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36화 (36/257)

제36화

무력 수치만 해도 79였다.

궁수라고 해서 무력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밀턴에게는 뜻밖의 대박이었다.

지금 익스퍼트인 밀턴의 무력이 72.

그러니까 순수한 무력 수치만 놓고 보면 익스퍼트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지?’

밀턴은 의아했다.

상대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절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마 검을 들고 싸우면 틀림없이 밀턴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무력 수치가 높은지는 상태창의 특성을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원시, 저격, 속사.

가지고 있는 특성 세 가지가 모두 궁술에 연관된 것이었다.

즉, 이 남자는 오러를 연공해서 익스퍼트에 오르는 대신 궁술을 꾸준하게 연마해서 신기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군주의 권능이라는 시스템이 판단하기에 그 경지를 무력으로 환산한 것이 바로 79라는 수치였다.

익스퍼트를 능가한다고 판단될 정도의 무력을 순수하게 궁술만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범상치 않은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이 수반되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군. 이미 비슷한 경우를 한 번 본 적도 있고 말이야.’

밀턴은 자신의 행정관인 맥스를 떠 올렸다.

맥스의 지력은 77이다.

꽤 높은 편이지만 전쟁터에 책사로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지식과 경험이 내정 방면으로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맥스의 지력이 높다고 해도 막연하게 전쟁터에서 책략을 짜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이 권능이 대단하다고 해도 여기는 게임 속의 세상이 아니다.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 있고, 저마다의 개성이 있으니….’

밀턴은 자신의 능력에 관해서 조금 더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밀턴에게 트라이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뭐 하쇼?”

감옥에 가둬져 있는 자신에게 밀턴이 나타난 것은 놀랍지 않았다.

‘역시 졌구나. 그런데 내 생각보다 빨리 졌네.’

이미 전쟁의 승패를 예상하고 있었던 트라이크였기 때문에 밀턴이 승자가 되어서 자신의 앞에 나타날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밀턴이 자신을 보고 탄성을 지르더니 그 후에는 자기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렇군.’이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트라이크가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X됐다. 이거 설마 미친놈은 아니겠지?’

지극히 합당한 의심이었다.

그리고 미친놈이 자신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자 몹시 불안해진 트라이크였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뭐 하쇼?”

“이놈! 감히 주군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트라이크의 말에 답을 한 것은 밀턴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호위 기사인 제롬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제롬의 기세에 압도당해서 기가 죽겠지만….

“아니,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말도 안 하고 있으니 한마디 했는데 그게 뭐 불만이요?!”

하지만 트라이크도 한 성깔 하는 인간이었다.

도로 따져 묻는 트라이크에게 제롬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예의를 갖춰라. 네 눈앞에 있는 분이 누구이신 줄 아는 거냐?”

“누구긴? 나한테 화살 맞고 말에서 떨어진 분이지.”

“감히…!”

이제 제롬은 당장 감옥 안에 들어가서 트라이크를 두들겨 팰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밀턴이 손을 들어서 제롬을 제지했다.

“괜찮다. 제롬.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주군….”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다.”

밀턴이 그렇게 말하자 제롬도 일단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밀턴은 미소를 지으며 트라이크에게 말했다.

“멀뚱멀뚱 쳐다봐서 미안하군. 내 얼굴에 화살을 맞힌 남자를 보는 게 처음이라서 말이야. 좀 신기하더군.”

“…….”

트라이크는 의외라는 듯이 밀턴을 바라봤다.

이제까지 트라이크가 접해본 귀족이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오만하고 평민을 깔보는 인간이었다.

선천적으로 삐딱한 성격을 타고난 덕분에 그런 귀족들에게 아부하지도 못하고 항상 마찰을 만들어 왔다.

좀 심할 때는 귀족 모독죄니 어쩌니 하면서 죽을 뻔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트라이크의 사전에 귀족이라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과는 맞지 않는 천적 같은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물며 지금은 상황도 최악이다.

자신은 감옥 안에 있고 눈앞에 있는 귀족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죽을 뻔했다.

그런데….

‘왜 이 귀족은 나한테 적의를 보이지 않지?’

적의라기보다는 오히려 호의적인 감정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트라이크는 의심이 들면 바로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밀턴에게 말했다.

“왜 화를 내지 않는 거요?”

“왜 화를 내야 하는 건가?”

밀턴의 태연한 물음에 트라이크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야…. 내가 자작님을 죽이려고 했지 않습니까?”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지. 전쟁이 끝났는데 원한을 남겨서 뭐 하나?”

“그럼… 지금 제가 자작님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것은요? 옆에 기사 나리는 눈빛으로 절 찢어 죽이려고 하는데?”

“음, 이 친구가 좀 충직하지. 나는 별로 개의치 않으니 신경 쓰지 말게.”

밀턴의 태연한 대꾸를 들으며 트라이크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굉장히 특이한 귀족이군요.”

“천성이 이런 거지.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 내가 뭘…요.”

“보통 용병이라면 귀족을 앞에 두고 너처럼 태연하게 행동하지는 않아. 더구나 지금처럼 상대가 자기 목숨 줄을 쥐고 있을 때는 더 그렇지.”

“으음… 나도 천성인가 봅니다.”

“잘됐군. 그럼 별난 인간들끼리 모여서 얘기 좀 해볼까?”

밀턴은 그렇게 말하면 감옥에서 트라이크를 꺼내주고 응접실로 이동했다.

제롬은 밀턴을 향한 트라이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도 주군인 밀턴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응접실로 이동한 밀턴은 시종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한 후에 트라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질질 끄는 건 싫겠지?”

“물론이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자네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밀턴의 말에 트라이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는군.”

“내 제안의 어디가….”

“아니, 그거 말고 이 차라는 쓴 물 말입니다. 귀족 나리들은 이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이해가 안 가.”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차가 입맛에 안 맞는 듯했다.

그런 트라이크의 모습에 밀턴은 그냥 재미있는 인간이다, 싶었지만 뒤에 서 있는 제롬은 혈압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제롬이 살기를 무럭무럭 뿜어내자 트라이크는 조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으음… 자작님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용병으로서의 계약? 아니면….”

“정식으로 우리 영지에 자리를 잡고 내 사람이 되라는 뜻이지.”

“그렇군요. 그건 내 궁술을 높게 샀다는 말로 들어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밀턴의 말에 트라이크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욕에 초탈한 인간은 아니군. 자기 능력을 인정받는 건 좋아하는 것 같아.’

밀턴은 그런 트라이크의 모습 하나하나를 보며 상대의 심리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라이크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밀턴의 허락이 떨어지자 트라이크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 하나. 내 새끼들도 모두 챙겨주기 바랍니다.”

“롱보우 용병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 영지의 병사로 받아들이겠다.”

“인원이 한 둘이 아니고 200명입니다. 그리고 딸린 가족들까지 다 포함하면 대략 500명은 될 겁니다.”

“정착금을 지원하고 거주지도 제공하지.”

시원하게 대답하는 밀턴을 보며 트라이크는 살짝 놀랐다.

‘배포가 큰 걸까? 아니면 거짓말을 잘하는 걸까?’

이제까지 트라이크의 궁술을 보고 유용함 혹은 특이함을 느끼고 영입을 제시한 귀족들은 제법 있었다.

그때마다 트라이크는 같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이 첫 번째 조건을 받아들여 준 귀족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영지에 난폭한 용병들이 자리를 잡는 걸 꺼려하는 영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걱정 안 됩니까? 내 새끼들은 용병이라서 꽤 거친 놈들입니다.”

“법만 지키라고 그래. 안 그러면 영지법대로 처벌한다. 뭐 문제 있나?”

“…아니요. 없군요.”

트라이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밀턴 포레스트는 생각보다 괜찮은 인물인 듯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공사의 구분도 확연한 것 같았고 자잘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좋았다.

이렇게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하자 트라이크는 그냥 밀턴의 제의를 받아들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두 번째 조건을 받아들인 귀족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농담하는 거냐고 비웃거나 혹은 욕을 하면서 크게 화를 내고는 했다.

그때마다 트라이크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이제는 알고 있다.

자신의 부탁이라는 것이 귀족들에게 얼마나 무리한 부탁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트라이크는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조건입니다. 저를 정식 기사로 인정해 주십시오.”

어떠냐? 이것도 과연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라는 표정을 하는 트라이크에게 밀턴은 즉시 답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

“세 번째는?”

“…….”

“세 번째는? 왜 말을 안 하나?”

밀턴의 말에 넋이 나가 있던 트라이크는 간신히 대답을 했다.

“제 말… 들으신 것 맞습니까? 저는 기사 작위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좋다고 했지. 뭐 다른 문제라도 있나?”

“문제라니? 저는… 저는 궁수입니다. 아시겠죠? 검술은 쥐뿔도 모릅니다.”

“완전 초짜인가?”

“아니 뭐, 단검을 들면 3류 용병 정도는 상대할 수 있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궁술 말고는 능력이 없는 놈입니다.”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단점을 말하는 트라이크에게 밀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지만 내 목숨을 위협했을 정도로 훌륭한 궁술을 가지고 있지. 나는 거기에 가치를 두고 자네를 받아들이려는 거지. 뭐가 문제인가?”

“맙소사. 진심이시군요.”

트라이크는 크게 놀랐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은 자신의 궁술을 진심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 트라이크는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지나온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원래 트라이크는 사냥꾼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활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 활을 접했을 때부터 트라이크는 활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날렵하게 생긴 모양도 마음에 들었고 시위를 당겼을 때의 느낌도 좋았다.

활시위를 놓으면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말끔하게 날아간다.

그 화살이 표적에 정확하게 적중했을 때의 쾌감은 아직 어렸던 트라이크를 홀딱 반하게 했다.

그런 아들을 기특하게 여긴 트라이크의 아버지는 성심성의껏 궁술을 가르쳤다.

궁술이 적성에 맞았고, 궁술에 재능이 있었으며, 궁술을 수련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

트라이크의 궁술은 그야말로 일취월장했다.

그대로 성장했다면 아마 굉장히 유능한 사냥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트라이크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

사냥 중에 실수를 해서 몬스터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트라이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사냥꾼으로서의 미래를 버리고 더 큰 성공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전쟁에 지원해서 궁병이 되었다.

병사 중에서도 궁병은 활을 쏜다는 기술을 보유한 병종이다.

일반 보병에 비해서는 월등하게 대우가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우가 좋다고 해도 병사는 그저 병사일 뿐이었다.

전쟁터에서 그가 아무리 공을 세워도 그게 전공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정말입니다. 제 활이 그 기사의 눈을 꿰뚫었단 말입니다.]

[활을 쏴서 적장의 말을 노린 겁니다. 우연 따위가 아닙니다.]

[제 화살이 맞습니다. 정말 노리고 쏜 거란 말입니다.]

목이 터져라 주장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짓이라는 매도와 공적에 눈이 먼 쓰레기를 보는 경멸의 시선뿐이었다.

움직이는 기사의 투구 사이를 노려서 눈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도….

혼전 속에서 적이 타고 있는 말을 정확하게 맞춰서 낙마시키는 것도….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기술들이었다.

궁수로 아무리 많은 공적을 세운다고 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영광은 없었다.

3년을 궁병으로 구르며 그것을 깨달은 트라이크는 병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용병이 되었다.

실력 위주의 용병으로 전공을 세우면 자신의 실력도 인정받으리라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활동하며 더욱더 늘어난 궁술에 자신도 있었다.

실제 트라이크는 용병으로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다.

단체 중에 1인으로 속해서 활동하는 병사와 달리 용병의 움직임은 눈에 확 띄는 것이었다.

덕분에 트라이크의 실력을 알아보는 귀족들도 생겼다.

그리고 그들은 트라이크에게 영입 제의를 했다.

일반 병사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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