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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37화 (37/257)

제37화

선입견이라는 것은 정말 높고 두꺼운 장벽이었다.

아무리 궁술이 뛰어난 걸 증명한다고 해도 궁술은 궁술일 뿐.

오러를 뽑아내며 저돌적인 돌격을 하며 적을 유린하는 기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 세계에서 신기에 가까운 궁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밑에 두면 유용하겠다 싶어서 영입 제의를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보통 병사보다 봉급을 세 배 더 주지. 어떤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궁수에게는 파격적인 조건이지.]

[백작님의 제의를 거부하다니? 고작 궁수 따위가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하지만 그중에서 누구도 트라이크의 진짜 가치를 인정해주는 자들은 없었다.

그래서 트라이크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귀족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차라리 평생 용병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롱보우 용병단은 그런 마음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 후에도 이름을 날리다 보니 몇몇 귀족들이 제의를 해 왔지만 그때마다 트라이크는 말했다.

[기사 작위를 주면 한번 생각해 보겠수다.]

그 말을 받아들인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궁수 나부랭이에게 기사의 작위라니?

기사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신분이기도 했다.

귀족에 준하는 신분으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트라이크가 기사 작위를 요구할 때마다 욕을 하며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트라이크 역시 뒤돌아서 ‘너희들 손해지.’라고 말하며 코웃음을 쳤었다.

저런 귀족들 따위한테 봉사하느니 그냥 자유롭게 용병으로 평생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분명 그렇게 다짐했을 터였다.

그런데….

“응? 자네 왜 우나?”

“아… 아닙니다. 이건 그러니까….”

트라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상황 그대로 눈물이 나게 기쁘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일 것이다.

그런 트라이크를 보며 제롬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무례하기만 한 인간은 아니군.’

사실 제롬도 트라이크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던 배가 어느 날 갑자기 등대의 불빛을 발견한다.

이리 오라고.

여기가 바로 네가 있을 곳이라고.

그렇게 환한 빛을 비추어 준다.

제롬도 밀턴에게 겪었던 일이었다.

기사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복수를 위해서 용병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은 기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깨우쳐 준 것이 바로 밀턴이었고 제롬은 그런 밀턴을 평생의 주군으로 삼았다.

그때의 감격, 환희, 결의.

그 모든 것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었다.

그 감격을 지금 트라이크는 겪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트라이크는 눈을 부릅뜨고 밀턴에게 말했다.

“정말로 저를 기사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한입으로 두말하는 취미는 없네.”

“그렇다면 앞으로 포레스트 자작님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마침내 트라이크는 완벽하게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이 순간 밀턴에게는 한 가지 메시지가 떠올랐다.

[각성 특성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각성 LV.4 : 인재를 각성시켜서 정신적으로 능력을 끌어올리며, 충성심을 상승시킨다.]

‘어째 심하게 감동한다 싶더니… 특성이 제대로 터졌던 거였군.’

밀턴은 흐뭇하게 웃었다.

트라이크가 충성을 맹세한 순간 그의 스텟에 0이었던 충성심이 82로 올라갔다.

‘좋았어! 아… 그런데….’

트라이크를 자기 신하로 손에 넣었지만 밀턴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자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직 세 번째 조건은 말 안 하지 않았나?”

“아…?”

그제야 조건을 세 가지라고 한 것이 기억난 트라이크였다.

그는 머쓱한 표정을 하고는 밀턴에게 말했다.

“사실, 조건은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세 가지라고 했나?”

“그게 보통 이럴 때는 세 가지라고 하잖습니까? 그래서 그냥 뭐 분위기상….”

“…….”

실력은 진국인데 사람이 허당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티끌 모아 태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냐고 하면, 지금 포레스트 영지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원래 포레스트 영지는 레스터 왕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남부 지방을 자리하고 있는 소규모 영지일 뿐이었다.

그리고, 남부 지방 자체가 비슷비슷한 체격의 중소 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레스터 왕국의 중앙에서는 귀족들끼리 출신을 물을 때 남부에서 왔다고 하면 은근히 촌놈 취급을 받을 정도다.

하지만, 그 작은 영지도 몇 개가 병합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먼저 단 한 번의 전투로 하먼 자작령을 집어삼키고, 그 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로스와이 자작령을 통합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남부 지방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중견급 귀족인 로스케이즈 백작과 일전을 치러서 쓰러트리고, 이제는 무려 네 개의 영지를 통합해 버린 것이다.

지금 밀턴이 상태창에서 포레스트 영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영지 - 포레스트 영지.

인구 - 48,910명.

자금 - 17,500골드.

주요 생산품 - 밀, 보리, 귀리, 목재, 모피, 양모, 말, 치즈.

개발 가능 - 구리 광산, 항구.

군사력 - 기사 15인, 수습 기사 50인, 기병 200인, 보병 1,500인. 궁병 500인.

일단 영토나 인구만 놓고 생각해도 이건 도저히 일개 자작령의 영지가 아니다.

영지가 커진 만큼 밀턴은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수습 기사들을 정식 기사로 승진시키고, 그 밑에 수습 기사도 충원했다.

영지가 커진 만큼 병사의 숫자를 더 늘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는 순수 정규 병력만 2,000 이상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통합된 영지에서 나오는 주요 생산품도 밀턴에게는 행복한 고민거리였다.

원래 포레스트 영지는 순수한 농업 영지로 곡물 말고는 생산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영지와 병합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먼 자작령은 꽤 넓은 숲을 가지고 있었기에 거기서 나는 목재와 모피가 있었다.

그리고 로스와이 자작령에서는 양을 많이 키워서 그 양모가 특산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로스케이즈 백작령은 목축이 크게 발달해서 소와 말 등을 많이 키우는 곳이었다.

그래서 치즈를 가공해서 상단과 거래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혈통이 좋은 준마가 가득한 목장을 가지고 있었다.

준마는 돈이 되는 물건이다.

혈통 좋은 말을 잘 키우면 상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이 세계에서 말은 엄연한 군사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전력이기 때문이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밀턴은 최근에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개발 가능 항목에 있는 구리 광산과 항구.

특히 항구로서의 개발 가능성은 굉장히 큰 이득이었다.

구리 광산을 먼저 개발해서 거기서 나온 돈으로 항구를 개발하면, 그 후에 기술자를 불러서 풍부한 목재로 배를 만들 수 있다.

거기다 항구를 만들어서 무역항으로 성장시킨다면….

“완전 대박이지.”

밀턴은 자신의 계획서를 보면서 크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은 항상 머릿속을 장밋빛으로 만들며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다만, 현실적으로 상상을 실행시키려면 약간의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역시 돈이 좀 부족하단 말이지.”

지금 밀턴의 보유 자금은 17,000골드를 넘는다.

예전에 밀턴이 졌던 빚을 다 갚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한 자금이다.

하지만 포레스트 영지의 덩치가 커짐에 따라서 들어가는 유지비도 많았다.

계획의 가장 첫 걸음인 구리 광산 개발부터가 영 쉽지가 않았다.

기술자를 불러서 광맥을 찾고, 광산을 만들기까지 들어가는 돈은 장난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 나 혼자서 일을 벌일 수는 없겠지.’

밀턴은 순순히 지금의 자금 상황으로는 광산 개발이 무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밀턴의 영지 운영 기조는 기본적으로 안전하게 가자는 것이었다.

항상 30퍼센트 정도의 여력을 남겨두고 영지의 일을 추진하고자 하는 게 밀턴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도박을 하듯이 광산 개발에 자금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결국 지금 밀턴에게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장기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제 영지의 규모가 늘었으니 천천히 돈을 모아서 자금을 확보한 후에 계획을 진행하는 것.

위험 부담은 적지만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두 번째는 단기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만으로 일을 도모하기 힘들다면 외부에서 투자자를 모아서 자금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지 안에 광맥이 있다는 것을 찾아서 공표하기만 하면 투자자는 쉽게 모일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면 앞으로 밀턴이 이룩하는 모든 일에 외부에서의 간섭이 끼어들 수 있었다.

‘그건 좀 내키지 않지. 역시 좀 시간이 들여도 천천히 일을 진행하는 게 낫겠어.’

장기적, 단기적, 두 가지 계획을 두고 고민하던 밀턴은 시간을 좀 들여서라도 자력으로 영지를 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품 안에 보물을 두고 썩히는 기분도 들었지만 훗날 잡음이 생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대외적인 활동은 그만두고 내부 정돈에 힘을 쓰자.’

밀턴은 거대화된 포레스트 영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밀턴 본인이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해도 주변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주님. 왕실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집사가 가져온 한 장의 서신에 밀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리 주게.”

편지를 받아서 내용을 확인한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하는군.”

편지의 내용은 최근에 연이은 영지전으로 영지의 규모가 커진 포레스트 영지를 이대로 둘 수 없으니 포레스트 자작가의 작위를 백작가로 승작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승작식을 위해서 수도로 올라오라는 명령도 같이 적혀 있었다.

“지금 한창 바쁜 시기인데. 그래도 어쩔 수 없나.”

밀턴은 당장 가신들을 소집했다.

“축하드립니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밀턴이 작위 승작을 위해서 수도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하자 가신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축하했다.

밀턴은 웃음으로 그들에게 화답한 후에 본론을 꺼냈다.

“수도로 가기는 가야 하는데 같이 갈 사람을 정하지. 우선, 제롬.”

“기꺼이 보필하겠습니다. 영주님.”

“아니, 자네는 남아주게.”

밀턴이 남으라고 하자 제롬은 당황했다.

“저는 영주님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전쟁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수도에서 내가 물리적으로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그보다 자네가 빠지면 기사단의 훈련은 어떻게 하나?”

제롬은 밀턴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확실히 기사단의 훈련도 막 물이 오른 터이니… 주군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좀 나중의 일이지만 지금 둘의 대화를 전해 들은 기사단은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제롬의 훈련은 말 그대로 신체적 지옥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도 호위를 데리고는 가야 합니다.”

제롬의 말에 밀턴은 미리 생각해둔 이름을 말했다.

“릭과 토미, 그리고 트라이크까지. 이렇게 셋을 대동하지.”

밀턴의 말에 제롬은 적절한 인선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릭과 토미는 오랫동안 밀턴을 모셔온 고참 기사였고, 트라이크의 실력은 제롬도 믿을 만했다.

“내가 없는 동안 영지의 치안은 제롬이 처리하고, 내정은 맥스가 맡는다. 다른 질문 있나?”

밀턴의 말에 맥스가 손을 들었다.

“말하라.”

밀턴이 발언권을 주자 맥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지가 커지면서 행정청에 인원이 너무 부족합니다. 가능하면 수도에서 관료 교육을 받은 인재를 등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그러고 보니 군사력의 증강에는 신경을 쓰면서 내정 쪽의 인재 증원은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군.’

밀턴은 맥스에게 살짝 미안해졌다.

사람을 안 붙여 준 것은 아니었지만 밀턴이 가장 믿을 만한 행정관이 맥스였기 때문에 내정의 중요한 일 대부분은 맥스를 거치고 있었다.

지금 포레스트 영지의 규모를 볼 때 명백한 업무 과다였다.

밀턴 자신도 전생에 무리한 업무로 과로사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맥스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인원은 얼마나 필요한가?”

밀턴이 자신의 말을 순조롭게 들어주자 맥스는 안도하며 말했다.

“가능하면 다섯 명. 아니 세 명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수도에 가서 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

밀턴은 그렇게 말하며 가신들에게 말했다.

“내일 당장 출발하겠다. 내가 없는 동안 영지를 잘 부탁한다.”

그렇게 밀턴의 수도행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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