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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43화 (43/257)

제43화

“그런 억지… 읏?”

대답하려던 밀턴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페일런 공작의 몸에서 엄청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와서 밀턴을 압박한 것이다.

‘뭐 이런 사람이….’

이건 권력의 압박이 아니라 그냥 무력시위다.

어디 길거리 양아치도 아니고 이게 무슨 억지란 말인가?

하지만 같은 억지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거부하기 힘든 권위가 실리는 법이다.

페일런 공작은 억지에도 권위를 실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력한 압력에 밀턴은 식은땀이 흘렀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무리 페일런 공작님의 말씀이라도… 의중을 모르는… 일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밀턴은 한마디 한마디를 쥐어짜듯이 말했다.

그런 밀턴을 보고 페일런 공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기세를 거둬들었다.

“요즘 것들치고는 강단이 있군. 왕궁에 로열 기사단이라는 놈들도 내가 이렇게 나오면 깨갱하고 찌그러지는데 말이야.”

심장을 쥐어 짜이는 듯한 압박감이 사라지자 밀턴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우우….”

그런 밀턴을 보고 페일런 공작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자네를 높게 사고 있는 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분의 명령으로 자네를 돕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다는 것. 딱 여기까지일세.”

“저를 높게 사고 있는 분이라고요?”

“그래. 이 이상은 말해줄 수 없네.”

페일런 공작은 여기까지가 자신이 허락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라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밀턴은 그 최소한의 정보를 가지고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페일런 공작은 중립파다. 1왕자와 2왕자의 파벌 양쪽에서 탐을 내고 있지만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야.’

지금 왕도의 귀족들은 대부분이 1왕자파와 2왕자파로 나눠져 있다고 봐도 좋았다.

치열한 두 왕자의 파벌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중립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설프게 중립을 표방했다가는 양쪽 모두에게 공격을 받고 사라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자신이 중립임을 주장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페일런 공작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파벌이 아니라고 해도 왕국에 하나밖에 없는 페일런 공작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그 자체가 귀중한 왕국의 재산이이도 했지만 온 나라 안의 기사들이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페일런 공작은 이렇게 권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꼿꼿하게 중립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 페일런 공작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밀턴을 찾아왔다고 했다.

‘명령을 듣는다는 말은 페일런 공작이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말이야. 그게 누구지? 1왕자? 2왕자? …아니야. 양쪽 어딘가에 속했다면 진작 소문이 났겠지. 그렇다면….’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은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밀턴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제3의 세력이 있구나.’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수도의 모든 귀족들은 다음 왕위를 1왕자와 2왕자 둘 중에 한 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제3의 세력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션 페일런 공작이라는 강력한 조커를 가지고 있는 제3의 세력이 말이다.

‘누군지 물어본들 가르쳐 주지는 않겠지. 하지만… 진짜 누구야?’

밀턴은 답답했다.

누군지 몰라도 제3의 세력을 이끄는 이는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듯했다.

밀턴이 최근에 영지전에서 연이어 승리를 하며 상승가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지방의 봉토 귀족일 뿐.

중앙의 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왕도의 귀족이 아니다.

그런 자신을 주목하는 인물이 있다니?

가능하면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밀턴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거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거부권이 없을 것 같은데….’

사실 리브라도 백작과의 트러블은 밀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약간 손해를 감수하고 자존심을 좀 접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자력으로 맺음을 지을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여기서 누군지 모를 인물이 내민 손은 훨씬 더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일단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상대는 자신을 알지만 자신은 상대를 모르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척을 진다면 자신만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든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무리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페일런 공작 같은 거물을 움직일 정도라면 상당한 진심이라는 말일 것이다.

일단은 한 배에 올라타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납득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밀턴은 이 복잡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떠올렸다.

“젊은 친구가 생각이 너무 많군. 이제 슬슬 결론을 내리지 않겠나?”

페일런 공작의 채근에 밀턴은 결심한 듯이 말했다.

“페일런 공작 전하. 저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로 인해서 저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은 자네 마음 한구석에 새겨 두기만 하면 되네. 자네를 귀하게 쓰기를 원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역시….’

말은 꽤 둘러서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너는 앞으로 우리 쪽 사람이니 그 점을 명심해라, 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을 모시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페일런 공작 각하 정도 되시는 분이 인정하신다면 대단한 분이시겠죠?”

“물론, 나는 그분이야말로 진정 이 나라의 군주로 어울린다고 확신하고 있네.”

밀턴의 질문에 대답하는 페일런 공작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밀턴은 그런 페일런 공작을 보며 속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생각보다 단순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지금 페일런 공작은 ‘이 나라의 군주’라는 말을 썼다.

즉,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이 이 나라의 왕족 중에 한 명이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밝힌 것이다.

무력 수치는 95였지만 정치 수치는 15인 기사의 실수였지만 밀턴은 모른 체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좋습니다. 공작 각하가 믿고 따르는 분이라면 저도 믿어 보겠습니다.”

“으음….”

밀턴의 말에 페일런 공작은 몹시 흡족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페일런 공작이 자신을 많이 신뢰하는 듯하자 밀턴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말을 던졌다.

“그러니 저를 공작 각하의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응?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밀턴의 말에 페일런 공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밀턴이 입술에 기름을 바른 듯이 말을 이어갔다.

“저는 공작 각하가 모시는 분을 모르지만 공작 각하를 신뢰해서 그분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작 각하께서 저를 믿고 타당한 인연을 맺어주셔야 도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으으음….”

밀턴의 말에 페일런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게 아닌데, 싶은 느낌은 들었지만 말을 들어보면 그건 또 합당한 것 같기도 했다.

갈등하는 페일런 공작을 보며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검술 경지만 높은 릭이군.’

명망 높은 페일런 공작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릭하고 ‘같은 과’라는 것을 확신한 밀턴은 한층 더 거침없이 궤변을 펼쳤다.

“무엇보다 제가 공작 각하의 제자가 되어야 공작 전하의 뒤편에 계신 그분의 비밀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유를 물어보는 페일런 공작에게 밀턴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유를 붙였다.

“제가 공작 각하와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공작 각하의 도움을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생각할 겁니다. 페일런 공작이 사람을 모으고 있구나. 목적이 뭘까? 혹시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사게 됩니다.”

적당히 가져다 붙이는 이유이기는 했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말도 아니긴 했다.

“으음… 그건 그렇군.”

강한 설득력에 페일런 공작의 마음에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제가 공작 각하의 제자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예전에 저를 약간 가르친 적이 있으시고, 그 인연으로 위기에 처한 저를 돕는다, 라는 명분이 생기면 세상 사람들의 의심이 사라지게 되겠죠.”

“과연, 일리가 있군.”

페일런 공작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제가 공작 각하의 제자가 되면 또 다른 이점이 있습니다.”

“그건 또 뭔가?”

“제가 공작 각하의 제자라는 신분을 하고 1왕자 전하의 파벌에 들어가는 것이죠.”

이 말을 들은 페일런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이득인가? 자네가 1왕자의 파벌에 들어간다니?”

“정확하게 말하면 들어가는 척하는 겁니다. 제가 공작 각하의 제자라는 명분을 앞장세워서 1왕자 전하의 파벌에 들어가면 그쪽에서도 저를 홀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저를 교두보 삼아서 스승이신 공작 각하도 끌어들이려 하겠죠.”

밀턴이 어떠냐? 라는 표정으로 자신 있게 한 설명에 페일런 공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해를 못 하는군.’

정치력 15짜리의 이해력에 살짝 절망한 밀턴이었지만 이내 설명을 이었다.

“제가 1왕자 전하의 파벌 속에 들어가서 여차할 때 내부를 흔들 수 있고, 정보를 캐낼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아아… 그렇군. 하지만.”

‘하지만 뭐지?’

페일런 공작의 조금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좀 비겁하지 않나? 다른 세력에 간자를 심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정치력 15는 뇌가 순두부로 만들어졌나?’

생각해 보면 예전에 정치력이 낮아서 출세를 못했던 서부 전선의 넬슨조차도 정치력이 25는 되었다.

15면 그 넬슨보다도 더 낮다는 거다.

어쩌면 저 나이가 되도록 대책 없이 순진할 수 있을까?

밀턴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표정을 관리하며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 정치판은 전쟁이나 다름없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이런 건 당연한 겁니다.”

“으음….”

“만약 공작 각하께서 모시는 분이 이런 저의 행동을 나무라신다면 이것은 저의 독단으로 해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자네 계획대로 해보지.”

페일런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밀턴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걸로 일단 양다리 성공이다.’

처음부터 밀턴이 노린 것은 이중 스파이의 위치였다.

누군지 몰라도 페일런 공작까지 보내는 강수를 두었다면 저쪽은 꽤 진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제의를 일단 받아들이는 동시에 한쪽으로 도망갈 수 있는 퇴로를 만들기로 했다.

그게 바로 1왕자의 파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양다리를 걸치며 밀턴은 생존을 최우선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작 각하. 저는 예전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시절 공작 각하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말을 맞추겠습니다.”

“그게 자연스럽다면 그렇게 하게. 자잘한 것은 자네에게 맡기겠어.”

“예. 그렇다면 공작 각하께서는 편지 한 장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내용은 1왕자 전하에게 제가 공작 각하의 제자이니 부디 온건하게 봐달라는 내용이면 좋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1왕자 파벌의 내부로 들어가겠다는 거군. 좋아 해주지.”

일단 결정이 되자 페일런 공작은 과감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밀턴이 가르쳐 주는 대로 편지를 썼다.

이로서 밀턴은 자연스럽게 페일런 공작의 제자라는 서면 증거를 손에 넣었다.

‘좋아.’

“그럼 앞으로 스승님으로 모시고 예우를 다하겠습니다.”

“음. 자네 나이에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자는 드물지. 성실하게 수련하면 언젠가 마스터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스승님.”

“지금 당장은 검술 지도하기 어렵지만 다음에 시간이 나면 제대로 수련을 봐주겠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페일런 공작은 밀턴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쁘지 않군.’

페일런 공작 개인의 입장에서 밀턴이라는 제자가 생기는 것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자신도 레스터 왕국의 기사이지만 사실 이 나라의 기사 수준이 낮다는 것은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특히 평화에 찌들어 있는 요즘 젊은 것들을 보면 기사라고 입에 담기도 민망한 수준 이하의 쓰레기도 많이 보였다.

그런데 아직 젊은 나이에 스스로 익스퍼트의 길에 오른 밀턴은 페일런 공작에게 있어서 꽤 인상적이었다.

첫 만남부터 요즘 젊은 것들치고는 제법이다, 라는 인상을 새긴 것이다.

사실 밀턴의 궤변이 페일런 공작에게 잘 통한 것은 그의 정치력이 낮은 것도 있었지만 밀턴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 인상 좋은 젊은이가 자신을 정치 호구 취급하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았지만 페일런 공작으로서는 그 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운이 좋은 날이군.”

그저 주군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거기다 좋은 자질의 제자까지 얻었다는 사실이 흐뭇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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