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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41화 (41/257)

제41화

밀턴은 토미의 충성심이 오르는 것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제롬만큼의 능력은 없었지만 릭과 토미 역시 충직한 기사들이었다.

이들을 위해서라면….

‘내 체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밀턴은 리브라도 백작에게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상대가 재판을 걸었다고 해도 원하는 것은 배상금 따위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자존심으로 벌어진 분쟁.

그렇다면 이쪽에서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상대방도 만족할 것이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했지만 수족 같은 기사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밀턴이 그렇게 결심한 순간….

“주군,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밀턴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손님이라고? 누구지?”

수도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밀턴에게 손님이라니?

밀턴은 의아했지만 일단 손님을 맞이했다.

그리고….

“당신은?”

밀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을 맞이했다.

리브라도 백작은 자신의 서재에서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결투? 놀고 있네. 시골 귀족들은 너무 야만적이라서 문제야. 만사를 다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리브라도 백작은 밀턴의 결투 신청을 거절한 후에 수치심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우월감이었다.

밀턴이 리브라도 백작을 조사한 것처럼 리브라도 백작도 밀턴이 어떤 귀족인지 조사했다.

정보망이 밀턴보다 좋은 만큼 훨씬 더 자세하게 조사할 수 있었다.

영지를 이어받고 외국의 전쟁에 뛰어들었고, 귀국한 후에는 주변 영지와 영지전을 벌여서 영지를 확장한 것까지 모두 조사를 했다.

그리고 리브라도 백작이 밀턴에게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힘으로 만사를 해결하려고 하는 야만인.

가문의 빚을 갚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한다.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불사하고 적을 물리친다.

그런 힘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방식을 리브라도 백작은 눈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문벌 귀족인 리브라도 백작은 문제가 있다면 지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정 귀족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재판이었다.

정식으로 소송을 걸어서 적을 법정이라는 무대로 끌어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도록 빈틈없이 손을 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치 체스에서 적을 외통수로 몰아가듯이 하나씩 하나씩 퇴로를 막고 체크메이트를 불렀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우아하게 좋아하는 56년산 워터포트 왕국의 와인을 마시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적이 알아서 굴종하기를 말이다.

“이게 바로 귀족의 싸움이지. 천박하게 바로 칼부림부터 하려고 하다니….”

리브라도 백작은 느긋하게 밀턴의 항복 선언을 기다렸다.

그때….

“백작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리브라도 백작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지? 혹시 포레스트 백작인가?”

아무리 야만인이라도 상황을 파악할 머리가 있다면 슬슬 비굴하게 숙이고 들어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 포레스트 백작이 찾아왔습니다.”

집사의 말에 리브라도 백작은 역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는 와인을 기울이며 집사에게 말했다.

“흐음…. 그런가? 응접실, 아니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하라. 내가 업무가 바빠서 한 네 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군.”

느긋하게 와인을 기울이며 말하는 리브라도 백작에게 집사가 곤란한 듯이 말했다.

“저 그게….”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혼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백작과 함께….”

집사는 밀턴과 함께 온 손님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리브라도 백작은 혼비백산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분이 왜? 어서… 어서 응접실로 안내하라.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리브라도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재를 뛰어나갔다.

귀족은 뛰지 않고 항상 근엄하고 여유가 넘치게 걸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헐레벌떡 뛰어간 리브라도 백작은 자신의 저택을 방문한 장년의 남성을 볼 수 있었다.

그 젊은 남성의 옆에 기다리고 있던 밀턴이 있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케빈 리브라도, 왕국의 정당한 계승자인 1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다름 아니라 왕족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리브라도 백작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스카이트 폰 레스터.

이 레스터 왕국의 1왕자다.

잠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지금 레스터 왕국은 다음 왕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현 국왕은 64세의 고령으로 언제 양위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 밑에는 여러 왕자들이 있었지만 다음 왕위를 두고 다투고 있는 핵심 세력은 두 명이었다.

스카이트 폰 레스터 1왕자.

바이런 폰 레스터 2왕자.

사실 이 경쟁에 끼어들려고 했던 왕자들이 몇 명 정도 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째서인지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해 버렸다.

원래 왕실에 여덟 명이었던 왕자들 중에 지금 남은 것은 넷.

그중에 두 명은 아직 젖먹이 아기였다.

어떻게 된 건지는 뻔한 일이다.

왕위라는 달콤한 유혹이 골육상쟁의 비극을 일으킨 것이다.

지금의 1왕자는 원래는 3왕자였다.

하지만 그가 지금 1왕자가 된 것은 앞의 두 명을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치워버렸다.

한 명은 사냥터에서 사고로 석궁을 맞고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식중독으로 죽어 버렸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뻔한 사실이다.

현 국왕은 자식들의 골육상쟁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사실 현 국왕도 왕좌에 오르기 위해 형제들을 피의 제물로 바친 인간이었다.

왕위에 오르려면 형제를 혈육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 국왕의 생각이었다.

그는 자식들의 정당한 경쟁을 그저 방해하지 않고 지켜볼 뿐이었다.

최후의 승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그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연스런 묵인, 혹은 공인 속에서 왕위 다툼은 치열해졌고 지금은 1왕자와 2왕자가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경쟁을 하고 있었다.

두 왕자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서 휘하에 귀족들을 연신 영입하고 있었다.

지금 수도의 귀족들은 1왕자냐? 2왕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리브라도 백작은 다름 아닌 1왕자 파벌의 귀족이었다.

비록 1왕자를 지지한다고 해도 파벌 내에서 리브라도 백작의 위치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중간보다 조금 나은 정도?

그런 리브라도 백작의 앞에 파벌의 최대 수장이자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1왕자가 직접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 리브라도 백작이 이렇게 과장되게 영접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브라도 백작은 1왕자와 밀턴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1왕자를 상석에 모시고 가장 아끼는 와인을 가져와서 직접 따랐다.

“워터포트 왕국의 32년산 와인입니다.”

“호오? 좋은 걸 가지고 있군. 리브라도 백작.”

“감사합니다. 선친께서 남겨주신 유산인데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기꺼이 개봉하겠습니다.”

“고맙군. 아! 그런데 잔이 하나 모자라군. 포레스트 백작의 잔은 없나?”

1왕자의 말에 리브라도 백작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멀쩡한 표정을 하고 대답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잔이 하나 더 들어오자 리브라도 백작은 주변의 시종을 다 물렸다.

그리고 왕자는 잔을 내밀어서 자연스럽게 말했다.

“우선 한잔하지. 왕국의 내일을 위하여.”

왕자의 선창에 밀턴과 리브라도 백작은 잔을 들었다.

‘오? 쩌는 술인데?’

밀턴은 전생 현생을 통틀어서 고급 와인과 인연이 없었다.

워터포트 왕국의 와인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명품으로 불리며 귀한 취급을 받는 물건이다.

심지어 32년산이라면 표준 가격으로는 못 구한다.

아마 경매를 붙이면 2, 300골드 정도는 가뿐하게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밀턴의 혀에 와인이 달콤하게 감기는 이유는 이 ‘비싼’ 와인이 ‘리브라도 백작’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좋은 와인이군요. 훌륭합니다. 리브라도 백작님.”

“고맙군.”

“한 잔 더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기꺼이.”

1왕자의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리브라도 백작의 표정은 마치 자기 피라도 뽑아 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보니 밀턴은 통쾌한 기분에 미소가 절로 머금어졌다.

밀턴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훌륭한 와인이군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이었다.

와인의 질도 훌륭했다.

한 모금 머금으면 녹음이 우거진 숲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청량감과 향긋함이 심신을 황홀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비싼 와인을 마심으로 인해서 리브라도 백작의 혈압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생각 같아서는 병째로 나발이라도 불고 싶을 정도였다.

여유 만만한 밀턴과 달리 리브라도 백작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이 애송이가 전하와 같이 온 거지?’

밀턴이 와인을 홀짝거리는 광경을 보면서 리브라도 백작은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너무 뜻밖의 상황이라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도 그가 홈즈처럼 머리로 수많은 상황을 떠올리고 추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1왕자가 직접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둘 사이는 구면이라고 해야 할까? 초면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직접 보는 건 이게 처음이지?”

1왕자의 말에 리브라도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런데 내가 듣기로 지금 둘 사이에 사소한 마찰이 있다고 하더군. 사실인가?”

“그… 그게….”

리브라도 백작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1왕자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말을 꺼낸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기에 자신도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리브라도 백작을 보며 1왕자가 여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둘의 다툼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예. 그렇습니다.”

1왕자의 말에 대답한 것은 리브라도 백작이 아니라 맞은편에 있는 밀턴이었다.

밀턴은 와인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기사들 간에 사소한 시비가 붙었을 뿐입니다. 제 기사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별로 큰 다툼 같지도 않더군요.”

‘저 망할 놈이….’

밀턴의 말에 리브라도 백작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거야 밀턴의 기사들은 별로, 아니 전혀 다치지를 않았다.

하지만 리브라도 백작의 기사들은 최소 6개월 이상은 안정을 취해야 할 정도로 중상이었다.

때린 놈과 맞은 놈의 입장 차이가 이렇게 다르지만 리브라도 백작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아닙니다. 제 기사들은 크게 다쳤습니다.’라고 1왕자의 면전에서 말하면 그의 체면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문벌 귀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기사들이 약하다는 식의 말을 1왕자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과연, 사소한 일이었군.”

결국 리브라도 백작이 말을 하지 않자 1왕자는 밀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 버렸다.

그리고 1왕자는 리브라도 백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소한 마찰을 가지고 같은 식구끼리 싸워서야 쓰겠나? 자네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보를 하는 게 어떤가?”

1왕자의 말에 리브라도 백작은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진 듯했다.

‘같은 식구? 설마…. 그렇구나. 그래서….’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밀턴을 바라보자 밀턴은 리브라도 백작에게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 간교한 놈이….’

이 순간 리르바도 백작의 안에서 밀턴의 정의가 야만인에서 간교한 놈으로 바뀌었다.

완벽하게 외통수로 몰았다고 생각했다.

정치력이 떨어지는 시골 귀족 따위가 재판장에서 자신을 맞서서 법리적인 싸움을 하는 것도 정치적인 뒷공작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자신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바로 1왕자였다.

다른 권력자를 뒷배로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자신과 같은 파벌인 1왕자를 뒷배로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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