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리브라도 백작의 입장에서 이건 생각지도 못한 한 수였다.
차라리 적대 파벌의 유력 귀족을 데리고 왔다면 맞서 싸울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 무리라면 자신의 파벌에 도움을 청해서 세력 싸움으로 몰고 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1왕자의 말대로 한 식구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구나 1왕자가 직접 중재를 나선 상황이다.
이걸 거부하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파벌에서 완전히 찍혀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는 파벌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안 돼.’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미래였다.
정치판이라는 것은 야생의 세계와 같아서 무리에서 떨어지면 사냥감으로 찍히기 마련이다.
요즘 같이 왕위 계승을 두고 파벌의 대립이 극심한 시기에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생각이 많고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하는 인간에게 가장 잘 먹히는 협박은 스스로의 망상이다.
최악의 미래를 생각하자 간담이 서늘해진 리브라도 백작은 식은땀이 흘렀다.
“왜 그러나? 리브라도 백작. 몸이 좀 안 좋아 보이는군.”
1왕자의 말에 리브라도 백작은 정신을 바싹 차리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가? 그보다 아직 자네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1왕자의 은근한 압박에 리브라도 백작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물론 따르겠습니다. 어찌 전하께서 친히 중재를 하였는데 거부하겠습니까?”
“그런가? 고맙군.”
“아닙니다. 사소한 오해에 불과한 일인데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포레스트 백작, 미안하네. 내 사과를 받아주게.”
이게 정치인이라는 걸까?
자존심 때문에 밀턴에게 노골적인 시비를 걸었지만 더 강한 권력 앞에서는 배가 땅에 달라붙을 정도로 납작 엎드렸다.
아마 꼬리가 있다면 쉬지 않고 흔들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건가?’
밀턴은 그런 리브라도 백작의 모습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라도 백작의 스텟을 확인했을 때 다른 부분은 다 그저 그랬다.
정치 능력이 75로 가장 높았지만 다른 부분은 그저 그랬다.
하지만 딱 하나 눈에 띄는 특성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처세술이었다.
처세술 LV.9(MAX) : 정치판에서 언제 어느 편에 붙어야 할지를 잘 파악한다. 혼돈한 정세 속에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
‘이런 인간도 레벨이 MAX인 특성이 있구나.’
밀턴이 보기에 리브라도 백작은 소인배에 편협한 권력자였다.
높은 자존심에 비해서 능력이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걸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라고 해도 정치판에서 한평생을 구르며 살아남은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방심하지 말자. 세상에 허투루 대해도 괜찮을 인간은 없어.’
리브라도 백작이라는 인간을 통해서 밀턴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보다 넓어졌다.
어떤 상황이라도 무언가를 얻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내일의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왕자의 중재로 인해서 밀턴과 리브라도 백작의 분쟁은 사실상 끝났다.
그 후에는 서로 1왕자를 향한 아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파했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그래. 다음에 또 보지.”
1왕자와 밀턴을 배웅하면서 리브라도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시시한 시비 때문에 자신의 정치 생명이 완전히 끝장날 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한 리브라도 백작이었다.
리브라도 백작은 문득 선친의 유언이 생각났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선친의 말씀 말이다.
‘그 애송이가 설마 같은 파벌로 들어오는 길을 선택할 줄이야. 완전히 당했어.’
리브라도 백작은 밀턴 포레스트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왕자 전하께서 직접 나서신 걸까?’
1왕자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줄곧 궁금했다.
리브라도 백작이 알기로 1왕자의 성격은 상당히 오만하고 권위적이었다.
그런 1왕자가 고작해야 지방의 봉토 귀족일 뿐인 포레스트 백작을 위해서 직접 발걸음을 하다니?
이건 꽤 파격적인 행보였다.
‘어째서? 왕자 전하가 직접 나서신 이유가 도대체 뭐지?’
리브라도 백작은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밀턴이 리브라도 백작과의 재판을 피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숙이고 사과를 결심했던 그 시점.
밀턴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당신은?”
그 손님이란 바로….
“자네가 포레스트 백작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연스럽게 밀턴에게 하대를 했고, 듣는 밀턴의 입장에서도 그게 어색하지가 않았다.
말끔한 차림에 반듯하게 서 있는 자세에서는 위압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위엄이 흘러나왔다.
그는 밀턴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포레스트 백작이 아닌가?”
“아… 맞습니다. 제가 밀턴 포레스트입니다.”
“그렇군.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마저 하지.”
그리고 남자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고 밀턴 역시 그런 남자를 제지하지 못했다.
‘도대체 누구지?’
밀턴과 정체불명의 중년 남성은 자리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밀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 나이에 익스퍼트라니. 재능 아니면 노력. 둘 중에 하나는 갖추고 있겠군.”
‘어떻게 알았지?’
상대가 한눈에 자신의 경지를 꿰뚫어보자 밀턴은 깜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계속해서 품평을 하는 듯한 시선으로 밀턴을 보며 말했다.
“주변에 기사들도 요즘 것들치고는 괜찮군.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아.”
그런 남성의 말에 성질이 급한 릭이 발끈하며 나섰다.
“당신이 뭔데 멋대로 우리를 평가하는 거요?!”
“기운은 좋군. 하지만 주변에서 눈치 없다는 말 많이 듣지 않나?”
중년 남성의 말에 다른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인 릭은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말했다.
“명예를 모독당했으니 결투를 신청하겠소!”
“…정말? 나하고?”
“그렇소. 나는 포레스트 영지의 기사 릭 스토리요. 당신도 이름을 밝히시오.”
“나? 션 페일런이라고 하지.”
“좋소. 션 페일… 엉?”
순간 릭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밀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밀턴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중년의 남성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 왕국의 검 페일런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밀턴이 무릎을 꿇자 토미와 트라이크도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그런 밀턴을 보고 션 페일런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성이 말했다.
“날 알긴 아는군.”
‘당연한 말을….’
밀턴은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션 페일런.
이 남자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 취급도 못 받는다.
왜냐하면 그의 위명은 왕국을 넘어서 대륙 전체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레스터 왕국은 원래 군사력이 강하지도 않고 또 평화가 지속되어서 기사의 수준이 낮은 나라로 타국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레스터 왕국에도 딱 한 명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션 페일런 공작이다.
레스터 왕국에서 유일하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남자.
스스로의 실력만으로 공작의 작위에 오른 전설적인 인물.
레스터 왕국의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자 정점에 군림하는 이.
그게 바로 션 페일런 공작이었다.
‘어째서 페일런 공작이 내 앞에….’
밀턴의 입장에서는 듣기만 들었지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거물 중에 거물이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품평하고 있는 이 상황이 밀턴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의문 이전에 밀턴은 호기심이 더 강하게 들었다.
과연 마스터의 스텟은 어느 정도일까?
[션 페일런]
기사 LV.7
무력 - 95 통솔 - 65
지력 - 35 정치 - 15
충성 - 0
특성 - 호위, 감지, 신중
호위 LV.8 : 충성을 바친 상대를 호위할 때 전반적인 능력치가 상승한다.
감지 LV.7 : 육감이 발달하여 위험을 사전에 예측할 확률이 높아진다.
신중 LV.7 : 적의 매복이나 함정을 알아챌 확률이 높아진다.
전체적으로 호위와 경호에 특화된 기사로 보였다.
전쟁에서 활약하기보다는 중요한 요인을 지키기 위한 로열 가드 같은 특성이었다.
그 와중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무력이었다.
‘무력 95라.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군.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
밀턴이 알고 있는 최고의 강자는 제롬이었다.
그 제롬의 무력이 89였는데 그것보다 6이나 더 높다.
90대의 무력이라는 것이 실제 어느 정도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나하고 내 기사들이 모두 덤비면 승산… 아니 팔 하나라도 잘라낼 수 있을까?’
밀턴은 속으로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택도 없다는 것 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봐야 알겠지만 눈앞에 있는 페일런 공작은 진정한 초인이었다.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가 느껴졌다.
그런 페일런 공작이 릭을 보며 말했다.
“결투라… 한 20년 만에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나쁘지 않군. 좋아. 하지. 지금 할까?”
“아니… 저기 그게 그….”
릭은 평소 화통한 성격답지 않게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이래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는 법이지.’
밀턴은 그런 릭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충성스런 기사를 사지로 내몰 수는 없는 법.
밀턴은 직접 앞으로 나서서 중재를 했다.
“제 기사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주군….”
밀턴이 직접 나서서 사과를 하자 릭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페일런 공작은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릭을 보며 말했다.
“뭐, 이 자리에 온 목적은 저 친구 모가지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릭.”
“예. 주군.”
밀턴의 말에 릭은 감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릭에게 말했다.
“넌 저쪽에 가서 머리 박고 있어.”
“주… 주군?”
“머리 박을래? 대련할래?”
결국 릭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한쪽에 가서 머리를 박았다.
‘저 성질을 안 고쳐 놓으면 저 녀석 어디선가 굉장히 어이없는 이유로 단명할 것 같아.’
밀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페일런 공작을 바라봤다.
“제 기사의 무례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것 아니지.”
밀턴은 신중하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페일런 공작 각하께서 저에게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는지요?”
“최근에 자네한테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하더군.”
“예? …아. 예.”
밀턴은 아마도 리브라도 백작과의 마찰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런 밀턴에게 페일런 공작이 다짜고짜 말했다.
“내가 도와주지.”
‘무슨 화법이….’
너무나 직설적인 페일런 공작의 말은 듣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황당함을 불러 일으켰다.
“죄송하지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 무슨 이유?”
“저하고 일면식도 없는 공작 각하께서 저를 돕겠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유를 밝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밀턴의 말에 페일런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쯧, 요즘 젊은 애들은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지… 그냥 도와주겠다고 하면 알겠습니다, 하고 냉큼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공작 각하의 도움이라는 것이 저로서는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밀턴의 말에 페일런 공작은 잠시 고심하다가 말했다.
“내가 그냥 닥치고 따르라고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