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대전의 문에 도착하자 시종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기사님들은 가실 수 없습니다.”
“여기서 기다려.”
“예. 주군.”
밀턴과 기사들이 떨어지자 시종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왕국의 충실한 신하, 포레스트 자작의 입장입니다.”
그러자 밀턴의 앞에 있던 문이 열렸다.
‘후우우… 갈까?’
밀턴도 조금 긴장되었다.
이 나라의 국왕을 만나는 것은 밀턴도 처음이었다.
대전의 붉은 카펫을 밟고 안으로 들어간 밀턴은 대전의 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후에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 왕국의 지존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밀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분이 우리나라의 왕인가?’
지긋한 연세를 드러내는 수염과 얼굴의 주름, 전형적인 노인의 인상이었지만 눈빛에 물러섬이 없었다.
사람을 다스리는 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위엄이 몸에 자연스럽게 베여 있었다.
밀턴은 순간 호기심이 들어서 국왕의 스텟창을 살폈다.
[오거스트 폰 레스터]
국왕 LV.7
무력 - 08 통솔 - 91
지력 - 70 정치 - 85
충성 - 00
특성 - 강압, 매수, 설득, 등용, 외교
강압 LV.8 :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계급이 낮은 자에게 강제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
매수 LV.7 :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유도한다.
설득 LV.7 : 뜻이 맞지 않는 상대의 의도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돌려놓을 수 있다.
등용 LV.5 : 자신의 목적에 맞는 인재를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외교 LV.3 : 타국과의 교섭에서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 뒤 협상한다.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스텟을 살펴본 밀턴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일단 통솔 능력치와 정치 능력치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30년 넘게 왕 노릇을 해 왔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통솔이나 정치에 비해서 지력이 70인 것은 오히려 낮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성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강압, 매수, 설득….
가장 높은 레벨의 특성 세 가지가 이것이었다.
가장 레벨이 높다는 말은 가장 많이 쓰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이 국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신하들을 때로는 강압적으로 몰아세우고 때로는 매수하고, 때로는 설득하며 조종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국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앞의 세 가지 특성에 비해서 국왕으로서 중요한 등용과 외교의 특성은 레벨이 크게 떨어졌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평범한 수준의 왕. 딱 그 정도인가?’
밀턴은 겉으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오거스트 국왕에 대한 평가를 그 정도로 확정 지었다.
오거스트 국왕은 밀턴을 향해서 무심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포레스트 자작.”
“말씀하십시오.”
“급진적으로 영지전을 벌여서 몇 개의 영지를 집어삼켰더군.”
‘추궁인가?’
꽤 직접적으로 다가서는 상대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밀턴은 고개를 숙이며 국왕에게 말했다.
“부끄러우나 상대편이 먼저 적의를 보이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는 자중하도록 하라.”
국왕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군.’
다음에도 영지전을 또 하면 중앙에서 직접 징계를 내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밀턴은 과장되게 머리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신(臣) 밀턴 포레스트. 국왕 전하의 명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음….”
밀턴이 복종적인 모습을 보이자 오거스트 국왕은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옥좌에서 일어나 밀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옆의 호위에게 검을 받아서 밀턴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을 백작으로 승작시킨다. 이는 레스터 왕국의 국왕인 나의 뜻이니라.”
국왕의 성정이 상당히 권위적이라는 것을 알아챈 밀턴은 최대한 바싹 엎드리는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불멸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렇게 밀턴의 승작식이 끝났다.
승작식이 비교적 간략하게 끝나서 밀턴은 두 가지 의미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하나는 복잡한 승작 절차를 거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
그런 거창한 절차는 바라지도 않거니와 하기도 싫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음험한 국왕의 눈에 자신이 아직 별것 아닌 시골 귀족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
이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지전을 당분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을 봐서는 이 이상 세력을 팽창시키지 말라는 거겠지.’
밀턴이 보기에 현 국왕은 자기 권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 방해물로 인식된다면 그 순간 국왕은 포레스트 영지에 손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막 발전의 발판을 마련한 밀턴에게 있어서 그런 귀찮은 짓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숙이고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다행이 그게 통한 듯 보였다.
“승작을 축하드립니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이제 백작님이군요.”
국왕과 알현을 마치고 돌아온 밀턴에게 기사들은 축하를 했다.
그리고 릭이 눈을 반짝이며 밀턴에게 말했다.
“국왕 전하를 직접 보셨습니까? 어떤 분이셨습니까? 역시 위엄이 대단하신 분입니까?”
기대감을 넘어서 환상을 품고 있는 릭을 보며 밀턴은 피식 웃었다.
위엄?
위험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위엄을 느끼지는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권력이라는 보물을 가지고 잔뜩 웅크려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곰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랬지. 위엄이 대단하셨어. 아직도 가슴이 좀 떨리는군.”
밀턴은 그냥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자신의 기사들뿐이다.
하지만 이 왕궁이라는 곳은 어디에 귀가 있고 눈이 있을지 모르는 일.
섣불리 진심을 입에 담을 정도로 밀턴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승작식도 끝났으니 이제 영지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아, 그 전에 내정 쪽 관료 몇 명을 채용해야지.’
밀턴은 오기 전에 맥스에게 들었던 부탁을 떠올렸다.
워낙 쉬운 일이라서 살짝 미뤄두고 있다 보니 잊어버릴 뻔했다.
사실 내정 쪽에 관료를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기사와 달리 행정 관료들의 경우 자리의 수가 정해져 있다.
아카데미에서 행정 과정을 수료한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국가 관료다.
가장 권력이 강하고 보수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안정적이다.
대한민국이나 레스터 왕국이나 공무원 철밥통은 항상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 관료가 되는 것이 안 된다면 귀족들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차선책이다.
그것도 안 되면?
어쩌겠는가?
좋은 교육 받은 청년 백수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밀턴이 알기로 수도에는 그런 인간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적당히 모집 공고만 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모일 것이다.
그렇게 순조롭게 수도의 일정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송이라고?”
“그렇습니다. 여기 내용을 보시겠습니까?”
수도의 관료가 가져온 서류를 확인해 보고 밀턴은 인상을 찡그렸다.
“리브라도 백작? 기사의 폭행? 설마 그걸 가지고 소송을 걸겠다고?”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기사들끼리 난투가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소송을 걸어?
‘뭐 하는 놈이지?’
차라리 결투를 걸어왔다면 이해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송이라니?
기사란 무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존재.
어디서 맞고 왔다면 솔직히 창피해서라도 그 사실을 숨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오히려 소송을 걸다니?
기사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당한 일을 당한 밀턴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우선 자신이 할 수 있는 대응책을 강구하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결투였다.
귀족 간에 서로의 명예가 손상되었다면 결투로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 것이 귀족들 간의 룰이었다.
신께서는 항상 정의로운 자의 편에 서시기 때문에 결투에서 승자가 된다는 것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결투의 패자는 승자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21세기 지구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밀턴에게 있어서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차피 명분일 뿐.
밀턴은 결투를 신청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자고 서신을 정했다.
하지만….
“주군, 리브라도 백작 쪽에서 결투를 거부했습니다.”
“젠장, 역시 그런가?”
릭이 가져온 소식을 들은 밀턴은 혀를 차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애당초, 결투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상대 쪽에서 소송 같은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고 먼저 결투를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송이라는 수단을 동원한 것은 그렇게 했을 때 이길 수 있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리라.
“주군, 잘은 모르겠지만 재판이 벌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크게 불리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릭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거야… 우리 쪽에 큰 잘못은 없지 않습니까? 저쪽에서 먼저 도발을 했고, 심지어 주군의 명예마저 모욕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격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지.”
“더구나 저쪽은 숫자도 많았고 중간에 무기도 뽑았습니다. 그런 놈 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제압했습니다. 재판으로 가도 우리가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릭은 단순한 성격답지 않게 생각을 많이 한 듯했다.
하지만 밀턴은 그런 릭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너희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무례했고, 너희들은 기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밀턴의 말에 릭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릭에게 밀턴이 말했다.
“하지만 재판까지 가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야.”
“예? 어째서….”
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밀턴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릭의 말은 상식과 기사도를 전제로 했을 때의 예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밀턴이 급하게 리브라도 백작가가 어떤 가문인지 알아봤는데 전형적인 중앙 관료 귀족이었다.
오랜 시간 수도에서 관료로 근무한 귀족이니 만큼 아마 법령도 빠삭하고 인맥도 상당할 것이다.
재판이 벌어지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리브라도 백작이 인맥을 살려서 재판관을 매수하면 밀턴은 눈 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쯧, 좀 곤란하게 되었군.”
밀턴이 혀를 차며 말하자 옆에 있던 토미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저의 실수로 주군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밀턴은 그런 토미를 향해서 말했다.
“그만, 그 일로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라.”
“하지만….”
“나는 이미 네가 한 일이 올바르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나에게 사과를 한다는 것은 내 판단이 틀렸다는 항명이냐?”
“아닙니다. 그건 결코….”
“그렇다면 그 일로 자책감을 가지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예.”
토미는 살짝 젖어든 목소리를 하고 대답했다.
밀턴의 배려심에 꽤 감동을 받은 것인지 이 순간 토미의 충성심이 85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