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47화 (47/257)

제47화

“후우우….”

연회가 끝나고 밀턴은 자신의 방에서 피곤에 찌든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영애들과 춤을 췄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춤을 출 때마다 노골적으로 신체를 접촉하며 들이대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실망감과 피곤함을 느끼는….

“좋았어. 풍어다.”

그런 일은 없었다.

어디 로맨스 소설에 여복이 넘쳐서 여주가 등장할 때까지는 여자 보기를 돌 보듯 하는 남주도 아니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폭발하는데 솔로인 밀턴이 그걸 즐기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밀턴은 오늘 만났던 영애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초상화는 확실히 사기였지만 그래도 꽤 미인들이란 말이지.”

귀족 영애들의 미모는 사실 평균적으로 꽤 괜찮은 편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이미 미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어드밴티지를 먹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거기다 평민과 달리 귀족 영애들은 자신의 미모를 가꾸는 미용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좋은 혼처에 시집을 가기 위해서는 가문의 위세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미모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미한 가문의 영애들은 종종 상상 속에서 자신보다 지체 높은 가문의 남자들이 자신의 미모에 한눈에 반하여 아내로 맞이하는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당연히 상상 속의 그 남자는 잘생기고 권세가 높으며 결정적으로 자신만 사랑해주는 그런 사람이고 말이다.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꾸는 것인데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다.

흔하지는 않아도 가끔 가문의 수준을 넘어서 미모를 무기로 하여 한 차원 높은 가문에 시집을 가는 영애들도 있었다.

그러니 항상 평균적으로 미모가 높은 것은 당연했다.

‘뭐, 예전에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만 한 인물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긴, 그 여자 미모는 인간급이 아니라 요물급이었지.’

어쨌든 밀턴의 인생, 아니 전생의 박문수의 인생까지 포함해도 이렇게 많은 미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

이렇게 찾아온 인생의 절정기를 어찌 즐기지 않을 수 있으랴?

“내일부터 한 명씩 차분하게 만나볼까? 일단 약속 잡은 상대가….”

머릿속에 추려둔 후보들을 떠올리며 밀턴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연회가 끝나고 다음 날.

상당수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포레스트 영지에 머물렀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딸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딸을 밀턴과 엮어 주기 위해서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밀턴은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며 아름다운 영애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남 속에서 과연 결혼을 해도 괜찮을 여자가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흘렀다.

“영 별로네.”

열흘 동안 열 명의 여자와 만남을 가진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까다롭게 볼 생각은 없었다.

후보가 이렇게 많으면 금방 적당한 아내감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개별적인 만남을 가져보니 그런 기분이 싹 사라져 버렸다.

‘한국 여자들한테 김치녀니 된장녀니 하는 놈들은 이 세계로 전생 한번 해보라고 하고 싶네.’

이건 정말로 레벨이 달랐다.

연회장에서는 나름 조신한 척했지만 그건 다 가식이었다.

개별적인 만남을 가지는 순간 밀턴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일까?

그녀들은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언제까지 이런 궁벽한 시골에 살고 싶지는 않으니 중앙으로 올라가자고 은근히 권하는 여자.

자신의 친정이 더 전통 있는 가문이라고 말하며 근거 없이 콧대를 세우는 여자.

가장 심했던 것은 어제 만났던 여자였다.

평소 행실이 얼마나 오만한지 행동 하나하나에서 오만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가장 결정적인 일은 식사 시간에 일어났는데 서빙을 하던 하녀가 실수로 접시를 깨서 요리가 그녀의 드레스를 더럽히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밀턴이 보는 앞에서 실수를 한 하녀의 뺨을 때린 것이다.

그러고서 태연하게 하는 말이….

[역시 가문에 안주인이 없으니 아랫것들이 버릇이 없네요. 걱정 마세요. 제가 바로 잡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진짜 대박이었지. 허영심 이전에 기본 개념이 없는 거야.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여자들과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독신으로 살면 살았지 진짜 아니다.

“어쩔 수 없어. 이건 진짜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어쩔 수 없는 거야.”

밀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당분간 결혼은 말끔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영주님.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손님?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기로 했을 텐데?”

허영심 가득한 귀족 영애들한테 시달리다 보니 오늘은 그냥 만사 잊어버리고 푹 쉬고 싶은 밀턴이었다.

“그게…. 필리노버 영애께서 꼭 영주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망할….”

집사의 복고에 밀턴은 입에서 욕부터 치밀어 올랐다.

가뜩이나 지치고 짜증나는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들이대기까지 하는 여자라니….

“오늘은 피곤하니 못 만나겠다고 전해줘.”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밀턴은 집사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영주님. 필리노버 영애가 돌아가면서 이것을 영주님에게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응? 그게 뭐지?”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영주님에게 꼭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집사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은 몇 장의 커다란 종이 두루마리였다.

‘편지치고는 사이즈가 큰데? 뭐지?’

호기심이 생긴 밀턴은 일단 내용물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리 줘 봐.”

밀턴은 집사에게 종이 두루마리를 받아서 펼쳤다.

그러자….

“이건? 도면인가?”

그 두루마리에 그려져 있는 것은 도면이었다.

그것도 그냥 그런 도면이 아니었다.

“이건 우리 영지를 배경으로 그린 도면인가?”

도면을 살펴보니 토목 지식이 전무한 밀턴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한 것이 꽤 전문가가 만진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건 도시 계획, 이건 외성벽 증축, 항구 개발, 이건 도로인가?”

도면은 지금 포레스트 영지가 진행 중이거나 혹은 영지의 발전에 따라서 반드시 진행해야 할 건수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걸 누가 줬다고 했지?”

“예. 필리노버 남작가의 영애가 전해 줬습니다.”

“필리노버? 필리노버… 필리노버라…. 아! 그 사람인가?”

밀턴은 몇 번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연회장에서 만났던 필리노버 남작을 기억해냈다.

필리노버 남작은 이번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 중에는 꽤나 신참이었다.

원래 중앙에서 활동하던 귀족이었는데 불과 3년 전에 남부로 내려왔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중앙의 귀족이 남부로 내려왔다는 것은 결국 가문이 몰락했다는 말과 같았다.

이번에 항구 개발에 가장 적은 자금을 출자한 사람 중에 한 명이기도 했다.

“흐음… 딸을 통해서 이런 물건을 주는 이유가 뭘까?”

밀턴은 필리노버 남작이 전달해준 도면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 여러 귀족들에게 꽤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이 바로 이 도면이었다.

지금 포레스트 영지가 나아가고자 하는 발전 방향을 정확하게 읽고 거기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번 만나봐야겠군.’

“필리노버 남작 영애를 불러줘.”

“예. 알겠습니다.”

한동안 귀족 영애들은 질렸다고 생각했지만 일 얘기가 되면 무조건 만나야 했다.

잠시 후.

살짝 웨이브를 준 붉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확 들어오는 미녀가 밀턴의 앞에 나타났다.

“소피아 필리노버라고 합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포레스트 백작님.”

밀턴의 앞에 나타난 소피아는 우아하게 올렸다.

‘중앙에서 내려온 티가 나네.’

남부 귀족 영애들도 딱히 예법상 틀린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미묘한 차이에서 나오는 세련미가 부족했다.

거기에 비해서 눈앞에 있는 여인은 능숙하면서도 세련된 예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소.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군.”

“예. 혹시 백작님이 찾으실까 봐 돌아가지 않고 저택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밀턴은 순간 아연이 실색했다.

‘귀족 영애들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런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아마도 아버지에게 몹시 엄한 명령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 밀턴은 조금 미안해졌다.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쉬려고 했소. 미안하게 되었군.”

“아닙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제가 잘못이었던 거죠. 그래도 만남을 가져 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밀턴은 순간 생각했다.

‘얼굴과 옷차림은 청순한데 왜 섹시한 매력이 느껴지지? 머리카락 색깔 때문인가?’

사실이 그랬다.

소피아를 얼굴만 놓고 보면 청순하고 순한 인상이었지만 진한 장미 빛깔의 머리카락은 그녀에게 도발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약간 적갈색을 띈 붉은 머리는 꽤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훨씬 더 진해서 빨강에 가까운 컬러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상반된 매력이 동시에 발산되어서 남자들 심장에 썩 좋지 않았다.

“크흠….”

‘정신 차리자. 정신.’

그녀의 미모에 살짝 풀어졌던 정신을 바로잡으며 밀턴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영애가 선물해준 이 물건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더군.”

밀턴의 말에 소피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꽤 실력 있는 건축사의 작품 같던데? 혹시 누구의 작품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소?”

밀턴의 말에 소피아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과한 칭찬입니다. 실력 있는 건축사라뇨? 독학으로 공부한 실력이라 부끄럽습니다.”

“잠깐? 설마 지금….”

밀턴은 진심으로 놀랐다.

“그 도면을 그린 사람이 필리노버 영애라고 말하는 거요?”

“예. 부끄럽지만 그 아이들은 제 작품입니다.”

“…….”

밀턴은 순간 당황했다.

혹시 이 영애가 자신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까?

간도 크게?

하지만 이렇게 금방 들통날 수 있는 거짓말을 해서 뭐 하게?

‘확인 한번 해볼까?’

“몇 가지 질문을 좀 해 보겠소.”

“말씀하시죠.”

“여기 도시 계획의 도면에서….”

밀턴은 자신이 봤던 도면에서 의도가 궁금했던 부분에 관해서 질문을 했다.

만약 이 도면을 설계한 본인이 아니라면 금방 티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은 교통의 순환을 우선시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거지가 들어선 후에 도로의 확장을 위해서 토지를 재구입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것보다는 애당초 교통량을 최대치로 잡아서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기는….”

그녀의 대답에는 막힘이 전혀 없었다.

밀턴의 질문에 도면에 눈길을 주지도 않고 대답할 정도로 그녀는 이 도면의 구조와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이었어? 귀족 영애가 건축가? 말도 안 돼. 어디 21세기 한국에서 셀프 인테리어 하는 자취녀도 아니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마치 지구로 치면 본업은 걸그룹인데 취미로 막노동도 좀 해요, 라고 말하는 여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소피아 필리노버라는 여자는 특이했다.

밀턴은 그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소피아 필리노버]

건축가 LV.2

무력 - 05 통솔 - 25

지력 - 79 정치 - 52

충성 - 05

특성 - 건축, 토목, 예술.

건축 LV.5 : 건물을 효과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센스가 뛰어나다.

토목 LV.6 : 도로, 교량, 제방 등의 토목 시설 건설에 우수한 능력을 보인다.

예술 LV.4 :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높아진다.

‘놀랍군. 진짜 건축가잖아?’

스텟창을 확인해 본 결과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건축가로서의 재능은 상당히 뛰어나 보였다.

79에 도달한 지력 스텟이 그 증거였다.

그녀의 건축, 토목에 대한 지식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가 나온 것이리라.

거기다 특성 전반도 모두 건축에 관련된 것이었다.

작게는 건물부터 시작해서 국가 인프라 건설에 도움이 되는 토목 산업 전반에 폭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이런 특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즉, 이 부분에서 지형의 고저 차를 살려서 도시의 배수 시설을 배치하는 것이 바로….”

밀턴이 그녀에게 감탄하고 있을 때 소피아는 이미 스스로의 설명에 도취되어서 끝없이 자신이 설계한 도면에 관해서 설명을 이어 가고 있었다.

“크흠…. 필리노버 영애. 혹시 질문 좀 해도 되겠소?”

“예. 얼마든지요.”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은 건축에 관해서 얼마든지 물어봐 달라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밀턴이 말했다.

“귀족 가문의 영애인 당신이 어떻게 건축학에 관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밀턴의 말에 소피아는 얼굴을 붉히며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역시 이상하죠? 건축학에 매료된 여자 같은 건….”

다소 풀이 죽은 듯한 그녀에게 밀턴이 말했다.

“특이하다고는 생각하오.”

그런 밀턴의 말에 소피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저기 저… 건축물이 좋아요. 어릴 때부터….”

“건축물이 좋다고요?”

“예.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로 이런 걸 좋아했어요.”

“꽤 특이한 취향이군요.”

“예. 정말 특이했죠.”

소피아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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