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44화 (44/257)

제44화

페일런 공작의 제자가 된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우선 밀턴은 그 편지를 가지고 1왕자의 파벌에 접선을 했다.

자신이 페일런 공작이 사적으로 아끼는 제자이며 1왕자를 지지할 뜻이 있다는 식으로 의중을 드러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션 페일런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파장이 대단했기 때문에 금방 1왕자의 귀에도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1왕자는 기꺼이 자신의 파벌로 받아들이고 밀턴과 독대로 만남을 가졌다.

“하하하하… 대단하군. 이 젊은 나이에 익스퍼트라니? 역시 페일런 공작의 제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아.”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밀턴은 1왕자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그야말로 충성을 다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직 스승님은 정치적인 중립을 지키고 계시지만 최근에는 1왕자 전하에게 마음이 기우는 듯하십니다.”

“그게 정말인가?”

반색하며 되묻는 1왕자에게 밀턴이 웃으며 말했다.

“예. 다만 워낙 고지식한 분이시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페일런 공작이 좀 그런 경향이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1왕자에게 밀턴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제가 스승님을 설득해서 반드시 1왕자 전하를 지지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하하하… 고맙군. 포레스트 백작. 이렇게 나에게 도움을 주니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군. 바라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보게.”

‘왕위를 노린다는 인간이 뭐든지라는 말을 쉽게 담으면 안 되지. 이 멍청한 인간아.’

밀턴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1왕자에게 말했다.

“제가 어떻게 왕자 전하에게 무언가를 바라겠습니까? 그저 제 충심을 알아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하하하하… 포레스트 백작은 진정 충직한 기사군. 알았네. 내 그 뜻을 알아주지.”

호탕하게 웃는 1왕자를 보며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치사하게 두 번 물어보지도 않냐? 이 싸가지야.’

“크흠… 바라는 것은 없지만 그러고 보니 보고해야 할 것은 하나 있었습니다.”

“보고? 그게 무엇인가?”

“예. 그게 저하고 리브라도 백작 사이에 일어난 사소한 분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재판까지 이어질 것 같아서 전하의 심기를 더럽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래? 리브라도 백작이라… 그게 누구지?”

자신의 파벌에 속한 귀족이었지만 1왕자에게 리브라도 백작은 기억에 남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1왕자에게 옆에 있는 가신 중에 한 명이 귓속말로 뭐라 속삭였다.

“아… 내 파벌의 인간인가? 좋아. 내가 친히 중재를 해주지.”

“왕자 전하께서 직접 나서지 않고 그저 말씀만 전해 주셔도….”

“아니. 이건 내 성의일세. 그러니 거부하지 말게.”

1왕자는 이런 사소한 일에도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는 자신을 보고 밀턴이 감격하리라 생각했다.

‘귀찮게 직접 나서냐? 할 일이 그렇게 없어?’

물론 밀턴은 쥐꼬리만큼도 감격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밀턴은 1왕자를 뒷배로 대동하고 리브라도 백작과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리브라도 백작의 저택을 나오며 1왕자는 밀턴과 헤어지면서 말했다.

“그럼 포레스트 백작, 페일런 공작을 설득하는 문제는 자네에게 맡기지.”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만약 자네가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내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네를 중앙으로 부를 것을 약속하지.”

“정말입니까? 제가 중앙으로?!”

“나는 빈말을 하지 않는 성격일세.”

“감사합니다. 반드시 스승님을 설득해 보이겠습니다.”

밀턴은 딱히 중앙에 진출하고 싶은 욕심도 없었지만 겉으로는 무척 큰 기회를 잡은 것처럼 흥분한 티를 내며 말했다.

그리고 1왕자가 마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지자….

“이제야 갔네. 피곤한 타입이야.”

밀턴은 허리를 쭉 펴고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을 했다.

성격에 맞지도 않는 아부를 계속하고 있으려니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곤했다.

“진짜 이놈의 수도는… 차라리 전쟁터가 더 편하겠다.”

밀턴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지금의 복잡한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우선 지금의 왕위 경쟁은 2강 구도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숨겨진 제3자의 다크호스가 있다.

그리고 제3의 세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밀턴을 눈여겨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밀턴 자신은 제3의 세력과 1왕자 사이에 안정적으로 양다리를 걸치는 것에 성공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일단 영지로 내려가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어.’

밀턴이 내린 결론은 최대한 빠르게 수도를 떠나는 것이었다.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밀턴은 수도에서 남은 용무를 최대한 빠르게 마친 후에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한 몇 년간은 여기 올라오지 말아야지.’

***

“그래서 제자로 받아들이고 1왕자파의 파벌로 들어가는 것까지 허락했다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페일런 공작은 밀턴과의 거래를 마친 후 자신의 주군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페일런 공작이 주군이라고 부르는 이는 나긋한 체형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페일런 공작의 보고를 받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당했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밀턴의 속내가 대강 짐작이 갔다.

자신과 1왕자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최악의 순간 어느 한쪽이 무너진다면 다른 쪽으로 갈아타려는 심산일 것이다.

‘간이 부은 건지? 아니면 배짱이 두둑한 건지. 어쨌든 당했군.’

밀턴의 입장에서는 책임을 피하고 교묘하게 이득만 챙긴 절묘한 한 수였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밀턴을 완전히 자신의 영향력 안에 집어넣으려고 한 그녀로서는 아쉬울 뿐이다.

실패의 이유는 딱 하나.

한평생 검만 잡아온 페일런 공작의 뒤떨어지는 정치적 감각을 상대가 공략한 것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누군가를 붙여서 보낼 것을….’

사실 그녀라고 이런 사태를 예상했겠는가?

페일런 공작이라고 하면 레스터 왕국에 하나밖에 없는 마스터이자 공작이다.

설마하니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백작이 페일런 공작을 상대로 이런 정치적 교섭을 제시할 줄은 미처 몰랐다.

보통 페일런 공작의 요구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순응한다.

페일런 공작의 가지고 있는 명성과 직위, 거기에 실질적인 무력은 그 정도의 무게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천하의 페일런 공작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려고 마음먹은 포레스트 백작의 배짱이 대단하다고 봐야겠지.’

생각을 다르게 하니 페일런 공작의 실수라기보다는 포레스트 백작의 두둑한 배짱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의 신하의 부족함보다는 상대방의 뛰어남을 인정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수고했어요. 페일런 공작. 이제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기다리세요.”

“예. 주군.”

그녀는 페일런 공작을 보내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밀턴 포레스트 백작이라… 괘씸함과 깜찍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부디 선을 넘지 말기를….”

밀턴이 작위를 받고 수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있는 동안 세계의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갔다.

우선 시작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전선의 대공세였다.

힐데스 공화국의 보급 상황이 나빠진 것을 틈타서 서부 전선은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겨울 동안 꾹 참고 갈았던 칼을 드디어 뽑은 것이다.

시기상으로는 밀턴과 로스케이즈 백작이 영지전이 벌어지는 시기에 서부 전선에서는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간 것이다.

무려 7만의 군세가 회색 산맥을 넘어서 힐데스 공화국을 공격했다.

보급 상황이 좋지 않은 힐데스 공화국에게 있어서 이것은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힐데스 공화국은 이 위기를 버텨냈다.

회색 산맥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국경 지대 전부를 텅텅 비우고 군을 최후방으로 물린 것이다.

넓은 전선을 커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전선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물러나면서 적의 보급을 어렵게 하기 위해 성벽을 비롯한 군사 시설 대부분을 파괴했다.

무려 국토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을 스스로 파괴하고 포기한 것이다.

머리로 알고 있어도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7만 군대는 예상 이상으로 늘어진 보급 전선으로 생각한 것처럼 파괴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힐데스 공화국이 국력을 총동원해서 펼쳐놓은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전쟁은 길어질 조짐을 보였다.

바로 이 틈을 타서 움직인 것이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이었다.

이 대륙에 단 세 개의 공화정 국가인 힐데스, 하노버슈, 코브르크.

이 세 개의 나라는 원래 굳건한 군사 동맹이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강력한 군사 국가에 맞서서 이 세 개의 나라는 힘을 합쳐서 대항했다.

하지만, 이번 힐데스 공화국의 위기에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대륙의 군사 전문가들은 공화국 삼국의 동맹에 균열이 생긴 것이거나 힐데스 공화국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서 다른 두 개의 공화국이 과감하게 손을 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이 두 개의 나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아무리 강력한 군사 강국이라고 해도 힐데스 공화국에 힘을 집중시키고 있다면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은 은밀하게 연합군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치열한 전쟁터였던 북부 전선에 연합군의 군세가 투입되었다.

무려 10만의 연합군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가자 가장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북부 전선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이 뜻밖의 위기에 즉시 결단을 내렸다.

힐데스 공화국을 침공 중이었던 7만의 군대를 빼서 자국을 위기에서 구한다, 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이제까지 숨죽이고 있던 힐데스 공화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조국을 유린한 침략자들을 용서하지 마라!]

힐데스 공화국의 총통 바하슈텐의 명령과 함께 힐데스 공화국의 무시무시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초기에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길어진 보급선과 격렬한 적의 반격에 7만 대군의 후퇴는 크게 방해를 받았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수뇌부는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삐걱거리는 북부 전선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힐데스 공화국에 보낸 정벌군의 후퇴도 늦어지고 있었다.

난국 속에서 활로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그리고 결국은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북부의 명장 카트라슈 후작의 전사와 더불어서 북부 전선이 무너진 것이다.

[공화국의 형제들이여!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진격하라!]

커다란 외침과 함께 스트라부스 왕국에 공화국의 연합군이 진격했다.

대륙의 중부를 굳건하게 지키며 북부의 공화국을 막아내던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방패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전선에서 공화국의 연전연승이 이어지는 와중에 세 공화국의 총통들이 비밀리에 접선을 했다.

힐데스 공화국의 바하슈텐 총통.

하노버슈 공화국의 페인하임 총통.

코브르크 공화국의 슈하이머 총통.

이 셋은 한자리에 모여서 기분 좋게 와인 잔을 들며 말했다.

“대단하군.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예상대로 될 줄은 몰랐소.”

“그러게 말이오. 바하슈텐 총통에게는 뭐라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군.”

“허허허… 두 분의 도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나라가 이 위기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세 사람의 대화를 미뤄 짐작하건대 지금 스트라부스 왕국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전쟁의 전체적인 계획은 힐데스 공화국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바하슈텐 총통이 은밀하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토를 우리 두 공화국만이 나눠서 가져도 괜찮겠느냐는 말입니다.”

말을 꺼내는 페인하임 총통의 목소리는 은근했지만 약간의 탐색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슈하이머 총통 역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능구렁이들 같으니라고….’

바하슈텐 총통은 이 둘이 무슨 의미로 이 말을 꺼냈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사전에 얘기는 정해 두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을 쓰러트렸을 때 얻은 영토는 공격을 맡은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의 몫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의 광대한 영토를 생각하면 힐데스 공화국에서 약속을 바꾸고 한 박자 늦게 숟가락을 들이미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즉, 지금 페인하임 총통의 발언은 은근한 제의가 아니라 일종의 떠보기였다.

약속을 지킬 의지는 있느냐? 라는 확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하슈텐 총통은 이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물론입니다. 어찌 같은 공화국의 형제들과 한 약속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호오…. 정말이십니까?”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여차하면 정식 서류로 남겨서 조약을 체결해도 좋습니다.”

바하슈텐 공작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페인하임 총통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정식 조약서를 만들겠습니다.”

“얼마든지 괜찮소. 국가 간의 거래를 구두로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과연 바하슈텐 총독. 우리 뜻을 알아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럼, 영원한 동맹을 위해서.”

“그리고 공화주의의 완성을 위해서.”

“건배!”

세 총통의 와인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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