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먹힌 건가?’
밀턴은 아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실제 레이라 공주의 입장에서도 밀턴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 세간의 주목을 받아서 이득이 될 일이 없는 레이라 공주로서는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밀턴의 말이 결정타였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제 입을 막으면 공주님의 정체가 어디서 어떻게 샜는지 알 길이 없죠. 그래도 괜찮습니까?”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테일러, 리처드. 둘 다 물러나도록.”
“옛.”
“옛.”
두 기사는 그녀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하듯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당장 위기감이 사라지자 밀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위험했어.’
절벽 사이에 있는 외나무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공주님의 정체를 알고 있죠.”
“그리고?”
“그리고 공주님이 수도에서 1왕자와 2왕자 사이에서 암약하며 줄타기를 했다는 것 정도까지가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입니다.”
사실 뒤에 이어진 말은 정보라기보다는 추론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밀턴이 알고 있는 수도의 정세를 끼워 넣어서 만든 가설이었다.
다만, 레이라 공주로서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놀랍군. 수도에서 한참을 동떨어진 이런 남부 지방에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손에 넣었지?”
“그건 알려 줄 수 없습니다.”
밀턴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 이 테이블의 주도권은 밀턴이 쥐고 있는 것이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백작 우리 거래를 좀 할까요?”
“거래라고요?”
그녀의 말투가 다시 존대로 변했다.
동시에 그녀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자 그녀의 외모 역시 예전에 밀턴이 본 적이 있는 샤를롯트 상단주 시절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상태로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거래를 하죠.”
“…….”
‘진짜 미모 하나는 반칙이네.’
밀턴은 순간 판단력이 살짝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거래고 나발이고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간과 쓸개를 세트로 내줘도 괜찮을 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정신 차려. 여우… 아니 그냥 요물이라고 생각하자.’
밀턴은 새삼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유혹이라는 특성이 생각났다.
유혹 LV.9(MAX) : 타고난 미모로 이성을 유혹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상대방의 판단을 흐트러트릴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샤를롯트 상단 시절 그녀의 스텟을 확인했다면 훨씬 더 빠르게 그녀의 정체를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때는 아직 능력을 다루는 것이 지금처럼 습관화되지도 않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저 미모에 얼이 빠졌던 거지. 망할….’
아마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미모가 훌륭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외모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말투도 사근사근한 존댓말로 바꾼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눈앞에 요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가 말했다.
“제 정체를 밝혀낸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솔직히 인정하죠. 포레스트 백작. 당신은 내가 이제까지 상대했던 사람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칭찬부터 막 하는 것 봐라. 여기서 좋아하면 바보겠지?’
“그런 당신을 인정해서 제의합니다. 우리 서로 가지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죠.”
“정보의 교환? 그게 공주님이 제시한 거래입니까?”
“예. 일단 우리는 서로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요. 서로에 관해서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예. 그렇군요.”
듣기에 따라서는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말을 하는 레이라 공주의 어법에 밀턴은 확신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을 작정하고 홀리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우다. 여우. 아니 구미호야. 달기급 구미호다. 경계하자 경계.’
“그럼 우선 저부터 할까요?”
“그 전에 알려 줄 수 없는 정보는 어떻게 할 겁니까?”
“아…. 그걸 깜빡했군요.”
절대 깜빡한 게 아니라고 밀턴은 확신했다.
아마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면서 밀턴에게 분위기상 강제적인 자백을 요구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대답할 수 없는 건 대답할 수 없다로 해 두죠. 다만, 이 말을 세 번 이상 하면 이 게임에서 패배하는 걸로 하죠.”
“게임? 아까는 거래라고 하지 않았나요?”
“저는 두 가지 모두 즐기는 편이랍니다.”
“…….”
“그러고 보니 패자에는 벌칙이 있어야겠군요. 으음… 패자는 승자의 요구를 뭐든지 한 가지 들어줄 것. 어떤가요?”
“승자의 요구를 들어준다고요?”
“예. 뭐. 든. 지.”
“…….”
‘그렇게 미친 듯이 요염하고 아찔한 미소 지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밀턴은 실제로 심장을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거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벌칙은 없는 걸로 하죠.”
“어머? 겁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레이라 공주의 도발에 밀턴은 담담하게 받아 넘겨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안타까운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없어졌다.
‘그렇게 쉽게 상대 페이스에 휘말릴 수는 없지.’
“게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보의 교환은 받아들이죠.”
“좋아요. 그럼 내가 먼저 질문을 해볼까요?”
냉큼 받아들이는 걸 보아하니 역시 게임 운운한 건 낚시였던 모양이다.
“그러시죠.”
레이라 공주는 밀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짜고짜 핵심에 접근한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실제 그녀의 정체를 아는 건 밀턴밖에 없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걸 정직하게 말하는 건 바보다.
이어서 밀틴이 질문했다.
“공주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응? 그거야 뻔하지 않나요? 왕위가 제 목적입니다.”
“…….”
어째서 그렇게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답을 하자 밀턴은 어째 손해 본 느낌을 받았다.
“내 차례군요. 포레스트 백작의 앞으로의 목표는 뭐죠?”
‘내 목표라….’
꽤 막연한 말이었다.
간단하게 대답한 그녀와 다르게 밀턴의 목표는 뚜렷하지 않다.
처음에는 그저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금수저 라이프나 즐기며 살려 했지만 이리 저리 휘말리다 보니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시대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가는 어디서 뒤통수를 맞고 죽을지 모를 정도로 살벌한 혼돈의 시기다.
그러니 밀턴의 목표는….
“남부를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호오… 남부를 하나로 모아요? 어째서죠?”
“남부를 하나로 모아서 설사 중앙에서 압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충분히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게 지금 밀턴이 가지고 있는 당면 과제였다.
먼 미래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의 밀턴의 방식이었다.
“남부라… 그게 당신의 최종적인 목표라면 나쁘지 않군요. 그렇다면….”
“제 차례입니다.”
밀턴은 레이라 공주의 말을 끊고 질문을 던졌다.
“7년 전. 공주님은 돌아가셨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랬죠.”
“그런 공주님이 어떻게 지금 살아계신 거죠?”
“…….”
밀턴의 이번 질문은 그녀로서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그녀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7년 전에 내가 살아남은 것은 페일런 공작, 당시에는 후작이었던 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없네요.”
그녀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7년 전의 비극이라고 하면 그녀의 친모인 아이린 왕비와 그녀의 친오빠인 그레비언 왕자까지 함께 죽음을 당했던 사건이다.
결국 가족이 죽었던 사건을 자세하게 말하라는 건데 밀턴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가혹했다.
다만 굳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상대방의 약점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어째 약점이 아니라 역린 같은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내 차례군요.”
레이라 공주는 밀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백작이 남부의 패권을 잡는 것에 협조한다면 백작 역시 내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나요?”
“그건, 저한테 공주님의 휘하로 들어오라는 말인가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레이라 공주는 밀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백작에게는 내가 모르는 가시가 좀 많은 듯하군요.”
“그게 제 매력이죠.”
여유 만만한 밀턴의 모습에 레이라 공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목에 가시가 걸리는 건 사양하고 싶군요. 그러니 백작을 내 휘하에 두는 건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라 공주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맹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군요.”
“동맹 말이죠.”
“예. 저는 왕위를 원하고, 백작은 남부를 원합니다. 서로의 먹잇감이 겹치지 않는 이상 이해가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제가 원하는 남부 역시 레스터 왕국의 일부에 들어간다고 봅니다만?”
“딱히 독립해서 건국을 하고자 하는 생각은 아닐 텐데요? 그저 남부를 하나로 모아서 그 중심을 잡고 싶은 것 아닌가요?”
“그건 그렇습니다.”
“변경백의 지위를 약속하죠. 작위도 자연스럽게 최소 후작위로 올라갈 겁니다. 어떤가요?”
“변경백이라….”
‘나쁘지 않아.’
밀턴은 머릿속으로 그녀가 제시한 조건을 머릿속으로 꼼꼼하게 따져봤다.
원래 변경백이라는 것은 타국과 영토가 맞닿은 봉토 영주에게 내리는 직위였다.
봉토 귀족들은 자기 영지에서 치안 유지를 위한 법령 집행과 징세의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영주들은 거기에 더해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 귀족들을 위해서 군사적 자치권을 허락한 귀족을 흔히 변경백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행정적 권리에 군사적 자치권이 더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사실상 그 땅의 전권을 위임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변경백의 칭호를 받은 자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사병 육성의 제한조차 없는 그들은 주변 영지를 자연스럽게 아우르며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런 시대적 흐름을 거쳐서 언제부터인가 변경백은 행정적인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칭호가 아니라 봉토 귀족으로서 도달하는 가장 정점의 칭호로 인정받게 되었고, 암묵적으로 변경백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최소 후작위 이상의 귀족으로 한정되었다.
이제까지 레스터 왕국의 남부에 그런 칭호를 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라 공주는 밀턴에게 그런 변경백의 칭호를 보장한 것이다.
“괜찮군요.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밀턴은 레이라 공주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죠?”
“지금 공주님은 샤를롯트 상단이 무너지고 도피자일 뿐입니다. 그런 공주님이 변경백의 자리를 약속해봐야 과연 믿음이 갈까요?”
“진정으로 내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레이라 공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밀턴에게 내밀었던 10만 골드짜리 어음을 가리켰다.
“10만 골드는 큰돈이죠. 이 정도 돈이면 힘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왕위를 노리기에는 부족하다 이거죠?”
“맞습니다.”
밀턴의 지적에 레이라 공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에게 숨겨진 힘이 있다고 말로 해 봐야 믿지 않으시겠죠?”
“믿겠다고 하면 말해 주실 겁니까?”
“훗, 설마요. 백작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힘을 다 모른다는 증거 아닌가요?”
“…….”
그녀의 예리한 질문에 밀턴은 그저 쓰게 웃었다.
‘너무 티 냈나?’
“어쩔 수 없죠. 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니…. 그때까지는 백작의 영지에서 신세를 좀 지도록 하죠.”
“제 영지에 머문단 말입니까?”
“예.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당연히 문제가 있죠. 어느 날 갑자기 타국의 귀족이 우리 영지에 찾아와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주변에서 수상하게 볼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적당한 이유를 대면 될 일이죠.”
레이라 공주의 말에 밀턴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참 궁금하군요. 타국의 귀족 영애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 영지에 머문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합당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꼭 알고 싶군요.”
밀턴의 말에 레이라 공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야 쉬운 일이죠.”
그리고 레이라 공주는 자신이 포레스트 영지에 합당하게 머물 수 있는 완벽한 핑계를 설명했다.
“백작님이 저한테 한눈에 반해서 약혼 신청을 한 것으로 하면 되죠.”
“…뭐라고요?”
당황한 밀턴에게 레이라 공주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너무 아름다워서 백작님이 한눈에 반해서 부디 영지에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라고 주변을 설득하면 되지 않나요?”
“진심입니까?”
밀턴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무슨 이렇게 뻔뻔한 여자가 다 있지? 아니, 예쁜 건 팩트지만 그래도 내가 왜?’
레이라 공주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밀턴에게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면 이것보다 더 좋은 대안이라도?”
“차라리 투자자로서 영지를 시찰하는 것으로 하시죠?”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럴 겁니다.”
밀턴은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그때 레이라 공주가 서서히 일어나서 밀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붉은 입술을 귓가에 가져가서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그녀는 어미에 은은한 여운을 남겼다가 말했다.
“사람들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까요? 혼인 적령기의 미혼 남녀 둘이 한집에 살고 있는데?”
“…….”
밀턴은 한마디 대꾸도 못 했다.
가십거리로는 딱이지 않은가?
그런 밀턴을 보며 레이라 공주는 쿡 하고 웃었다.
그리고 밀턴을 향해서 귀엽다는 듯이 말했다.
“한동안 잘 부탁해요.”
“큭….”
그렇게 해서 한동안 포레스트 영지에는 요물이 머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