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38화 (38/257)

제38화

포레스트 영지에서 레스터 왕국의 수도 로렌시아까지의 거리는 말을 몰아서 빠르게 이동하면 일주일 정도였다.

하지만 기사 세 명과 병사 스무 명을 대동하고 이동하는 밀턴의 경우 이동 속도가 더 느렸다.

대략 열흘 정도가 걸려서 로렌시아에 도착하자 가장 반가워한 것은….

“이야… 여기가 로렌시아구나. 살다 보니 수도에도 와 보네.”

밀턴의 충직한 기사 중에 한 명인 릭이었다.

릭은 수도에 관해서 강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라고 해도 평생을 포레스트 영지에서 나고 자랐기에 수도가 어떤 곳인지는 그저 소문으로 듣는 게 다였다.

건물은 크고 길은 깔끔하고 황금 장식이 사방에 널렸으며 사람들은 세련되고 남자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여자들은 모두 미인이더라…

같은 허풍 섞인 그런 소문 말이다.

그렇게 살아온 릭에게 있어서 수도에 왔다는 건 꽤 감개가 무량한 느낌일 것이다.

“어? 저건 뭐지? 물이 뿜어져 나오는 샘이 있는데 마셔도 되는 건가?”

내버려 두면 분수의 물을 마실 것 같은 릭이었다.

밀턴이 말리려고 했지만 그 전에 토미가 나섰다.

토미는 릭의 뒷덜미를 잡아채 말리며 말했다.

“촌놈 티 좀 내지 마. 이 곰탱이야.”

으르렁거리는 토미에게 릭이 당당하게 말했다.

“뭐 어때? 촌에서 왔으니 티 나는 건 자연스러운 거지. 안 그래?”

“너는 몰라도 주군의 위상에 흠이 간다. 이 멍청한 뇌 근육아.”

“아….”

토미의 말에 릭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그만….”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밀턴은 사과하는 릭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릭은 이제부터라도 실추된 주군의 명예를 바로잡겠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목에 힘을 주며 정면을 응시했다.

최대한 근엄하고 위압감 있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밀턴은 그런 릭을 보고 생각했다.

‘차라리 좀 전이 나은데?’

자세를 바꾸자 훨씬 더 촌놈 티가 팍팍 나는 릭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릭을 보며 피식 하며 웃는 게 훤히 보였다.

‘뭐 어쩔 수 없지.’

밀턴은 그냥 체념해 버렸다.

사실 이건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단순한 릭은 물론이고 꽤 신중한 편인 토미 역시 잠시도 쉬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감탄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수도에 처음 올라와 본 시골 기사였다.

그나마 용병 활동을 하며 대도시를 많이 다녀본 트라이크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큰물도 한 번은 겪어 보는 게 좋겠지.’

밀턴이 릭과 토미를 데리고 온 것은 그동안 열심히 수고한 것에 대한 나름의 보상이기도 했다.

이 둘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포레스트 가문에 충성을 다해 온 기사들이니 말이다.

‘이 둘의 취향이 수도에 맞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과거 아카데미에서 기사 교육을 받기 위해서 수도에 머물렀던 밀턴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수도에서 적응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짜증나는지를 말이다.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밀턴은 여관으로 이동해서 여관을 통째로 빌렸다.

보통 권세가 있는 귀족이라면 수도에 저택을 따로 두고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포레스트 가문은 그렇게 권세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트러블이 일어나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밀턴은 여관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을 머물게 하며 릭과 토미 그리고 트라이크에게 돈주머니를 주며 말했다.

“돈을 줄 테니 수도에 가서 기사 제복을 구입해 입어라.”

“어? 제복 말입니까? 왜 말입니까?”

릭이 순진하게 물어보자 밀턴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수도에 머무는 동안 너희는 계속 날 호위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국왕 전하를 만나기 위해서 왕궁에 들어갈 때도 있고, 다른 귀족과 만날 때도 있겠지. 그럴 때 격식에 맞는 옷이 아니면 동행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아아… 그렇군요.”

릭은 과연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고 그 옆에서 토미와 트라이크도 그러고 보니, 라는 표정을 지었다.

셋 다 이런 경우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모양이다.

“그럼 명령하신 대로 제복을 구입해 오겠습니다.”

“그래. 어디 들렸다 와도 상관없지만 저녁때까지는 돌아오도록.”

“옛. 주군.”

그렇게 세 명의 시골 기사는 기사 제복을 구입하기 위해서 여관 밖으로 나갔다.

밀턴은 그런 세 명의 뒷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촌놈 티 내다가 사고 치지는 않아야 할 텐데 말이야.”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여관에서 마음 편하게 쉬고 있는 밀턴에게 수도의 경비대가 찾아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포레스트 자작님. 자작님의 기사들이 난투극을 벌여서 신병을 구금 중입니다.”

“…뭐?”

어이없이 되묻는 밀턴에게 경비대원이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가셔서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기사분들의 신병을 인도받기 위해서도 오셔야 합니다.”

밀턴은 어이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장서라.”

“예. 알겠습니다.”

밀턴은 경비대를 따라 이동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난투? 도대체 왜?’

제복을 사러 보낸 기사들이 난투를 벌였다?

술집에 가서 술이라도 마셨다면 혹시 모를까?

의상실에서 무슨 이유로 난투극을 벌인다는 말인가?

‘일단 가서 들어보면 알겠지.’

시시한 이유로 싸웠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밀턴이었다.

밀턴이 경비대원을 따라서 이동하자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릭, 토미, 트라이크, 이 세 명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감옥 속에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밀턴이 엄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토미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그만….”

의외의 상황에 밀턴은 깜짝 놀랐다.

“토미 네가? 릭이나 트라이크가 아니고?”

밀턴으로서는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토미는 꽤 신중한 성격이었다.

앞으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한발 뒤로 물러나서 조용하게 뒤를 받쳐주는 스타일의 남자였다.

사실 여기 오면서 사고를 쳤다면 80퍼센트 이상 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 20퍼센트의 가능성은 트라이크라고 생각했고 말이다.

그런데 설마 토미가 사고를 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녀석이 괜히 사고를 칠 리는 없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일단 자초지종부터 듣기로 했다.

“예. 사실은 의상실에서….”

***

원래 기사라면 공식 석상에서는 제복을 입는 법이다.

하지만, 포레스트 영지에서 평민으로 태어나 기사로 서임 받은 이 둘은 갑옷은 입어도 제복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생전 처음으로 기사 제복을 구입하는 일에 릭은 마음이 들떠 있었다.

의상실에 들어가서 걸려 있는 제복들을 보며 릭은 어린애처럼 흥분했다.

“이야, 종류가 이렇게 많아?”

“너무 대놓고 흥분하지 마라.”

“뭐 어때? 지금은 주군도 없으니 내가 촌놈 티 좀 낸다고 문제도 없잖아?”

“우리가 쪽 팔린다. 안 그렇습니까? 로우 경.”

참고로 로우 경이라는 것은 트라이크가 기사 서임을 받으면서 밀턴에게 받은 성이었다.

트라이크 로우.

그게 기사로서 트라이크가 받은 이름이었다.

“뭐, 그냥 그러려니 합시다.”

사실 트라이크도 기사 제복은 처음이었다.

갑옷이라면 몰라도 용병이 기사 제복을 입을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거봐. 로우 경은 괜찮다고 하잖아?”

“이건 괜찮다는 반응이 아니고 포기하자는 반응이다. 이 곰탱이야.”

“잔소리 좀 그만해. 이 쫌생이야.”

릭과 토미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기에 둘만 있으면 어차피 항상 투닥거리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상실에서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행동이 거슬리는 자들이 있었다.

“조용히 좀 하지? 여기가 시장 바닥도 아닌데 품위 없이 뭐 하는 거지?”

누군가가 나서서 릭과 토미에게 지적을 했다.

거기를 돌아보니 몇 명의 기사들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같은 기사라고 해도 평민과 다름없이 간소한 옷을 입은 세 명과 달리 그들은 굉장히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룩 하나 없는 제복에 머리에는 깃털 장식이 되어 있는 모자를 쓰고 허리에 매고 있는 검의 손잡이에는 장식까지 화려하게 되어 있었다.

토미는 그들을 향해서 담담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변명 없이 깔끔하게 사과를 하는 토미의 반응에 상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보아하니 지방에서 올라온 모양이군. 수도는 처음인가?”

말을 거는 기사의 태도는 대등한 기사를 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무례했다.

그리고 뒤편에 같은 일행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에서 노골적인 경멸과 조소가 드러나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그런 모습 말이다.

‘이것들이….’

성질이 급한 릭이 순간 울컥했지만 옆에서 눈치가 빠른 트라이크가 그런 릭의 소매를 잡아서 말렸다.

수도에서 소란을 피우면 자신들이 벌을 받는 건 물론이고 주군인 밀턴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영지에서 왔습니다.”

트라이크가 릭을 말리는 사이 토미는 자신이 앞으로 나서서 말을 받았다.

“포레스트…? 그게 어디 있는 곳이지? 우리나라가 아닌가?”

밀턴이 최근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해도 그건 남부 지방에서의 일이다.

수도에서 포레스트 자작가는 아직 무명에 가까웠다.

“남부 지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토미가 포레스트 영지를 다시 소개한 그 순간….

“남부? 남부라고?”

“하하하하하.”

“파하하하하하하.”

상대 기사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 무례한 태도에 릭은 물론이고 토미나 트라이크도 얼굴이 붉어졌다.

트라이크가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아아… 미안하군. 사실 살면서 남부 촌… 아니 남부 기사를 보는 건 처음이라서 말이야.”

“입고 있는 옷이 그래서 한미한 가문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큭, 그래도 남부에서 왔다니.”

레스터 왕국은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온 나라다.

그 평화의 세월 동안 권력이 중앙에 집결되었고, 자연스럽게 수도의 귀족이나 기사들은 지방의 기사나 귀족을 깔보는 습관이 생겼다.

밀턴도 과거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면서 그런 차별을 많이 겪었다.

이제 놈들의 태도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주운 악동같이 변했다.

“난 살면서 남부에 기사가 있다는 말도 처음 들어보는군. 자네들 아카데미는 어디서 수료했나?”

그들의 질문에 릭은 퉁명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응? 대답 안 하는 걸 보면 혹시 아카데미에 다녀보지 못한 건가?”

“…….”

그 말에 릭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러자 상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이마에 손을 올리며 과장되게 말했다.

“이럴 수가. 정말 아카데미를 다녀 보지도 않았나?”

“아카데미를 수료하지 않아도 기사가 될 수 있다니? 남부는 굉장히 편한 곳이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건 성질 급한 릭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이 받을 만했다.

“지금 시비….”

당연히 릭이 폭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릭, 참아.”

토미가 그런 릭을 작은 목소리로 말렸다.

“하지만 저 인간들이….”

“주군의 승작식을 망칠 생각이냐?”

“…….”

결국 릭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말도 섞기 싫으니 완전히 무시해 버리겠다는 태도였다.

“응? 덤비려고 한 것 아닌가?”

“이거 아쉽군. 남부의 검이 얼마나 매서운지 한번 겪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카데미에서 배운 적도 없는 검술 말이지.”

“하하하하하하.”

그런 놈들의 모습에 릭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트라이크는 처음으로 기사가 된 것을 후회했다.

‘감히 전쟁도 겪어보지 못한 애송이들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