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필리노버 남작은 오해를 했다.
밀턴이 자신의 딸을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다면 좀 이상하다.
만약 밀턴이 자기 딸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냥 정식으로 혼담을 넣으면 된다.
어째서 건축가로 고용하겠다는 등의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머리를 데굴데굴 굴린 필리노버 남작은 또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했다.
‘백작은 내 딸을 좋아하지만 내 딸이 백작을 싫어하는구나. 하긴 이제까지 모든 혼담을 거절했던 아이니.’
사실 이제까지 소피아에게 혼담이 들어온 적은 꽤 있었다.
그녀의 가문은 남작이었지만 미모 자체가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도 특출 난 편이었기 때문에 수도에서는 혼담이 열 건도 넘게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학에 매료된 소피아는 혼담이라고 하면 질색을 했고 모두 거절했었다.
그런 딸을 보며 속이 썩었던 필리노버 남작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과연 내 딸을 곁에 두고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서 마음을 열겠다는 거군. 워낙 건축에 정신이 팔린 아이니 포레스트 백작의 제의를 거절하지는 못할 테고 말이야. 훗, 제법이군.’
자신의 딸을 유혹하기 위해서 이렇게 공들여 작전을 짠다고 생각하자 필리노버 남작은 눈앞에 사위-이미 그렇게 정했다-가 기특하게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포레스트 백작에게 내 딸을 맡기도록 하지요.”
“정말입니까?”
“예. 비록 (아내로서) 부족한 아이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여서 잘 다독여 주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녀에게 (건축가로서)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한테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오…. 못난 여식을 (아내로서) 그렇게 높게 평가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그럼 허락해 주셨으니 앞으로 그녀의 인생은 제가 (주군으로서)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백작님 같이 책임감 넘치는 (남편) 분을 섬기게 되었으니 제 딸도 행복할 것입니다.”
대화의 핀트가 결정적으로 좀 어긋나 있었지만 분위기 자체는 훈훈했다
그렇게 해서 밀턴은 휘하에 소피아 필리노버라는 인재를 영입하게 되었다.
밀턴이 가신으로 받아들이자 소피아는 마치 새장에서 해방된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기 능력을 마음껏 펼쳤다.
“항구에 상업 지구를 붙여서 짓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상업의 발달은 한 곳에 집중되어야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니 포레스트 영지의 본성에 상업 지구를 집중시키죠. 대신 항구에는 물류의 적재와 보관을 위한 창고만을 짓도록 합니다. 그리고 도시의 규모가 더 커지기 전에 상하수도의 기반 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따른 예산 배정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랩퍼야? 쇼 미더 XX도 아니고 뭐야?’
보고서를 좔좔 읽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숨은 쉬는지 걱정될 정도였다.
어차피 이렇게 길고 긴 보고의 끝에 그녀가 하는 말은 항상 똑같았다.
“…그러니 필요한 예산은 대략 이 정도가 되겠습니다.”
공사하게 돈 주세요.
결국 이게 핵심인 것이었다.
“꽤 많군.”
밀턴이 예산안을 보고 중얼거리자 소피아는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원래 토목 사업이라는 것은 돈이 들어가는 법이니까요. 특히 지금처럼 일거리가 많은 시기에는 더욱더 그렇죠.”
소피아가 제시한 금액은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좋아. 결재하지.”
밀턴은 시원스럽게 예산을 허락했다.
지금 포레스트 영지의 재정 상황은 몹시 풍족했다.
돈을 쌓아두기만 해서는 영지의 경제가 순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토목 사업으로 돈을 지출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영지의 발전과 경제의 순환을 동시에 이룰 수 있으니 다소의 거금이라도 시원시원하게 수락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예산을 허락 받은 소피아는 마치 가지고 싶던 선물을 받은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밀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
“어…. 왜 그러시죠?”
“아니, 아무것도….”
밀턴은 그저 얼버무렸고, 소피아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밖으로 나가고 난 후에야 밀턴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웃을 때 예쁘단 말이야.”
둘 사이에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듯했다.
포레스트 영지가 발전하는 동안에도 외부의 정세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우선 위기에 몰렸던 스트라부스 왕국이 국토를 침범한 공화국군을 도로 밀어냈다.
반격의 서막을 올린 것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중앙군이었다.
군사 강국인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사력은 역시 대단했다.
힐데스 공화국에 대군을 원정 보내고, 북부 전선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10만의 병력을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10만 병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었다.
우선 왕실에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로열 기사단과 근위병은 물론이고 왕궁의 병사들을 대거 차출했다.
그러자 귀족들 역시 자신의 사병과 기사단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10만의 병력을 만들어 내기에는 무리였다.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바로 스트라부스 왕국의 국민들이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오랜 역사와 저력이 있는 나라다.
대륙에서는 스트라부스 왕국을 앤드루스 제국 다음 가는 강국이라고 평가하지만 실제 스트라부스 왕국의 사람들은 군사력만 놓고 보면 우리가 제국보다 더 강하다, 같은 생각을 할 정도로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국민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군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공화국 개새끼들이 감히 어디서….”
“박살을 내 주겠어.”
“당장 군에 입대하자!”
국가의 위기에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피에 불이 붙었다.
젊은 남자는 무기를 들고 여자나 노인같이 군에 지원할 수 없는 이들은 모금을 해서 군비를 지원했다.
[우리는 스트라부스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힘이 모두 모여서 순식간에 10만이라는 대군이 만들어 졌다.
솔직히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뇌부로서도 이런 국민들의 모습은 의외였다.
국민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일어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한 애국심과 자긍심.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제까지 스트라부스 왕국이 국민들에게 폭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저지를 수가 없었다.
스트라부스 왕국과 대치하고 있는 공화국의 주요 수단 중에 하나가 적국의 내부에 민중을 봉기시켜서 내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핍박 받는 민중이여, 압제자의 억압에 저항하라.]
이런 말을 하면서 민중을 부추겼다.
그러니 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은 최대한 민중을 다독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민들도 애국심을 가지게 되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뇌부로서는 예상 밖의 결과였다.
그리고 국민들의 뜨거운 애국심에 감동 받은 국왕은 큰 결정을 내렸다.
왕실이 가장 아끼던 최고의 전력 세 명을 동원한 것이다.
라이언 카텔 공작, 데릭 브란스 공작, 맥카시 오브라이언 공작.
스트라부스 왕국이 자랑하는 세 명의 마스터였다.
이들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사실 마스터는 어지간하면 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전쟁이다.
마스터 한 명의 죽음은 그냥 강자의 죽음을 넘어서 국력에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여러 나라는 마스터를 데리고 있어도 전쟁에 쉽게 동원하지는 않았다.
그런 마스터 세 명이 동시에 전쟁터에 동원되었다.
국민들의 뜨거운 애국심에 감동한 스트라부스 왕국의 국왕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스터가 전쟁에서 어떤 위력을 내는지 직접 보여 주었다.
한 달.
스트라부스 왕국이 반격을 시작하고 영토를 원래대로 수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마스터가 작정을 하고 나서면 병사는 허수아비였고 기사는 그냥 걸리적거리는 깡통일 뿐이었다.
그런 괴물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뭉쳐서 위력을 발휘했다.
공화국에도 마스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범하게 마스터를 동원한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전쟁터에서 마스터끼리 부딪혔을 때 자신들이 패배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공화국은 그동안 스트라부스 왕국의 점령지에서 최대한 물자를 약탈하며 신속하게 후퇴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은 침략 이전의 영토를 되찾았다.
비록 자국의 피해가 엄청났지만 국난을 자력으로 극복한 것이다.
남부의 다른 왕국들은 스트라부스 왕국이 무너지면 자신들의 차례가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건 기우였던 것이다.
다만, 이번 전쟁으로 스트라부스 왕국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국토가 유린당했고 인명적인 피해도 무척 컸다.
이제까지 공화국의 존재를 멀리 떨어진 위협으로만 인지하고 있었던 다른 나라들도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로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방패를 보다 튼튼하게 만들어야 자신들도 안전하다고 생각한 남부의 국가들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재건을 위한 물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비록 스트라부스 왕국처럼 대단한 방패는 아니었지만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부의 국가는 하나가 더 있다.
비록 국력이 스트라부스 왕국에 비해서 떨어지긴 하지만 레스터 왕국 역시 힐데스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부의 국가였다.
국제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동안 레스터 왕국의 정국 역시 혼란의 극치를 달렸다.
1왕자파와 2왕자파의 세력 다툼이 극에 달했다.
정치적으로 모략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 수도의 저택 사이에는 암살자가 오가고 있었다.
권력 투쟁도 막바지에 들어간 이상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편을 끝장내려는 것이다.
두 왕자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상대에게 관용이나 용서를 바랄 수는 없다.
승리해서 왕좌를 차지하던가, 아니면 패배하고 관에 들어가던가.
둘 중에 하나뿐인 것이다.
국제 정세가 어떻든 간에 두 왕자에게는 일단 살아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중요했다.
콰앙!
“릭스 백작이 죽었다고? 이런 빌어먹을!”
1왕자 스카이트는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요즘 들어서 서로 간에 암살자가 동원되면서 자신의 세력에도 많은 피해가 생기고 있었다.
릭스 백작은 국정에 영향력이 있는 요직에 있는 귀족으로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 주던 신하였다.
그의 죽음이 가져올 피해를 생각하니 머리가 부글부글 끓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당장….”
“전하, 조금 참으시죠.”
분노한 1왕자에게 말을 건 사람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클라우디아.”
잔뜩 화가 나 있던 1왕자였지만 그녀를 본 순간 얼굴에 분노가 사그라졌다.
그녀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바모스.
바모스 후작가의 영애인 동시에 1왕자의 아내이며 든든한 조력자다.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1왕자를 돕는 건 물론이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계획 하나하나가 1왕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원래 3왕자였던 그를 1왕자로 만들어준 것도 반 이상은 그녀가 물밑으로 손을 쓴 결과였다.
머리가 좋고 야심이 있고 배짱도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두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였다.
바모스 후작은 그녀가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여자로서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고, 스카이트 왕자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런 그녀가 1왕자에게 뜬금없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