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내전.
결국 왕자들의 정치 싸움이 가장 최악의 결과로 치달은 것이다.
권력 다툼과 거리가 먼 지방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수도에서 치열한 정쟁을 펼치던 귀족들도 설마 사태가 여기까지 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딱 한 명.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포레스트 영지에서 우아하게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결국 제 말이 맞았죠?”
“…당신 혹시 흑마술 같은 거 합니까?”
밀턴은 눈앞에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레이라 공주를 보며 말했다.
원래 레이라 공주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 밀턴은 존댓말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함께 생활을 하면서 레이라 공주가 밀턴에게 반존대를 하도록 허용했다.
명목으로는 자신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기기 위해서 평소에도 말버릇에 유의를 해야 한다, 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레이라 공주는 포레스트 영지에 머물면서 차분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여유롭게 지내고 있는지 밀턴은 그런 그녀를 보고 이렇게 시간만 보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하는 말이….
[이미 씨앗은 모두 뿌렸어요. 지금은 차분하게 때를 기다릴 때죠.]
[마치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는 흑막이 하는 말 같군요.]
[비슷해요.]
그녀의 말을 허세라고 느낀 밀턴은 웃어 버렸다.
그러자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못 믿는 눈치네요.]
[티가 나나 봅니다.]
[몹시요. 어쩔 수 없지. 조금만 서비스를 해 주면…. 앞으로 수도에서 왕권을 잡는 건 1왕자파가 될 거예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고 대략 한 달 안에 판세가 정해질 거예요.]
[설마….]
밀턴은 안 믿었다.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던 두 왕자의 대립 구도가 이렇게 갑자기 무너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기 할래요? 500골드.]
[콜!]
[……?]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기 전에 수도에서 소식이 들어왔다.
1왕자파가 2왕자 파벌의 군사 비리를 들춰내서 2왕자 파벌의 세력이 반 토막 이하로 떨어졌다고 말이다.
[내 말이 맞죠?]
[…도대체 어떻게?]
[이럴 때를 대비해서 예전에 1왕자 파벌에 2왕자 파벌의 약점에 관한 정보를 은근히 흘린 적이 있거든요.]
[…사기?]
[어머? 지고서 두말할 생각인가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한 판 더 할까요? 아마, 내 예상으로는 2왕자는 1왕자에게 항복 선언을 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지지력이 강한 북부로 갈 거예요. 그리고 내전을 일으키겠죠.]
[내전? 말도 안 되는…. 무엇보다 1왕자가 순순히 2왕자가 북부로 가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소?]
[내 말대로 될 거예요. 못 믿으면 또 내기해 볼까요? 이번에는 5,000골드 걸고?]
[좋습니다. 어디 한번 해봅시다.]
밀턴은 자신만만했다.
설마 1왕자가 2왕자를 순순히 북부로 보내줄 정도로 멍청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설마 2왕자가 아무리 그래도 내전을 일으킬 정도로 권력에 눈이 먼 망종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지금 나왔다.
1왕자는 멍청한 놈이었고 2왕자는 권력에 눈이 먼 개망종이었다.
‘빌어먹을….’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밀턴의 앞에서 레이라 공주는 홍차를 마시며 말했다.
“전에 것하고 합쳐서 5,500골드. 돈 벌기 참 쉬워요. 그쵸?”
“…….”
‘이 여자는 아침마다 하루의 시작을 날 어떻게 약 올릴지 생각하며 사나?’
레이라 공주의 약 올림에 밀턴은 뭐라고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모두 옳았기 때문이다.
‘과연 지력 92, 정치 91이라는 수치는 장식이 아니란 걸까?’
생각해 보면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성격은 별개의 얘기지만 말이야.’
어쨌든 밀턴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어머? 공짜로 들으시려구요?”
“우리 영지에 공짜로 머물고… 있는 건 아니군요.”
레이라 공주는 상당한 거액을 투자한 투자자이기도 했다.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뭘 원하십니까?”
“으음…. 일단 외상으로 해 두죠.”
“외상이라고요?”
“예. 백작님에게는 이렇게 빚을 달아두는 편이 나중에 더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
밀턴은 어째 찝찝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더 따지지는 않았다.
일단 레이라 공주의 식견을 들어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단, 왕궁에서는 곧 공식적으로 토벌령이 내려올 겁니다.”
“그렇겠죠.”
거기까지는 밀턴도 예상할 수 있었다.
2왕자는 내전을 일으키면서 명분으로 공화주의를 표방하겠다고 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최악의 패착이었다.
공화주의는 레스터 왕국은 물론이고 이 대륙의 모든 왕국에서 위험한 사상으로 지정된 사상이다.
그걸 명분으로 들고 나온 이상 1왕자는 정식으로 토벌령을 내릴 수 있다.
수도의 중앙군은 물론이고 지방의 봉토 귀족들에게도 토벌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는 밀턴도 예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진 레이라 공주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슨 수를 쓰던 좋으니 그 토벌령에서 백작님은 제외되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백작님의 입김이 닿는 남부 귀족 전체가 몸을 사리는 편이 좋아요.”
그녀의 말에 밀턴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을 거듭한 끝에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어째서 우리가 빠져야 한다는 건가요?”
밀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에서 빠질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애당초, 이 전쟁은 1왕자 편에 붙어야 이길 수 있는 전쟁이다.
2왕자가 공화주의를 끌어들인 순간 1왕자에게는 명분이 생겼다.
자신의 세력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키고 있던 지방의 봉토 귀족들, 거기다 2왕자 편에 있던 귀족들 역시 상당수가 1왕자 편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공화주의라는 사상은 신분 제도로 나라를 운영하는 왕국에 있어서 절대적인 이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밀턴은 굳이 전쟁에서 활약하지 않아도 전쟁에 참가해서 적당히 자리만 지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밀턴이 중앙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것도 아니니 전쟁에 참가해서 1왕자에게 찍히지 않을 정도의 활약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전쟁에 굳이 참가하지 않으면 훗날 1왕자가 제위에 올랐을 때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밀턴은 미운털이 박혀 버린다.
최악의 경우 밀턴 포레스트도 공화주의에 찬동하더라, 하는 식의 모함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쟁에는 참가해야 할 이유밖에 없었다.
그런데 레이라 공주는 전쟁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전쟁에 참가할 것을 말리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2왕자가 왜 갑자기 공화주의를 표방한다고 생각하나요?”
“그거야….”
대답을 하려고 하니 입에서 쉽게 나오는 말이 없었다.
사실 2왕자가 갑자기 공화주의자로 돌아섰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미친놈.’ 이것뿐이었다.
그냥 자포자기한 인간이 발악을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왜 공화주의를?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아!’
한 가지 가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깨달은 모양이군요.”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2왕자가 공화국에서 원조를 얻을 거라는 말입니까?”
“바로 그거죠.”
“미친놈….”
명색의 공주의 앞이지만 밀턴의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욕이 나왔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고 하지만 외세의 힘을 자국 안으로 끌어들이다니?
만에 하나 그런 식으로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제대로 된 권력이 자기 손에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공화국에서 봉사 활동하려고 남의 나라에서 피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전쟁에 참여한 그들은 피의 대가를 요구할 것이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왕국의 백성들이 짊어져야 한다.
“그 개자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랍니까?”
“생각? 내 기억이 맞다면 그런 거 할 줄 모르는 인간이에요.”
“일국의 왕자가 말입니까?”
“만나본 적 없으니 모르죠? 그 인간은 원래 그래요.”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어요. 세상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에요.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만 있다면 거기에 백성들이 흘려야 할 피라던가 국력이 쇠약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거예요.”
“듣고 보니 그냥 개새끼인데요?”
“정확한 평가네요.”
밀턴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레이라 공주님. 당신은 이번 내전을 예상하고 계셨죠?”
“예. 맞아요.”
“그리고 2왕자가 공화주의자들과 결탁할 것도 예상하고 있었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당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 나라가 내전에 휩싸여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흐르는 것을 알면서 묵인, 혹은 조장한 겁니까?”
“…….”
밀턴의 추궁에 레이라 공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 끈질긴 눈빛에 결국 레이라 공주가 말문을 열었다.
“만약 그렇다면요?”
“그렇다면 당신 역시 1왕자나 2왕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순간 레이라 공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밀턴이 한 말은 최대의 모독인 듯했다.
“대답을 해 주십시오. 정직한 대답이 아니라면 나는 당신과 더 이상 한 배에 올라타지 않겠소.”
밀턴의 말에 실린 각오를 느낀 레이라 공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설명해 주시죠?”
“원래 2왕자의 지지 세력인 북부에서 공화주의자들과 결탁한 자들이 있었어요. 그 부분은 내가 손을 쓰지 않았어요.”
“잠깐, 북부의 귀족들은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결탁이라뇨?”
“사실이에요. 그들은 힐데스 공화국과 암거래를 해서 암암리에 부를 축척해 왔어요. 이건 꽤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던 일이에요. 당연히 2왕자도 알고 있었죠.”
“그럼 2왕자 파벌은 그걸 알면서 묵인해 왔다는 겁니까?”
“돈이 되니까요. 암거래를 통해서 얻은 이익은 2왕자 파벌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었어요.”
“과연….”
2왕자의 지지 세력은 대부분이 기사들과 군부였다.
이들은 돈을 잡아먹으면 잡아먹지 따로 생산해 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2왕자 파벌이 재정적으로 1왕자파에게 밀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바로 북부 귀족들이 공화국과 불법 암거래를 하면서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세상에 돈 벌기 제일 쉬운 방법이 나쁜 짓이라고 하더니.’
관세고 뭐고 없이 불법적으로 행해진 국제 무역이니 남는 금액이 꽤 쏠쏠했을 것이다.
“그럼 2왕자는 원래 공화국과 끈이 있었다는 겁니까?”
“맞아요. 난 거기에 사람을 심어서 어느 정도 상황을 살피면서 내 사람들을 심었어요. 여차하면 2왕자의 약점을 잡아서 실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였죠.”
“그렇다면 어째서 내전이 일어난 겁니까? 당신이 사람을 심어서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면….”
“북부에 심어 놓은 내 사람들은 북부의 중추에 있지 않아요. 전체적인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 북부에 내 세력이 강했다면 내전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아요.”
레이라 공주는 잠시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내전을 선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2왕자는 북부의 ‘뜻 있는’ 귀족들에게 숙청당했을 거예요.”
“그 ‘뜻 있는’ 귀족들이 공주님의 수족입니까?”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반 이상이지만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흑막으로서 활동해 왔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