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밀턴은 라파엘 영애가 투자자로서 영지의 시찰을 위해 당분간 머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여자들과 별 접점도 없는 밀턴이 여성을 자기 집에 들였는데 가십이 안 생길 리가 없었다.
“그 얘기 들었니?”
“뭐가 말이야?”
“영주님이 외국에서 오신 아가씨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는 얘기.”
“요즘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니? 한눈에 반해서 벌써 프러포즈도 하셨다고 하던데?”
“어머 어머…. 그럼 소피아 영애는 어떻게 되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 영주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여자관계가 난잡할지도 모르겠어.”
“아직 젊잖아? 우리도 조심해야 해.”
“맞아 맞아.”
밀턴은 자기 집무실 밖에서 청소를 하는 시녀들의 얘기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들린다. 다 들려.’
요즘 들어서 시녀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하는 얘기가 이것이었다.
일부러 레이라 공주가 그렇게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소피아 얘기는 왜 나오는 거야? 그녀는 그냥 내 가신인데.’
보통의 귀족들의 경우 이럴 때 시녀들을 잡아서 족쳐서 본보기를 보인다.
하지만 밀턴은 권력을 앞세워 힘없는 시녀들에게 매질을 할 정도로 막장 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역시 짜증이 났다.
‘차라리 사내놈들이면 굴리기라도 하겠는데 말이야.’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몸이나 풀게 기사단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슬슬 훈련 시간이기도 했다.
업무가 아무리 많아졌다고 해도 밀턴은 검술 수련을 위한 시간만큼은 항상 남겨 두었다.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 영지에 힘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땀이라도 좀 흘리면 나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연무장에 도착한 밀턴은….
“대단하십니다. 정말 이걸 직접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제가 살면서 먹어본 샌드위치 중에서 가장 맛있습니다.”
“호호호…. 과찬이에요. 그냥 가볍게 만들었을 뿐인데요.”
‘이런 망할….’
자신의 기사들과 레이라 공주가 연무장에 모여 앉아서 하하호호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 주군! 오셨습니까?”
“주군, 여기 주모님… 아니 아직 아니지. 리파엘 영애께서 직접 도시락을 싸 오셨습니다.”
해말게 웃으면서 말하는 릭의 모습에서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이 단순한 자식.’
“훈련 시간에 뭐 하는 거지?”
밀턴의 딱딱한 말에 토미가 잠시 쭈뼛하며 말했다.
“그게… 잠시 휴식 중이었는데 리파엘 영애께서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차를 가져 오셨습니다.”
“부끄러운 솜씨라서 창피하답니다.”
“하하하…. 창피하다니요? 이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는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리파엘 영애가 주군께 반하셨다니 주군은 행운아이십니다.”
리파엘, 아니 레이라 공주의 내숭에 릭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칭찬을 했다.
그러면서 밀턴을 보고 엄지를 척 올리는 것이 ‘나 잘했죠?’라고 주장하는 애 같았다.
그런 릭을 보며 밀턴은 생각했다.
‘잘한다. 요물한데 홀리니 좋으냐?’
생각해 보면 레이라 공주에게 있어서 릭을 홀리는 것 정도는 티타임에 홍차 한 잔 마시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릭뿐만이 아니었다.
말만 안 할 뿐이지 레이라 주변의 다른 기사들도 전부 홀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철저하게 리파엘 영애로 밀턴에게 마음이 있는 귀족 영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뜰살뜰하게 주변을 챙겨주고 사근사근하고 순수한 여인으로….
그러나 밀턴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맹수들을 먹이로 길들이는 조련사로 보였다.
‘아주 타고났다니까.’
밀턴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자신의 충성스런 기사들을 저 마수에서 구해야 했다.
“크흠… 리파엘 영애. 훈련 중인 기사들의 연무장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찾아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밀턴은 자신의 충성스런 기사들이 요물한테 세뇌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녀의 연무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예.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그만 제 입장을 모르고….”
그녀는 누가 봐도 불쌍해 보일 정도로 쓸쓸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주변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저는 백작님의 가신인 기사님들과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백작님의 심기를 어지럽힐 줄은 몰랐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 요물이 하는 짓 좀 보소?’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하지만 원래는 왕실 적통의 공주 아닌가?
그런데 남부의 촌구석 기사들한테 이렇게 공들여서 내숭을 떨다니?
‘그렇게까지 해서 내 기사들의 마음을 잡고 싶냐? 어이가 없군. 아무리 그래도 내 기사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주군, 너무하십니다.”
“맞습니다. 리파엘 영애는 그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찾아오셨을 뿐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배려를 해 주셨는데 그렇게 야박하게 나올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런 단순한 새끼들.’
밀턴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기사들은 훨씬 단순했다.
그리고 단순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릭은….
“주군, 레이디에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과하십시오.”
“…….”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반란이라도 일으킬 것 같았다.
동료 기사들과 뜻이 일치했다고 느낀 릭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고 말했다.
“자고로 남자라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주어야 합니다. 주군. 이건 남자 대 남자로서 하는 조언인데 남자가 져 주는 게 이기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릭이 점점 도를 넘자 주변에 기사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 릭이 또 미친 짓 한다.’
‘쟤는 머릿속에 뇌가 있기는 있나?’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말려?’
원래 윗사람에게 개길 때도 다 같이 뭉쳐서 보이면 그렇게 무섭지 않다.
그런데 릭이 점점 폭주를 하니 다른 기사들은 서서히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토미? 존? 왜 그렇게 멀리서….”
그제야 릭은 생각했다.
‘너무 오버했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리파엘 영애도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릭의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릭.”
“예. 주군. 저기 그게….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라는 것을….”
“흐흐흐… 걱정마라. 나는 화나지 않았다.”
“화나지 않았는데 왜 목검을 쥐시는 겁니까?”
“이게 다 널 위해서다.”
“예?”
“세뇌를 풀려면 충격요법이 최고지. 풀릴 때까지 쳐 맞자.”
“어? 잠깐, 주군, 목검에 오러! 오러?!”
“뒤져라!!”
결국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릭에게 터졌다.
포레스트 영지가 나름 평화롭게 흘러가는 동안 레스터 왕국의 수도에서는 치열한 정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던 1왕자파와 2왕자파의 대립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승기를 잡은 것은 다름 아닌 1왕자였다.
그리고 그 단초가 된 것은 샤를롯트 상단의 몰락에 있었다.
샤를롯트 상단이 제3의 세력으로 끼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1왕자파와 2왕자파는 우선 그 부분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것에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지금의 판에 제3자가 올라오는 것을 양쪽 다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파벌은 힘을 합쳐서 샤를롯트 상단을 공격했다.
그 결과 상단주를 체포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샤를롯트 상단 자체는 철저하게 무너트렸다.
그리고 1왕자파는 그 혼란 속에서 자신들이 저질렀던 비리와 문제들 대부분을 샤를롯트 상단 쪽에 뒤집어씌워 버렸다.
나쁜 짓은 빨리 유행한다고 하던가?
2왕자파 역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따라했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2왕자파가 샤를롯트 상단에 떠넘긴 죄 중에는 물가 조작과 군수 물자의 횡령 비리 등이 있었다.
2왕자파의 인물들은 군사에 관련된 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저지른 비리 몇 개를 이번 기회에 깨끗하게 세탁하기 위해서 샤를롯트 상단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1왕자파에서 진작 그 부분에 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1왕자파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부분을 공격했다.
2왕자파의 기사들 중에 몇몇이 군수 물자를 횡령하고 기사직을 매관한 증거를 제출한 것이다.
2왕자파는 처음에는 딱 잘라서 부정했다.
하지만 몇몇 기사들이 양심선언을 하고 나서자 결국 진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1왕자파에서는 비리에 연루된 자들을 샤를롯트 상단과 같은 패라는 식으로 몰아갔다.
이미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가 공화주의자들과 결탁한 국가 반역자로 지목된 상황에서 이건 치명타였다.
서둘러서 수족을 자르지 않으면 몸통인 2왕자 본인에게까지 피해가 끼칠 것 같았다.
결국, 2왕자 파벌은 비리에 연루된 자들을 변호하지도 못했고 1왕자파의 거센 공격을 눈 뜨고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도에 상비 중인 2왕자 파벌의 기사단 세 개가 무너져 버렸다.
2왕자파로서는 치명적인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다음 왕위는 사실상 1왕자로 거의 결정되었다.
현 상황을 누구보다 2왕자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살고 싶다면 이겨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말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하던가?
결국 2왕자는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말았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라.”
부하의 보고를 받은 1왕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1왕자에게 부하가 다시 말했다.
“수도에서 사라진 2왕자가 북부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모아서 거병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 들었다. 그리고 거병의 명분이 뭐라고 했지?”
“2왕자는…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우리 레스터 왕국을 공화국으로 바꾸겠다고 합니다.”
“미친놈. 이런 놈이 내 형제라니? 부끄러울 정도구나.”
1왕자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 1왕자의 곁에서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애당초 이럴 생각이었던 겁니다.”
“바이런 이 개만도 못한 자식… 관용을 보였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사실 2왕자가 수도에서 은밀하게 사라지기 전에 1왕자는 그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2왕자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은 외국으로 망명해서 평생 숨어 살 테니 부디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전했다.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는 2왕자를 보고 1왕자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대적자를 굴복시키고 항복까지 받아냈으니 승리감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는 기분 좋게 으스대며 2왕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 말을 했을 때 1왕자의 아내인 클라우디아는 펄쩍 뛰며 말했다.
[죽여야 합니다. 지금 살려두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미 용서를 했지 않소. 왕위에 오를 몸으로서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지.]
[도대체 2왕자를 살려 두어서 무슨 득이 된단 말입니까? 죽이는 게 수입니다. 지금이라도 추적자를 보내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만, 이건 이미 결정 사항이오. 그대도 내 의지를 존중해 주시오.]
보통 클라우디아의 의견을 잘 따라주는 1왕자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쟁에서 이겼다는 승리감과 곧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왕이 되어야 할 몸인데 계속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숙이면서까지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는 무의식적인 생각도 한몫을 했다.
그렇게 2왕자는 수도에서 사라졌고, 1왕자는 그저 외국 어디론가 망명해서 조용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왕자가 향한 곳은 외국이 아니라 자신의 지지기반이 강한 북부의 영토였다.
북부는 레스터 왕국 안에서 군사력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지방이고 2왕자의 지지기반이 강한 땅이기도 했다.
그런 땅에서 2왕자는 거병을 한 것이다.
심지어 거병의 명분으로 공화주의까지 표방하면서 말이다.
1왕자 입장에서는 체면 한번 살리려고 하다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클라우디아.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결국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1왕자를 보며 클라우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남편이 자존심에 비해서 능력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바꿔 생각하면 그런 인간이기에 여자인 자신에게도 의존도가 높은 남편으로 길들일 수 있었다.
그런 장단점을 모두 계산하고 한 결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못난 남편을 받쳐줘야 할 때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전쟁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전쟁인가?”
“예. 다행이도 2왕자가 내세운 명분은 북부 전체는 물론이고 국제 사회의 공조도 얻지 못할 명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국왕 전하에게 칙서를 받아서 전국에 지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북부 토벌을 시작해야 합니다.”
“과연, 북부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나라 전체를 상대할 만큼 강하지는 않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선 국왕 전하에게 가서 칙서를 받아 오세요. 그것이 당신에게 승리와 정통성을 동시에 가져다 줄 거예요.”
“과연!!”
1왕자는 크게 감탄했다.
“역시 그대는 나의 보물이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내가 예뻐 죽겠다는 듯이 꼭 껴안았다.
‘빨리 행동에 나서기나 할 것이지.’
정작 그 품안에 안겨 있는 아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