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밀턴은 그녀의 용의주도함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자신도 특이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탄하는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가 설명을 계속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변했어요. 이제는 2왕자를 죽인다고 해서 내전을 멈출 수 없게 되어 버렸어요.”
“어째서입니까?”
“2왕자가 내전을 선포하기도 전에 힐데스 공화국에서 먼저 판에 끼어들었어요. 2왕자가 공화주의를 주장하면 힐데스 공화국은 형제를 돕기 위해서 군을 움직이겠다고 제의했다 하더군요.”
“그런 일이….”
“아마도, 힐데스 공화국에 꽤 유능한 사람이 있나 봐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어서 판을 다 짜버렸어요. 내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멈출 수 없게 되어 버렸어요.”
“…….”
상황은 표면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이건 표면상으로는 내전이었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2왕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힐데스 공화국이 침략을 시작한 것이다.
모든 설명을 다 마친 레이라 공주는 밀턴에게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말했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죠. 나는 분명 왕위를 원해요. 그러기 위해서 지난 7년을 살아왔어요. 하지만….”
레이라 공주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 목적을 위해서 죄 없는 민초의 피를 흘리게 할 정도로 권력에 눈이 멀지는 않았어요.”
밀턴은 레이라 공주의 강직한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진심으로 보인다.’
여전히 그녀가 선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리를 저버리면서까지 권력을 탐하는 쓰레기는 아닌 듯했다.
“불쾌한 의심을 해서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받아들이죠.”
밀턴이 사과를 하자 레이라 공주도 받아들였다.
분위기가 환기되자 밀턴이 말했다.
“2왕자의 뒤편에 힐데스 공화국이 붙었다면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는 숨을 죽이고 있겠군요.”
“맞아요. 그러니 백작은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부디 이 나라를 구해 주세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쉽지만, 남부의 전력을 최대로 모은다고 해도 공화국을 상대로 이긴다는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평화에 찌든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에 비해서 힐데스 공화국의 병사는 항상 전쟁에서 단련된 병사들이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전선에서 싸운 적이 있는 밀턴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나름대로 힘을 빌려줄 겁니다. 백작님은 우선 남부의 전력을 최대한 하나로 모으세요. 부족한 부분은 제가 도와드리죠.”
“그 도움은 물론 공짜가 아니겠죠?”
“전에도 말했죠. 우리는 동맹.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성취시키면 되는 거죠. 안 그런가요?”
“그렇긴 하지요.”
밀턴은 대답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구국(救國)의 영웅이라…. 그런 명예를 욕심낸 적은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밀턴은 이렇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죠.”
“백작님을 믿겠어요.”
그렇게 두 사람의 동맹이 성립되었다.
***
- 토벌령.
바이런 폰 레스터 2왕자는 북부 귀족들을 모아 공화주의를 표방하며 유서 깊은 왕국의 근간을 무너트리고 있다.
바이런 폰 레스터는 더 이상 왕국의 왕족이 아니며 국가의 반역자임을 선포한다.
왕국의 충성스런 신하들은 군사를 모아서 왕국의 제1왕자인 스카이트 폰 레스터의 이름하에 하나로 뭉쳐 북부의 반역자를 토벌하여라.
칙서가 레스터 왕국 전토에 퍼졌다.
내용만 보면 2왕자는 그냥 죽일 놈이었다.
귀족들은 차기 왕위가 확실시되는 1왕자의 눈치를 살피며, 중앙의 귀족은 물론이고 지방 귀족들도 상당수가 힘을 모았다.
다만, 그 와중에 1왕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발생했다.
“포레스트 백작, 론도 남작, 브레이먼 남작, 케이론 자작….”
명부를 하나하나씩 읽어가던 1왕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하게 말했다.
“남부 귀족들이 단체로 정신병이라도 걸린 건가? 감히 내 부름에 불응을 하다니?”
수많은 귀족들이 저마다 군사와 군량을 잔뜩 실고 왔으며, 몇몇은 군자금을 빙자한 뇌물을 준비해서 어떻게든 1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저마다 대세를 따르려고 안달이 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남부의 귀족들만 칙령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가지각색이었지만 병환이나 영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식의 둘러대는 변명뿐이었다.
이러니 1왕자의 시선에는 남부가 안 좋게 찍힐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포레스트 백작. 그대가 내 부름에 응하지 않겠다 이거지?”
자신의 사람이라고 믿었던 밀턴이 칙령에 불응하자 불쾌함을 넘어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전하.”
“그렇습니다. 남부의 촌놈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애당초 빈약한 남부의 전력 정도는 없어도 충분합니다.”
1왕자의 불쾌한 심정을 파악한 주변 귀족들은 듣기 좋은 말로 그의 비위를 맞췄다.
아마 꼬리가 달렸다면 맹렬하게 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하긴, 남부의 전력 따위는 필요 없기는 하지.”
1왕자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측근 기사에게 말했다.
“얼마나 모였지?”
“오늘부로 8만이 넘었습니다.”
측근 기사의 보고에 1왕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북부의 예상 전력은 어느 정도지?”
“상비군을 최대한 끌어모으면 3만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3만 대 8만이라…. 훗, 하하하하하. 바이런 녀석 불쌍하게 되었군. 전력 차이가 두 배 이상이 아닌가?”
1왕자의 호쾌한 웃음에 다른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서 동조했다.
“맞습니다. 지금쯤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하며 통곡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게 다 왕자님의 인덕이 이뤄낸 결과지요. 안 그렇습니까?”
사실 전쟁에서 숫자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긴 하다.
북부군 3만에 비해서 1왕자가 모은 토벌군 8만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평가일 뿐, 속사정은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2왕자를 지지하는 북부군은 국경을 지키던 상비군으로 무장 상태도 좋고 훈련도 잘된 정규 병력이다.
거기에 비해서 1왕자의 토벌군 8만 중에 정규 병력은 중앙군 1만 정도가 고작이다.
거기다 3만은 귀족들의 사병이나 용병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즉, 원래 무기를 쥐고 싸우는 법을 알고 있는 병사들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4만은 뭘까?
그 4만은 지방의 귀족들이 이번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강제 징집한 징집병이다.
전쟁은 고사하고 평소에는 무기도 들어본 적 없는 민초들인 것이다.
국가적인 위기가 아닌 내전에 민초를 징집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지방의 봉토 귀족들은 1왕자에게 내가 이만큼의 병력을 데리고 왔다고 생색을 내고 싶었다.
잘 보여 중앙 진출을 노리겠다는 야심으로 강제 징집을 해 모였던 것이다.
그렇게 무장과 훈련도 되지 않고 거기다 사기까지 최악을 달리는 4만의 징집병이 토벌군의 절반을 차지한다.
거기다 보급도 문제다.
애당초 8만은 너무 많다.
8만에 달하는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지금 그 자금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2왕자를 지지하던 중앙 귀족들이다.
2왕자가 반역자로 선포된 순간 무조건 1왕자에 협조를 할 수밖에 없었다.
1왕자의 아내인 클라우디아는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협박과 회유로 지원하게 했다.
하지만 미봉책일 뿐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승패와 상관없이 8만의 군세를 유지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클라우디아는 사람을 보내 1왕자에게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독촉했다.
그러나 1왕자는 그런 불안 요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머릿속에는 이미 승리했다고 여기고 왕권을 어떻게 구상할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지휘부의 방심.
병력의 질과 보급의 제한에 이어서 이 전쟁의 세 번째 불안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남부 일부 전력이 빠졌다고 해도 이만한 전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1왕자는 군을 진격시켰다.
“전군 돌격하라!!”
“가장 먼저 성벽을 넘는 병사에게는 100골드의 상금을 내릴 것이다.”
지휘관들의 독려에 병사들은 악을 쓰고 성벽을 올라갔다.
전력에서 물량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정면 승부를 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일 수 있다.
다만, 앞장세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징집병이다.
공성은 훈련받은 병사에게도 힘든 전투다.
당연히 징집병들이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반나절 동안 병력을 밀어 넣었지만 성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자 1왕자는 슬슬 짜증이 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걸리는군. 병사가 몇인데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건가?”
“죄송합니다. 적의 반항이 예상보다 완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 걸려. 사기에 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 빨리 끝내게.”
“알겠습니다.”
1왕자가 질책을 하고 나서야 영주들은 아끼고 있던 정규 병력과 기사 전력을 투입했다.
그리고….
“성벽을 넘었다!”
“아군이 올라올 거점을 만들어라!”
마침내 성벽을 넘고 1왕자군의 병력이 성벽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좋아. 이래야지.”
1왕자는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며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안에 이 요새를 정리한다. 그리고 주둔군을 남긴 후에 우리는 이어서 진격하도록 한다.”
1왕자의 말에 참모진의 말석에 있던 남자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전투 후에는 병사들을 조금 쉬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말에 1왕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하군.’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모진의 말석에 있는 젊은 귀족 따위가 자신에게 지적을 했다.
1왕자는 이 사실에 강한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
“자네 이름은 뭔가?”
“란돌 세비안 자작이라고 합니다.”
“그래. 세비안 자작. 자네는 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빨리 끝낼 생각을 해야지. 어째서 나의 말에 토를 다는 건가?”
마치 그런 기본도 모르느냐는 듯이 지적하는 1왕자의 말에 세비안 자작이 대답했다.
“전쟁을 빠르게 끝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이기는 것입니다. 공성전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는 최소 하루에서 이틀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심한 소리를 하는군.”
세비안 자작의 조리 있는 설명이 1왕자의 귀에는 자신에게 따지고 드는 거슬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작 참모진의 말석에 있으면서 주제를 넘는군.”
권력의 고하를 앞세운 1왕자의 압박은 일종의 경고였다.
하지만 세비안 자작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죄송하오나 전하. 참모진의 역할이라는 것은 전쟁에 필요한 의견을….”
“시끄럽다!!”
쾅!
결국 1왕자의 성질이 폭발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세비안 자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전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이 전쟁을 압도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이 나라의 군주로서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려야 한다! 그런데 고작 참모 따위가 말이 지나치구나!”
이쯤 되면 이미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백성의 고통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은 그저 갖다 붙인 말일 뿐.
진심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아야겠다는 오기가 전부였다.
지금 1왕자가 세비안 자작에게 바라는 대답은….
‘제가 어리석어 1왕자 전하의 혜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우둔한 신하를 벌하여 주소서.’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전하, 지금 전하께서는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계십니다.”
“뭐…. 뭐라고?”
분노를 넘어서 기가 막힌다는 1왕자에게 세비안 자작은 거침없이 말했다.
“이 전쟁에 참여해서 피 흘리는 병사들 하나하나가 국가의 백성들인데 이들을 살피지 않으면서 어떻게 백성의 고통을 헤아린다 하십니까? 이는 모순을 넘어 위선입니다.”
“네 이놈!!”
1왕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새파랗게 젊은 말단 귀족 따위가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
그의 기준에 있어서 이건 선을 넘어도 크게 넘은 것이다.
“당장 저놈을 잡아라. 죄목은 왕족 모독과 상관을 향한 항명이다. 마땅히 그 죄를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1왕자의 서슬 퍼런 명령에 기사들이 세비안 자작을 잡았다.
세비안 자작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게 말했다.
“전하, 자고로 충언이란 듣기에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부디 제 의견을 재고해 주십시오.”
“네놈이 끝까지!?”
1왕자는 스스로 허리의 검을 뽑았다.
정식 처벌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자신이 베어 버리겠다는 생각인 듯 했다.
그때 한 노인이 끼어들었다.
“전하, 아직 젊은 친구가 혈기가 넘쳐서 다소 실수를 한 듯합니다. 한 번만 용서의 아량을 보여 주시지요.”
“으음….”
불같이 화를 내던 1왕자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간언을 한 남자는 카를 트라우스 후작이다.
원래 중립파였지만 이번 토벌군에 참여하면서 1왕자의 아래에 들어온 남자다.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지만 수도에서는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며 전략 전술을 강의했고 레스터 왕국 내에서는 전략 전술에 있어서 가장 전문가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1왕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그가 직접 중재를 나서자 살짝 망설였던 것이다.
그리고 트라우스 후작이 거듭 말했다.
“고집이 꽤 강하기는 해도 란돌의 능력은 제 제자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용서의 아량을 보여주어서 그를 품으시면 앞으로 왕자 전하를 위해서 큰 힘이 되어줄 인재입니다.”
“제자? 후작의 제자였던가?”
“예. 말년에 제 모든 것을 물려받을 만한 제자라 생각하며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제자입니다.”
트라우스 후작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1왕자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 후작의 면을 봐서 한 번은 참겠네. 하지만 다음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전하의 은혜에 노신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트라우스 후작은 깊게 머리를 숙였고 세비안 자작은 그런 스승을 보며 마지못해 같이 머리를 숙였다.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