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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39화 (39/257)

제39화

트라이크는 상대의 수준이 뻔히 보였다.

아무리 궁술에 특화된 트라이크라고 해도 저런 애송이들은 얼마든지 두들겨 팰 자신이 있었다.

예전처럼 용병 신분이었다면 그냥 확 들이받아 버리고 다른 나라로 튀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사가 되어서 그럴 수도 없으니 그저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은 서둘러서 적당한 제복을 고르고 계산을 하려고 했다.

“다 해서 6골드입니다.”

“예?”

가격을 들은 릭은 깜짝 놀랐다.

한 벌당 2골드.

기사의 제복이라는 것이 이렇게 비싼 물건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밀턴은 충분한 돈을 주었지만 그래도 평생을 소박하게 살아온 릭에게 있어서 옷 한 벌에 이런 가격을 지불한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거의 갑옷에 필적하는 가격이잖아? 무슨 옷이….’

이해가 가지 않은 릭은 점원에게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그 가격 맞습니까? 너무 비싼데?”

그리고 릭이 이 말을 한 순간….

“푸하하하하….”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은 광대의 재롱이라도 본 것처럼 폭소를 터트렸다.

“비싸다고? 크큭… 고작 2골드짜리 제복이 비싸?”

“아… 배 아파.”

“남부 기사들은 적을 웃겨 죽이는 게 특기인가?”

그들의 조롱에 릭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점원은 릭에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본 점의 가격은 모두 정해진 정가입니다. 기사님.”

“알겠소. 지불하지.”

릭은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돈을 지불하고 빨리 가고 싶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서는 수도의 기사들이 계속 조롱을 했다.

“혹시 돈이 모자라지는 않나?”

“미리 말해 두겠는데 시골에서처럼 보리나 돼지 뒷다리로 지불하는 건 안 된다네.”

“크하하하….”

릭은 서둘러서 돈을 지불했고 세 명은 이제 이 불쾌한 공간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릭의 앞을 수도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지?”

“아니, 별것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

“대답하고 싶지 않다.”

릭이 거부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놈들은 가게의 문을 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비켜.”

릭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들은 히죽거리기만 할 뿐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아니, 그냥 질문에 대답해 주기만 하면 돼.”

“비키라고 했을 텐데?”

“질문에 대답하면 비켜주지. 아니면 내 다리 사이로 지나가도 좋고 말이야.”

릭은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큰 분노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분노와 더불어서 강한 실망감도 들었다.

‘이런 놈들이 기사라고? 아카데미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수도의 정규 기사들이 이런 놈들이라고?’

릭은 평민 출신의 기사였지만 소년 시절부터 샌슨에게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무용, 성실, 명예, 예의, 겸양, 약자 보호 등등….

꼬장꼬장한 성격의 노기사인 샌슨은 후배들에게 실력 이상으로 예의와 성품을 교육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릭은 이 세상의 모든 기사들은 당연히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하는 짓이 술 취해서 주정 부리는 시정잡배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게 수도에서는 기사라고 불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비켜. 그렇지 않으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릭이 폭발하려고 했지만….

“릭.”

이번에도 토미가 릭을 말렸다.

“토미, 넌 분하지도 않냐?”

릭이 역정을 냈지만 토미는 단호한 표정으로 릭을 가로막았다.

“여기에 뭐 때문에 왔는지 잊었냐?”

“크으….”

수도에 온 용무를 떠올린 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소란을 피워서 벌을 받는 건 상관없었지만 주군인 밀턴의 승작식을 망칠 수는 없었다.

릭은 인생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았고 토미가 릭 대신에 그들을 상대했다.

“질문이 뭔지 모르지만 분위기가 험악해지려고 하니 빨리하고 비켜 주시오.”

토미의 말에 상대는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아니, 별것 아니고 예전부터 믿을 수 없는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아! 물론 나는 믿지 않지. 믿지 않지만…. 그래도 자네들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서두가 길군. 빨리 말하기나 하시오.”

“음,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자네들 혹시 평민 출신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토미의 대답을 들은 상대 기사는 큰 목소리로 요란스럽게 말했다.

“이럴 수가? 정말이었어?”

“아카데미를 안 나온 것은 물론이고 평민 나부랭이가 기사가 된다고?”

“믿을 수가 없군. 혹시 남부는 마계인가?”

상대의 조롱을 들으면서 릭과 트라이크는 이를 갈았다.

‘이 새끼들을 진짜….’

‘죽일까?’

둘의 분노가 살의로 변해 가고 있었지만 토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질문에 대답했으니 비켜 주시오.”

“큭… 그래. 꺼져라.”

“이 가게도 이제 못 오겠군. 평민 따위하고 같은 곳을 이용할 수는 없지.”

그들은 비켜 주면서도 일행을 조롱했다.

그리고 일행이 가게를 거의 나가려고 했을 때….

한 놈이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포레스트 영지라고 했지? 영주라는 놈이 어지간한 병신인가 봐. 평민 기사를 뽑는 짓은… 커억.”

퍼어억!

놈은 그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먹이 날아와서 놈의 안면에 작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먹을 날린 사람은 성질 급한 릭도 아니고, 용병 출신의 트라이크도 아니었다.

“감히, 주군을 모독해? 네놈들 죽고 싶은 거냐!”

항상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던 토미가 주먹을 날린 것이다.

불같이 화를 내는 토미의 모습은 평소하고는 명백하게 달랐다.

사실 토미도 진작에 폭발하고도 남을 것 같은 상태였다.

“이 남부의 촌놈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버릇을 고쳐 주마.”

한 방을 맞은 수도의 기사들은 토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XX, 어떻게든 되겠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릭과 트라이크도 토미에게 가세했다.

“죽어라. 이 새끼들아!”

“뒤져!”

그렇게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죄송합니다. 주군.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다 마친 토미는 다시 한 번 고개 숙여서 사과했다.

“주군 토미도 참으려고 했는데 그게 놈들이 주군을 모독해서….”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군. 크로이 경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릭과 트라이크는 토미를 두둔했다.

그리고 밀턴은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지.”

“말씀하십시오.”

“설마하니 진 건 아니겠지?”

밀턴의 말에 세 명은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고 릭이 대답했다.

“5대3이었지만 박살을 내 줬습니다.”

“그러면 벌은 없다. 다들 나와.”

“옛!”

이 셋은 기사로서 주군의 명예를 위해서 싸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군주로서 이들을 꾸짖을 수 있을까?

‘당근 용서해야지.’

밀턴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었다.

밀턴은 기쁜 마음으로 보석금을 내고 기사들과 함께 돌아갔다.

“이 못난 것들! 그래서 이 꼴이란 말이냐?!”

중년을 넘어서 장년층에 가까운 나이의 남자 한 명이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 호통의 대상은 바로 눈앞에 있는 기사들이다.

사실 기사라고 하기에는 꼴이 좀 말이 아니다.

얼굴은 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어디가 부러졌는지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한마디로 꽤 중상인 것이다.

이 남자들이 바로 얼마 전에 의상실에서 토미와 그 일행에게 대판 깨진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앞에서 수염을 부르르 떨면서 분노한 남자의 이름은 케빈 리브라도.

작위는 백작으로 중앙 행정청에서 근무를 하는 전형적인 수도의 문벌 귀족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했고, 권위 의식이 높아서 다른 사람에게 얕잡아 보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귀족은 평민과 격이 다르다.

그리고 귀족들 중에서도 중앙의 관료 귀족이야말로 귀족 중에 귀족이다, 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다시 격을 나눠서 논할 정도로 그는 자존심이 강한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 높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자신의 기사들이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것이다.

사실 상황 자체는 폭행이 아니라 난투였다.

심지어 리브라도 백작의 기사들이 숫자도 많았다.

하지만 폭행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은 정말 비참할 정도로 완벽하게 깨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사들은 어디 최소한 반년 정도는 정양해야 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는데 상대편은 멀쩡했다.

기사라 함은 귀족에게 있어서 무력의 상징이자 척도이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기사가 다른 귀족의 기사들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 뻔했다.

리브라도 백작에게 더욱더 열 받는 것은 상대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시골 귀족 나부랭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디 소속이라고 했더냐?”

“포… 포레스트 영지라고 했습니다.”

“빌어먹을, 남부 끄트머리에 있는 촌놈들한테 졌단 말이냐? 그것도 네놈들이 숫자도 많은데?!”

리브라도 백작의 꾸중에 기사들은 몸만 움찔하며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설마 그렇게 강할 줄은….’

‘제길, 어떻게 아카데미도 안 나온 촌놈들이 왜 그렇게 강한지….’

‘이게 무슨 망신이야?’

이들은 이해를 할 수 없겠지만, 아카데미라고 해도 다 똑같은 아카데미가 아니다.

평화로운 레스터 왕국의 기사 아카데미라고 해 봐야 수준은 뻔하다.

교사진도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학생들 역시 배움에 열정이 높지 않았다.

지금 레스터 왕국의 아카데미 기사부라는 것은 귀족의 자제들이 그저 의례적으로 입학해서 시간만 채우고 졸업장을 받아오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비해서 릭과 토미는 유년 시절부터 꼬장꼬장한 샌슨에게 엄한 교육을 받고, 그 후에 밀턴을 따라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전쟁에도 참전했다.

오랜 세월동안 용병으로 구르며 실전에 다져진 트라이크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셋의 경험치는 이런 온실 속 화초 수준의 기사들과는 격이 다르다.

본인들은 인정할 수 없겠지만 장담컨대 100번 싸우면 100번 다 질 것이다.

하지만 리브라도 백작은 그런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라의 실권을 움직이는 중앙의 관료 귀족인 자신이 고작 남부의 촌구석 귀족에게 밀린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포레스트 영지라…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리브라도 백작은 즉시 포레스트 영지의 귀족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잠시 트러블이 있기는 했지만 밀턴은 자신의 원래 목적에 충실하기로 했다.

왕궁에 입궁 신청을 하고 차례를 기다린 다음 날짜를 배정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왕궁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그리고 왕실의 대기실에서 밀턴은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알현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심심했는지 트라이크가 질문을 했다.

“원래 왕궁에 들어가는 절차가 이렇게 복잡한 겁니까?”

“뭐, 귀족 따라서 다르지. 좀 높으신 양반은 이렇게 복잡한 절차는 대부분 생략할걸?”

“과연, 아직 영주님의 위치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그런 거군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트라이크에게 밀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좀 상냥하게 말하면 안 되나?”

“원래 제 말투가 이런 걸 어쩌겠습니까? 그냥 이해해 주십시오.”

“하긴….”

밀턴도 트라이크에게 강제로 기사의 예법을 주입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런 사소한 문제로 꼬장을 부리기에는 트라이크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궁술의 가치가 너무 컸다.

능력이 확실한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의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 주는 융통성 정도는 있었다.

“제롬이나 샌슨 앞에서는 그래도 좀 조심해.”

“아아… 그 영감님… 진짜 포기를 모르시더군요. 나라는 놈은 예의하고 담 쌓은 놈이니 포기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샌슨이 한 꼬장 하지.”

포레스트 영지의 원로 위치에 있는 샌슨은 실력을 떠나서 성품이나 예의에 관해서는 기사의 거울이라고 할 정도로 똑 부러진 남자였다.

그런 그는 요즘 들어서 트라이크에게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 실력은 좋지만 예의가 부족한 기사에게 절도와 예의를 주입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남은 평생의 숙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트라이크는 샌슨의 기척만 났다 하면 기겁을 했다.

“주군이 어떻게 좀 해주면 안 됩니까?”

“글쎄? 그런 부분은 내 말도 안 들을걸?”

밀턴의 말에 릭과 토미는 과연 그럴 것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으응… 영지로 돌아가기 싫어지네요.”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는 사이에 밀턴의 차례가 되었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 안으로 들어오시오.”

“예.”

밀턴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서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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