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어린 시절 소피아 필리노버는 꽤 특이한 소녀였다.
보통 여자아이들이 어릴 때 좋아하는 것은 예쁘고 귀여운 것들이다.
봉제 인형, 귀여운 찻잔, 반짝이는 장신구 등등….
그녀도 그걸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좋아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신전의 첨탑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도시의 전경이었다.
“우와아….”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부터 그녀는 감탄했다.
오밀조밀한 건축물이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있고, 그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로망.
무엇보다 인형의 집과 달리 이건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었다.
소피아는 어릴 때 그걸 처음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광경에 매료된 소피아는 점점 파고들어 갔다.
처음에는 수도의 탄생 배경에 관한 역사부터였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레스터 왕국의 왕도 로렌시아가 탄생했는지 공부했다.
그때 그녀의 부모는 어린애가 조숙한 공부를 한다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그녀의 지식 욕구는 점점 더 강렬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역사를 배우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수도의 구조를 파고들고 도시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공부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집.
집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건축 방식.
그리고 그 집들이 모여서 만드는 인간의 도시.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도로망과 그 도로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세하게 쌓여 있는 지식을 점점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다른 귀족 영애들이 보석이나 드레스에 열광할 때 그녀는 토목건축에 대한 지식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다.
자고로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광적으로 지식의 습득에 집중한 그녀는 어느새 지식 면에서는 현장에서 수십 년을 구른 건축가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습득이 극에 달하자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실제로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특이한 취향의 소녀가 그 특이한 취미를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착해서 파고든 결과였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여자, 심지어 귀족가의 영애라는 것이었다.
건축에 종사하는 자들은 99퍼센트가 평민이다.
레스터 왕국의 왕도 로렌시아의 구조를 설계해서 공적을 인정받은 전설의 건축가 넬슨 역시 원래는 평민이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서 귀족 작위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도 남작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단승 작위로 말이다.
건축이라는 것은 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평민들이 해야 할 일로 인식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걸 귀족이?
심지어 귀족 영애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하고 싶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에게 뜻을 밝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필리노버 남작은 화를 불같이 냈다.
딸의 취미가 특이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비정상적인 성장의 결과를 가져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날 필리노버 남작의 손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건축 관련 서책과 그녀가 그려왔던 도면 등이 모두 불태워 졌다.
그녀가 울며 애원했지만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서책도 아까웠지만 특히 도면.
그녀가 하루하루 즐거운 상상을 하며 그렸던 그 도면들은 소피아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언젠가 이 도면의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 불태워진 것이다.
그녀는 소중한 인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필리노버 남작은 그런 딸을 보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소피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필리노버 남작은 모르겠지만 그의 딸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성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 몰래 숨어서 외출을 하며 토목 공사 현장을 둘러보기도 하고, 또 몰래 도면을 그리기도 했다.
그게 아버지에게 들킬 때마다 경을 칠 듯이 혼이 났지만 그래도 그녀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건축가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한계였다.
그러던 어느날.
필리노버 남작 가문에 일이 생겼다.
그녀의 아버지인 필리노버 남작이 중앙 행정청에서 징계를 받고 파직을 당했다.
사실 필리노버 남작이 뭔가 잘못했다기보다는 그가 상관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벌을 받은 것이다.
필리노버 남작은 행정청에서 파직당한 이상 수도에 더 머물러도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산을 정리하고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소피아에게 있어서 그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남부에 가기 싫었다.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연회에 참석 못 하거나 비싼 드레스를 살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왕도 로렌시아가 좋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이 넘도록 보존되어 온 건축물과 잘 정돈되고 관리되고 있는 도로망.
새로운 건축법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적용되는 것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부라니?
왕도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남부 지역이란 가도 가도 보리밭과 밀밭밖에 없는 곳이었다.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인 아버지가 한 결정을 그녀가 뒤집을 수는 없었고, 결국 그녀는 남부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이제 인생의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던 수도의 건축 양식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삶의 기력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것 같았다.
이제 만사 포기하고 그냥 얌전하게 아버지가 정해주는 혼처에 시집을 가서 자수나 뜨고 홍차나 마시면서 남은 인생을 보낼 걸 생각하니 한숨만 늘었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서 반강제로 포레스트 영지에 찾아온 것이다.
수도에 있을 때도 연회를 썩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는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포레스트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는 말이다.
포레스트 영지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포레스트 영지가 수도만큼 발전하고 매력적인 건축물로 가득한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녀를 매료시키는 것은 이제 막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광경을 보는 듯한 두근거림이었다.
왕로 로렌시아는 이미 완성된 도시였다.
건축물 하나하나에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그런 도시였다.
하지만 포레스트 영지는 다르다.
여기는 이제 막 새롭게 태어나려고 하는 신천지였다.
밑그림이 대강 그려져 있을 뿐인데 잘만 손대면 역사에 남을 명작이 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드레스를 사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녀는 포레스트 영지를 구석구석 살폈다.
‘항구를 그냥 규모만 넓게 키우면 안 되는데….’
‘상하수도 시설을 지금 잡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 텐데….’
‘어째서 중앙 도로를 만들면서 광장을 만들 생각을 안 한 거야.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소피아는 애가 달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그녀는 어느새 틀어박혀서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자신이 생각한 포레스트 영지의 관계 시설을 도면으로 만들었다.
다행이 그녀의 아버지는 연회에서 여러 귀족들과 만나서 로비를 하기 위해 바빴고 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역작이 탄생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잘 나왔다고 생각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걸 완성하고 나니 그녀를 찾아온 것은 절망감이었다.
‘도면으로 만들면 뭐 해? 실제로 만들 수 없다면 소용없잖아?’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든 포레스트 백작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인 자신이 만든 작품을 과연 포레스트 백작이 제대로 봐 줄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만나지?
지금 남부의 실세로 떠오르고 있는 포레스트 백작을 몰락 귀족의 영애인 자신이 어떻게?
고민이 꼬리를 물고 물었다.
결국 근성이 좋은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결정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
포레스트 백작에게 비웃음을 살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때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포레스트 백작의 저택으로 찾아와서 만남을 청했고, 한 번 거절을 당하자 도면이라도 좋으니 그냥 밀어 넣어 본 것이다.
그 결과….
“제가 지금 이렇게 백작님의 앞에 있는 것이랍니다.”
소피아의 설명을 모두들은 밀턴이 가장 먼저 말한 감상은 한마디였다.
“강단이 좋군요.”
밀턴의 말에 소피아의 얼굴이 화끈거리며 붉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에게 행운인 점이라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밀턴이 그런 그녀의 근성을 몹시 높게 사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소피아는 생각지 못한 칭찬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로서는 밀턴의 이런 말은 생각도 못했었다.
이 세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소피아는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귀족 영애가 건축에 이렇게까지 매료되어서 파격적인 행동을 거듭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있는 밀턴은 이 세상에서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중증의 건축 덕후라는 거군. 별로 나쁠 것도 없지.’
원래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취미에 매료되어서 인생의 일부분으로 취급할 정도로 집착적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이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건축이라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이리라.
여자, 그것도 귀족 영애가 건축학 같이 마이너 학문에 빠지는 것은 확실히 특이한 일이다.
하지만 밀턴은 특이한 것과 나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다.
“소피아 영애. 나한테 이 도면을 보여주며 바라는 것이 있었을 거요.”
“…예.”
모기가 기어들어 가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답했다.
“그게 뭔지 당신의 입으로 말해 주시오.”
밀턴의 말에 소피아는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쥐어짜서 말했다.
“저… 저를 이 영지의 건축가로 고용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밀턴은 즉시 대답했다.
“알겠소. 그렇게 하지.”
밀턴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 소피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백… 백작님. 정말인가요? 정말로….”
그녀는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기뻤다.
그런 소피아에게 밀턴이 말했다.
“물론, 당신의 능력은 이미 나눈 대화만으로 충분하오. 당신 정도의 인재라면 내가 오히려 초빙하고 싶을 정도요.”
“감… 감사합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피아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충성 수치는 무려 90으로 상승했다.
“앞으로 제 남은 평생을 백작님을 위해서 쓰겠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준 것에 감동한 소피아는 밀턴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대륙 최초의 여성 건축가로 이름을 남기게 된 소피아 필리노버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밀턴이 소피아의 영입을 결정했지만 한 가지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그건 그녀가 필리노버 남작의 보호 아래에 있는 영애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탐나는 인재라고 해도 남의 집의 딸을 그냥 무작정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
물론 소피아는….
[가문에서 저를 파면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겠어요. 저는 포레스트 백작님에게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어요.]
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남의 집안에 평지풍파를 불러올 수야 없지.’
결국 밀턴은 담판을 짓기 위해서 필리노버 남작을 만났다.
그리고 우선은 정직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필리노버 영애를 제 가신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필리노버 남작은 밀턴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생각이지? 내 딸을 건축가로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이야.’
필리노버 남작은 자신의 딸이 건축학에 매료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가 건축에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지 모르고, 또 얼마나 강렬한 집념을 불태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지지리도 부모 말을 안 듣는 딸내미의 특이한 취미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필리노버 남작에게 있어서 밀턴의 말은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여성 건축가?
그것도 귀족 영애가?
그런 해괴한 일을 인정하기에는 그의 상식이 너무 굳건했다.
그러니 그는 자연스럽게 밀턴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딸을 곁에 두며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은 없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것인가!’
생각을 거듭한 결과 필리노버 남작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내 딸이 마음에 들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