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전하, 제가 2왕자와 회담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한번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심이 어떠신지요?”
그녀의 말에 1왕자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만약 이 말을 꺼낸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검을 뽑았을 것이다.
“무슨 말이요? 나보고 바이런 그놈하고 대화를 나눠 보라는 거요?”
“예. 그렇습니다. 전하.”
“이 와중에 내가 그놈하고 대화를 나눠서 뭘 얻겠다고 그런단 말이오? 쓸데없는 짓이오.”
1왕자의 말에 클라우디아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전하, 트로이안 백작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오. 그는 틀림없이….”
“예. 2왕자 일파 중에 가장 먼저 암살당한 남자이지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오?”
“우리는 한 번도 트로이안 백작을 암살하기 위해서 손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그거야 내 밑에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 아니겠소?”
트로이안 백작.
그는 2왕자 파벌에서 가장 먼저 암살을 당한 인물이고,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1왕자파와 2왕자파는 서로 서로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전하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과잉 충성을 해서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조금 조사를 해보니 이상한 구석이 있더군요.”
“이상한 구석이라고?”
“그는 어느 날 아침에 자신의 침실에서 심장에 단검을 박힌 채로 발견되었죠. 마치 누가 봐도 암살당한 것처럼 말이죠.”
“그랬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요?”
“정치적 공작으로 암살자를 동원할 때 흔히 하는 당부가 있죠. 되도록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꾸며라, 라는 말.”
“아아… 과연 그렇군.”
암살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성과는 암살 행위 자체를 숨기는 것이다.
독을 써서 자연사처럼 꾸미거나 말이나 마차에 수작을 부려서 사고사처럼 꾸미는 것이 그렇다.
노골적으로 무기를 써서 살해당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책이었다.
그런데 트로이안 백작은 그 하책에 살해당했다.
마치 누가 봐도 암살자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대놓고 말이다.
클라우디아도 처음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사건 이후 양쪽 진형의 피해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쪽의 세력이 피해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암살 행위가 계속되었다.
의구심을 느낀 클라우디아는 자세하게 상황을 살펴봤다.
그리고 암살당한 자들 중에 몇몇은 자신들이 의뢰하지 않았음에도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주로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거나 국가의 재정을 몰래 횡령하는 이들이었는데, 의뢰를 넣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위화감이 든 클라우디아는 즉시 2왕자파에 넣어놓은 첩자를 시켜서 그쪽의 정황을 알아봤다.
그리고 그쪽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 싸움에 누군가 제3자가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그런 클라우디아의 말을 듣고 1왕자는 잔뜩 화가 나서 말했다.
“누가 판에 끼어들었다고? 설마 밑에 두 녀석이?”
1왕자는 바로 밑에 있는 3왕자나 4왕자를 의심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쪽을 제일 처음 의심해 보기는 했는데 아니었어요. 그 둘은 완전히 왕권에서 멀어졌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걸 찾아내기 위해서 2왕자와 만나서 한 가지 거래를 했으면 해요.”
클라우디아의 말에 1왕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이런 그놈과 거래를 해야 한다라… 마음에 들지 않는군.”
클라우디아의 조언이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라고 해도 자신의 정적인 2왕자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 자체가 내키지 않는 1왕자였다.
그런 남편에게 클라우디아가 부드럽게 손을 잡으면서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잖아요? 마지막에 승자가 되는 게 중요해요.”
“으음….”
자존심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1왕자에게 클라우디아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여보, 나를 믿어주세요. 반드시 당신의 머리 위에서 왕의 관이 빛나는 날이 올 거예요.”
“쯧, 알았어. 정말이지 당신한테는 못 당하겠군.”
클라우디아의 거듭된 간청에 1왕자는 결국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것은 없는 검소한 집무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서류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주군, 긴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찾아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1왕자와 2왕자가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보고를 받은 여성은 서류에서 눈을 때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둘이 만났다고? 이유가 뭐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클라우디아 바이런이 동석했다고 합니다.”
“그 암여우가?”
보고를 받은 여성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너무 욕심을 부렸나? 어쩌면 눈치를 챈 건지도 모르겠군.”
클라우디아라는 여자가 얼마나 예리한지는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눈앞의 남자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암살자들과의 연결 고리를 모두 끊어라.”
“저 그게….”
“뭔가?”
“우리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바이런 후작가에서 사병을 동원해서 우리와 거래를 했던 암살자 지부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먼저 손을 쓰고 두 왕자를 만나게 한 건가? 여전히 이런 일에는 손이 빠르군.”
권위주의에 가득 차서 오만한 1왕자가 다음 왕위에 가장 유력한 후보로 오른 것은 사실 그의 뒤에 붙어 있는 클라우디아의 존재가 컸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은 물론이고 이때다 싶으면 칼같이 상대를 공격하는 과감성까지….
클라우디아가 작정하고 손을 썼다면 진짜 위험했다.
‘아마도 이쪽이 자신의 진형의 움직임을 정찰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이렇게 빠른 행동을 한 거겠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상대가 다음으로 할 행동은 뭘까?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했을 때.
쾅쾅쾅!
밖에서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왕실 직속 은사자 기사단이다!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는 즉시 나와라!”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소란을 피우는 이들은 지금 이 안에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
지금 이 집무실 안에 있는 여성은 레스터 왕국의 거상으로 이름난 샤를롯트 상단의 주인 샤를롯트다.
최근 1왕자파와 2왕자파 사이에서 벌어진 암살전을 부추기고 은밀하게 한 손을 거든 것도 모두 그녀가 한 일이었다.
아마 적들은 거기까지 모두 알고 급습을 한 것이리라.
“상단주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비켜라! 그건 내부를 조사해 보면 알 일이다.”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갑자기 조사를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비키지 않으면 공무 집행 방해죄로 베겠다!”
밖에서의 소란이 집무실의 안까지 들린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샤를롯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왜 이렇게 빠르게 적의 습격이 이어졌는지를 생각했다.
‘꼬리가 밟혔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빨라. 중간에 건너뛰고 나에게 바로 도달했다면….’
그녀는 눈앞에 있는 부하를 보며 말했다.
“미행을 당했군.”
“죄…. 죄송합니다. 주군.”
‘내 실수군. 일의 중요성 때문에 보고를 직접 받기를 고집했어. 그래서 연결 고리를 만들고 말았어.’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차분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도 몇 번이고 겪었다.
이런 순간을 대비한 준비도 이미 갖춰 놓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의 한쪽으로 가서 커다란 거울의 앞에 섰다.
“그 암여우한테 완전히 당했어. 당분간은 수도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군.”
그녀가 거울 한쪽의 장식을 내리자 거울이 한쪽으로 밀리면서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만들어둔 한 수였다.
그녀는 그 통로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찾아온 부하를 지그시 바라봤다.
“주군,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는 샤를롯트를 따라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서 남자를 제지했다.
“넬슨, 너하고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예? 주군. 그게 무슨….”
“암여우한테 가서 전해라.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녀의 그 말에 부하는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주군. 그게 무슨….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정말 주군에게 충성을….”
“가족이 인질로 잡혔겠지.”
샤를롯트의 말에 부하는 한순간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
“나를 완전히 배신했다면 기사들을 대동하고 왔겠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꼬리를 달고 오는 것 정도로 그쳤겠지. 무르기는….”
“주군….”
부하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부하를 보고 샤를롯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 가족이 인질로 잡히면 대부분의 사람은 굴복하게 되어 있지. 그 암여우가 즐겨 쓰는 수법이야.”
“주군…. 저는…. 저는….”
“너를 탓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인연은 여기까지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갈라졌으니 내 뒤를 따라온다면….”
샤를롯트는 싸늘한 얼굴을 하고 부하였던 남자에게 말했다.
“그때는 죽이겠다.”
“…….”
진심이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를 주군으로 모셔온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입으로 내뱉은 말은 대부분 행동으로 이어지는 말이다.
“그동안 수고했다. 잘 있어라.”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샤를롯트는 비밀 통로를 통해서 사라졌다.
어느새 그 방에 남은 것은 망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뿐이었다.
샤를롯트 상단이 공화국의 앞잡이였다.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가 왕국의 주요 인사를 암살했다.
샤를롯트 상단에서 고의적으로 물가를 조작했다.
샤를롯트 상단에서….
“끝이 없군. 이번 기회에 다 뒤집어씌우겠다는 건가? 조금만 더 하면 천재지변도 내 탓이라고 하겠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스터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대악당으로 지명한 샤를롯트.
세상에서는 그녀가 어둠에 숨어서 은밀한 도피 행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햇살이 잘 드는 정원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자신의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 있고, 왕국의 모든 병사들이 그녀를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안전하다.
아마, 이 레스터 왕국의 안에서 지금 그녀가 있는 곳만큼 안전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가 바로 션 페일런 공작의 저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션 페일런 당사자는 지금 샤를롯트의 앞에서 담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근위병이나 로열 기사단이 수도 전체를 쥐 잡듯이 뒤진다고 해도 여기에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다.
그 누가 감히 왕국에 유일한 마스터이자 하나뿐인 공작인 션 페일런의 저택을 수색한단 말인가?
페일런 공작은 현 국왕이 직접 기사단을 끌고 찾아온다고 해도 양보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 페일런 공작이 샤를롯트에게 말했다.
“주군은 아쉽지 않으십니까?”
“뭐가 말이죠?”
“샤를롯트 상단은 공주님이 꽤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온 곳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상단의 재산 80퍼센트는 국외에 다른 신분으로 남겨 두었어요.”
“그래도 신분 자체도 아쉽지 않으십니까? 거의 7년 가까이 샤를롯트라는 이름으로 살아오셨지 않습니까?”
“거짓된 신분일 뿐이죠.”
담담하게 말하는 샤를롯트를 보며 페일런 공작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강하다.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이상적인 군주야. 하지만… 이래도 괜찮은 건가? 이분은 아직 17세의 여인일 뿐인데.’
페일런 공작은 어린 시절의 샤를롯트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지금도 페일런 공작의 기억 속에는 그 행복 속에서 천진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어린 소녀가 선명했다.
그 천진한 소녀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철혈의 군주가 되었다.
고난과 역경, 무엇보다 복수심과 집념에 담금질된 결과였다.
페일런 공작으로서는 그게 안타까웠다.
그런 페일런 공작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샤를롯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사람은 성장을 하면 변하기 마련이에요.”
자신의 마음이 들켰음을 안 페일런 공작은 뜨끔하며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레이….”
“그 이름은 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주군.”
“알면 됐어요.”
그리고 샤를롯트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 암여우가 작정을 하고 손을 쓴다면 당분간 수도에서 움직이는 건 무리일 거예요. 저는 지방으로 내려가서 몸을 피하고 있겠습니다.”
“제가 보필하고 싶습니다만…. 역시 안 되겠지요?”
“당신이 움직이면 너무 눈에 뜨입니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페일런 공작을 보고 샤를롯트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자기 호신을 위한 방편 서너 개 정도는 준비해 두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방 어디에 몸을 숨기실 생각이십니까?”
페일런 공작의 질문에 샤를롯트는 한쪽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남쪽으로 가 볼까 싶네요. 겸사겸사 미뤄둔 일도 처리하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