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세 총통의 삼자 회담이 끝나고 힐데스 공화국의 진형에서 바하슈텐 총통은 주변을 물리고 누군가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하기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바하슈텐 총통의 눈앞에 있는 인물은 아직 2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이였다.
체격은 약간 마르다 못해 빈약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지만 눈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안광은 허약하다는 이미지가 범접도 하지 못하게 했다.
마치 독을 품고 웅크리고 있는 듯한 인상의 젊은이는 바하슈텐 총통에게 공손하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자국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스트라부스 왕국에게 손을 뻗는 건 무리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역시 아깝단 말이지. 한 입도 베어 물지 못하고 통째로 넘기기에는 너무 먹음직스러워.”
좀 전에 다른 두 총통의 앞에서는 미련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제 바하슈텐 총통은 스트라부스 왕국에 진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바하슈텐 총통에게 젊은 남자가 말했다.
“어차피 스트라부스 왕국은 지금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응? 그게 정말인가? 지금 전황은 우리 공화국의 연합군이 압승을 거듭하고 있는데?”
“한 방 크게 먹였다고 해서 쓰러질 정도로 저력이 없는 나라는 아닙니다. 그리고 후방에 스트라부스 왕국을 지지하는 다른 나라들의 원조도 곧 이어질 테죠.”
“과연, 일리가 있군.”
“예. 지금은 일단 한발 물러날 때입니다. 왕국을 토벌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공화국을 하나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래.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겠지.”
바하슈텐 총통은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깊게 신뢰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젊은 청년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이다.
지금 힐데스 공화국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낸 책략.
다른 두 총통은 이것이 힐데스 공화국의 참모부에서 머리를 짜내고 짜내서 만들어낸 걸작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다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계획은 이 친구의 머릿속에서 나왔지.’
바하슈텐 총통을 설득시킨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내기까지 모든 것이 이 남자의 공이었다.
“전적으로 자네를 믿지. 지크프리트. 내 이름을 빌려줄 테니 마음껏 자네 능력을 펼쳐 보게.”
이름은 지크프리트.
직책은 총통 직속 수행 비서다.
지금은 이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훗날 전 대륙에 이 남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진다.
크게 변하는 곳이 있다면 작게 변하는 곳도 있는 법이다.
수도에서 작위를 백작으로 승작한 밀턴은 영지로 돌아와서 계획했던 일들을 차곡차곡 진행시켰다.
우선 맥스가 원했던 대로 행정 관료를 증원해 주었다.
덕분에 맥스의 내정 처리 능력도 훨씬 더 올라갔다.
원래 능력이 되어도 시간과 인력이 달려서 손을 댈 수 없던 일도 완벽하게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밀턴은 그런 맥스에게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계획을 알려주며 차근차근 일을 진행시켜갔다.
우선은 광산의 개발부터 시작했다.
광맥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했기에 즉시 기술자를 수배했다.
하지만 처음에 밀턴이 광산을 개발하겠다고 하자 맥스를 비롯해서 가신들이 반대를 표명했다.
보통 광맥을 찾는다고 하면 인력과 자금이 얼마나 들어갈지 모른다.
광맥을 찾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에 하나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산 개발이라는 것은 일종의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밀턴은 자신의 능력으로 영지 안에 광맥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턴은 다소 강행을 해서 일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가신들의 걱정과는 달리 비교적 빠르게 광맥이 터졌다.
비록 광맥치고는 가치가 낮은 구리 광맥이었지만 이거라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구리 광맥이 일단 터지자 주변의 관심이 포레스트 영지에 순간 집중되었다.
광산이 한 번 돌아가면 향후 50년 동안은 마르지 않는 돈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주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포레스트 영지에 섣불리 영지전을 신청하는 영주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지난 세 번의 영지전에서 압승을 거둔 포레스트 영지의 군사력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지전 대신에 포레스트 영지에 투자를 하겠다는 자들이 나타났다.
남부 지역의 영주들부터 시작해서 꽤 굵직한 상단까지 포레스트 영지의 발전 가능성에 투자를 하고 이권을 얻어내기를 원했다.
밀턴은 그들의 투자를 받기로 했다.
단, 광산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항구 개발에 대한 투자로서 말이다.
투자자들 대부분은 포레스트 영지에서 발견된 광산에 돈을 투자하고 이권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밀턴이 제시하는 항구 개발에 대한 투자 제안은 굉장히 뜻밖의 말이었다.
투자자들 중에 절반 정도가 밀턴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 정도는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밀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지전을 거듭해서 넓어진 영지와 곧 개발될 광산에서 나올 자금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군사력.
눈치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강 알 수 있었다.
지금 포레스트 영지는 남부 지방에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두드러지고 있는 영지라는 것을 말이다.
항구 개발이 가져올 성공 가능성과 별개로 포레스트 영지 자체에 투자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이들은 과감하게 자금을 투입했다.
덕분에 밀턴은 순조롭게 항구 개발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구가 개발된 뒤 투자자에게 항구 이용권을 이권으로 배당하면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달한 항구로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광산 개발과 항구 개발.
이 두 가지 사업은 모두 일자리를 대량으로 창출하는 사업이었다.
포레스트 영지 내부의 인력으로는 모자라다고 판단한 밀턴은 유민 흡수 정책을 시행했고, 덕분에 인근에 화전민이나 먹고살 길이 없는 유민들이 포레스트 영지에 대거 유입되었다.
그들은 항구와 광산에 투입되었고, 또 젊은 남자들은 영지의 병사로 지원하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부쩍 성장하고 있는 포레스트 영지는 그렇게 차근차근 힘을 비축했고, 지금에 와서는 처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발달했다.
영지 - 포레스트 영지.
인구 - 89,521명.
자금 - 56,054골드.
주요 생산품 - 밀, 보리, 귀리, 목재, 모피, 양모, 말, 치즈.
개발 가능 - 구리 광산(개발 진행 중), 항구(개발 진행 중).
군사력 - 기사 35인, 수습 기사 110인, 기병 800인, 보병 4,000인, 궁병 1,000인.
“뿌듯하구만.”
밀턴은 하루에 몇 번이고 영지의 상태창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인구수가 9만에 가깝고 보유 자금도 56,000골드가 넘는다.
뭐, 자금은 반 이상이 투자받은 돈이었지만 괜찮다.
전생에 사업하는 사람들이 빚도 재산이라고 하는 이유를 그 입장이 되어보니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이만하면 지방의 봉토 귀족으로는 대영주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하루하루 발전하는 영지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실시간으로 심시X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시기라고 해도 사람이 살면서 고민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최근 밀턴에게는 상당히 문제되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영주님. 원로원의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의 보고에 밀턴은 인상을 찡그렸다.
“또? 젠장, 바쁘다고 그래.”
하지만 집사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그게…. 이미 저택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밀턴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푸념하듯이 말했다.
“제길, 이 영감님들은 좀 편하게 노후나 즐길 것이지 왜 날 피곤하게 하는 거야.”
포레스트 영지에는 다른 영지에 없는 원로라는 직책이 있다.
밀턴이 임시로 만든 이 직책은 영지를 위해서 한평생 힘을 쓴 가신들이 후방에서 편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만든 직위였다.
실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영지에서 한평생 노력을 해온 인물들이니 영지의 현역 관료나 기사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존중을 하는 자들이었다.
사실 원로라고 해봐야 전 기사단장인 샌슨과 전 행정관인 토마스 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둘이 최근에 합심을 해서 한 가지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밀턴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추진하고 있는 일이 무척이나 마땅치 않았다.
다만 명분상 거절할 방법이 딱히 없어서 일단은 나중으로 미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밀턴의 태도에 두 원로는 제대로 불이 붙어서 점점 더 과격하게 일을 밀어붙였고 결국 밀턴은 요즘 이 둘을 대놓고 피하고 있었다.
“영주님. 여기에 계셨습니까?”
“오늘이야말로 꼭 확답을 주셔야겠습니다.”
결국 밀턴의 집무실에 원로 두 명이 기운차게 들어왔다.
“아니 들어오라고 말도 안 했는데….”
“또 도망가실 거잖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고지식한 노인네 둘이 예의고 나발이고 집어치우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일.
그것은 바로….
“자. 이제 이 중에 하나를 골라 주십시오.”
“모두 아름답고 현명하기로 소문난 영애들입니다.”
밀턴 포레스트 장가보내기 프로젝트였다.
“하아… 돌겠네.”
밀턴은 원로 두 명이 던져두고 간 수십 장의 초상화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둘은 밀턴의 앞에서 숨도 쉬지 않고 결혼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설명했다.
특히 샌슨은 결혼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밀턴에게 눈물을 흘리더니 전대 포레스트 자작을 찾으며 자신이 미흡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밀턴에게 양심의 가책을 팍팍 느끼게 했다.
결국 밀턴은 일단 생각은 해보겠다고 좋게 말하면서 두 원로를 돌려보냈다.
“진짜 미치겠네. 명절에 갈구는 친척 어르신도 아니고 이거야 원….”
사실 생각해 보면 그 둘이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봉토 귀족에게 있어서 후계자의 생산은 중요한 의무다.
그러기 위해서 아내를 여럿 들이는 것도 보통이었고, 때로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이 이혼의 사유가 되기도 했다.
밀턴의 혼기는 사실 꽤 늦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혼담을 논할 겨를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늦어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진즉에 혼담이 오가고 정략적인 조건을 따진 다음 적당한 영애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밀턴의 내부에 있는 전생의 기억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기 전에는 정략결혼도 무리 없이 받아들였던 밀턴이었지만 전생의 기억이 각성하고 난 후로 정략결혼은 꽤 거부감이 들었다.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혼담 얘기가 오갈 때 초상화가 오가기는 한다.
하지만 밀턴은 그 초상화가 심각하게 미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보면 무슨 양심으로 상상화를 그려놓고 초상화라고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큰 경우도 있었다.
‘SNS도 없는 이 세계에서 왜 뽀샵을 하는 거야? 여자의 본능인가?’
거기다 문제는 외모만이 아니다.
외모보다 더 심각한 것은 성격 차이다.
중매인들은 모두 말한다.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정의감이 강하고 도덕심이 높으며 남편에게는 순종적인 성격이다, 라고 말이다.
‘어디서 개 뻥을….’
그런 여자가 있으면 오히려 무섭다.
성격이 어떤지는 사실 만나서 서로 겪어 보면서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매쟁이들의 뻥만 듣고 어떻게 성격을 평가한단 말인가?
밀턴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남녀 간의 만남이 너무 적어서 그래.”
수도의 귀족들은 연회장이나 다양한 모임에서 이성을 만날 기회가 많다.
덕분에 수도의 귀족들에게는 연애결혼도 꽤 흔한 편이다.
부작용으로 불륜도 그만큼 흔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만남의 기회는 많은 편이다.
하지만 지방의 봉토 귀족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남부는 연회를 자주 열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사상 자체가 보수적이었다.
여인은 얌전하게 아버지가 정해준 혼처에 시집을 가서 남편에게 순종하며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이 행복이고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깜깜한 상황 속에서 연애?
어림도 없는 말이다.
“그냥 이 중에서 하나 골라?”
밀턴은 초상화들을 보면서 중얼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초상화는 모두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신뢰할 수가 없었다.
‘보이스 피싱급으로 뻔히 보이는 사기를 알고도 당할 수는 없지.’
고민을 하던 밀턴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연회가 없으면, 내가 열면 되잖아?”
‘이 단순한 생각을 이제까지 못했다니?’
생각하고 보니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항구에 자금을 투자한 사람들과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던 밀턴이었다.
밀턴은 즉시 집사를 불러서 명령했다.
“연회를 준비하고 투자자들에게 초대장을 날려라. 그리고….”
그렇게 밀턴은 사교의 장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