크프리트가 이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하자 2왕자도 애써 불안감을 가라앉혔다.
‘괜찮겠지? 힐데스 공화국의 원군이 제때 도착하기만 한다면….’
2왕자는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힐데스 공화국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힐데스 공화국은 평화로운 레스터 왕국과 달리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나라다.
그래서 힐데스 공화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서 왕족인 자신이 직접 공화주의자라고 공표하기도 했다.
이제 이 내전에서 이긴 후에 그는 레스터 공화국의 초대 총통이 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럼, 나는 두 사람만 믿겠소.”
2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조카가 못난 모습을 보여 죄송할 따름이오.”
“아닙니다. 그래도 구심점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2왕자의 앞에서 나오자 마리우스 후작과 지크프리트는 서로 사무적인 어조로 대화를 했다.
“힐데스 공화국의 원군은 정말 이미 도착한 것이오?”
“그렇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까지는 모습을 숨기는 것이 효과적이죠.”
“그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마리우스 후작은 잠시 말을 흐렸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혹시 힐데스 공화국에서 나를 이용만 할 생각이라면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습니다. 우리로서도 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그보다는 하나라도 믿을 만한 동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지크프리트의 말에 마리우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믿겠소. 하지만 유념해 두시오. 내가 그대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명심하도록 하죠.”
지크프리트는 공손하게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덕분에 마리우스 후작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지크프리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옅은 미소가 말이다.
바이칼 요새.
레스터 왕국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최대급의 요새로 성벽의 규모나 견고함이 다른 요새들과는 격이 달랐다.
북부의 변경백 마리우스 후작이 직접 다스리는 이 요새는 이론적으로 1만의 군대가 3년 동안 머물면서 농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는 곳이었다.
북부의 관문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힐데스 공화국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켜온 요새였다.
“대단하군. 저기가 바이칼 요새인가?”
“그야말로 철옹성이군.”
기세 좋게 반란군을 무너트려 온 1왕자도 직접 바이칼 요새를 두 눈으로 보자 이번에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성벽을 저렇게 높게 지었지?”
1왕자의 말에 곁에 있던 트라우스 후작이 말했다.
“바이칼 요새는 성벽이 높아서 일반 병사들이 갈고리를 던진다고 해도 성벽에 걸기 쉽지 않고 타고 올라가는 것은 더 어렵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성 병기를 이용해서 성벽과 성문을 두들겨야 합니다. 저 성벽은 넘는 게 아니라 파괴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곳이옵니다.”
트라우스 후작의 말에 1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성 병기의 숫자는 충분하오?”
“예. 주변 영지에서 미리 만들어 두라고 한 것을 최대한 차출해 왔습니다. 캐터펄트와 발리스타를 20대 이상씩 준비했습니다.”
“좋군. 그럼 공격을 시작하시오.”
1왕자가 공격 명령을 내리자 트라우스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그보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2왕자에게 항복 문서를 전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항복 문서? 바이런 그놈이 이 와중에 항복을 하겠소?”
“여기까지 몰렸습니다.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면 지금 전하의 아량이 유일한 구원으로 보일지도 모르옵니다.”
“흐음….”
“전하, 피를 흘리지 않고 적을 이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상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번 시도해 보아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소. 그럼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1왕자가 허락을 하자 트라우스 후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병사들이 조금은 쉴 수 있겠지.’
사실 트라우스 후작은 2왕자가 항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항복을 권한 것은 사신이 오가고 어느 정도의 유예 기간이 생기면 며칠 동안은 병사들이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트라우스 후작의 배려는 불과 하루밖에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1왕자가 써서 보낸 고압적인 항복 권고에는 자비가 어쩌고 목숨만은 살려주니 저쩌고 하는 말이 써져 있었다.
형제는 닮는다고 하던가?
“감히….”
2왕자는 그 고압적인 서신에 제대로 열이 받았다.
그리고 2왕자가 보낸 답장으로 사신의 목을 잘라서 돌려보냈다.
“바이런!! 이 개만도 못한 놈!!”
결국 1왕자도 폭발했다.
“당장 바이칼 요새를 함락시켜라! 바이런은 절대 죽이지 마라. 반드시 사로잡아서 내 앞에 끌고 와라!”
결국 전쟁은 예정된 것이었다.
“공격하라!!”
“우오오오오오오!!”
“앞으로!! 겁먹지 말고 전진하라!”
불과 하루밖에 쉬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전쟁이 벌어지고 가장 편하게 휴식을 취한 병사들은 바이칼 요새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 요새만 떨어트리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마지막 집념을 쥐어짜는 것이다.
트라우스 후작이 수완을 발휘해서 미리 만들어둔 공성 병기가 거칠게 바이칼 요새를 두들겼다.
하지만 바이칼 요새의 성벽은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견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적들 역시 성벽 위에 석궁과 발리스타를 잔뜩 배치하고 대응하고 있었다.
“쏴라! 놈들의 공성 병기를 우선적으로 파괴하라!”
“겁먹지 마라. 높이에서 유리한 우리의 화살이 더 먼저 닿는다. 계속 쏴라!”
애당초 북부군의 정예들은 모두 이 바이칼 요새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까지의 요새와 달리 바이칼 요새는 철저하게 항전하며 1왕자군을 물리치고 있었다.
“…·어려워. 이런 방식으로는 무너트릴 수 없어.”
전황을 보고 있던 란돌 세비안 자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이칼 요새 같은 철옹성에 적이 만반의 준비까지 갖추고 있다.
여기에 공성 병기가 좀 준비되었다고 정공법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했다.
“아카데미에서 교사직을 너무 오래 하신 것 아닙니까? 스승님. 전쟁은 교본대로 풀리는 게 아닙니다.”
레스터 왕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전략가인 트라우스 후작.
그는 세비안 자작을 두고 자신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마음먹으면 사흘 만에 성을 함락시킬 방법도 있기는 한데….”
세비안 자작의 전략은 이미 스승을 뛰어넘은지 오래였다.
하지만 1왕자에게 찍히고 근신 명령을 받은 그로서는 그저 답답하게 능력을 썩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어느새 열흘이 되었다.
끈질긴 공성의 결과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냐!?”
1왕자의 인내심이 말이다.
이제까지 하루나 이틀이면 함락시킬 수 있었던 요새들과 달리 바이칼 요새는 열흘이 가도록 버티고 있다.
아니, 무너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의 공성 병기가 반 이상 파괴되었고 병력의 손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거기에 1왕자는 점점 초조해졌고 결국 참모진들에게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을 해 보란 말이다. 도대체 경들이 얼마나 무능하면 열흘이 넘게 공격해도 아군의 피해만 늘어나느냔 말이다!”
1왕자의 호통에 참모진은 찔끔하며 움츠릴 뿐.
그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트라우스 후작.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공성 병기를 동원해서 성벽을 무너트리면 바이칼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말일세.”
1왕자의 추궁에 트라우스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제 예상보다 적의 준비가 더 좋았습니다.”
“결국 경의 실수란 말이 아닌가? 쯧….”
“…….”
1왕자의 질책에 트라우스 후작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그였기에 그저 묵묵하게 감내할 뿐이었다.
사실 여기서 트라우스 후작이 생각하는 작전은 있었다.
장기전을 각오한 고립 작전이다.
바이칼 요새에 아무리 물자가 많이 비축되어 있다고 해도 철저하게 고립시키면 언젠가 한계는 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포위망을 철저하게 구성한 후에 적을 고립시키면 된다.
물론 전쟁의 시일이 꽤 길어지기는 하겠지만 요새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많은 병력은 필요 없다.
봉쇄를 위한 병력을 남기고 나머지는 해산.
그사이에 1왕자는 왕도로 올라가서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하고 정통성을 확고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과연 전하가 따르실까?’
트라우스 후작은 도저히 1왕자를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지금 1왕자는 눈앞에서 2왕자의 시체를 보기 전에는 절대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최대한 빠르게 바이칼 요새를 함락시키고 2왕자를 처형하는 것이었다.
장기전을 염두한 고립 작전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다른 묘책이 있는 자는 없는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1왕자가 참모진을 닦달했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이 상황에서 뾰족한 묘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성 병기의 숫자를 더 늘려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병사들도 좀 더 독려해서….”
참모 중에 한 명이 억지로 쥐어짜서 한마디를 하자 1왕자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바이칼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겠는가?”
“그건 해봐야….”
자신감 없는 참모의 목소리에 1왕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능하군. 해봐야 안다니? 그게 참모가 할 말인가?”
“송구합니다.”
1왕자의 질책에 참모진들은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무슨 작전 참모가 마술사인 줄 아나?’
‘거의 생떼군.’
엄격함과 억지를 착각하는 윗사람은 인망을 잃어버리기 쉽다.
지금 1왕자의 상황이 딱 그랬다.
결국 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지지부진하게 끝났다.
그리고, 바로 그날을 기점으로 1왕자의 진짜 시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