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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34화 (34/257)

제34화

공성전을 하게 되면 익스퍼트인 자신이나 제롬이 활약할 국면이 적어진다.

그 말은 필연적으로 병력의 손실이 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번 전투에서 끝을 내고자 병력적인 열세를 알면서도 평원에서 정면 승부를 벌인 것이다.

그리고 로스케이즈 백작이 거기에 응한 것은 저쪽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 번 크게 당해본 로스케이즈 백작은 이제 성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공략을 하려고 해도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 보면 중앙에서 중재가 들어올 것이다.

‘그건 곤란해. 어떻게 하지? 차라리 중앙이 끼어들기 전에 적당히 휴전 협정을 해서 보상금을 챙길까?’

밀턴은 잠시 휴전안을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밀턴은 보상금이나 몇 푼 챙기기 위해서 영지전을 감수한 것이 아니다.

가까운 이웃에 원한을 사고도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을 정도로 밀턴은 배짱이 두둑하지 않았다.

로스케이즈 백작령의 깃발을 완전히 내려버려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시작한 이상 후환은 남겨둘 수 없지.’

결심을 굳힌 밀턴은 제롬에게 지시를 내렸다.

“병력을 이끌고 즉시 로스케이즈 백작령으로 진입한다. 공성용 병기는 현지에서 제작한다.”

“예. 주군.”

지시를 따르고 밖으로 나가려는 제롬에게 밀턴이 다시 말했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내 머리에 활을 쏜 궁수에 대해서 정보를 좀 조사해 보도록 해.”

“그 궁수 말입니까?”

“그래. 붉은 머리카락에 키는 최소 190 이상, 장신에 기형적으로 큰 활을 사용했다. 이 정도로 특이한 인상착의라면 아는 사람도 있을 거야.”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제롬이 나가자 밀턴은 다시 막사의 침대에 누우면서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죽을 뻔했단 말이지. 도대체 어떤 놈일까?’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상대이건만 이 순간 밀턴은 증오나 경계심보다는 ‘휘하에 거느리고 싶다.’란 욕심이 동하고 있었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인재에 대한 욕망.

밀턴 스스로 자각은 없겠지만 이건 그가 어엿한 군주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밀턴은 병력을 이끌고 로스케이즈 백작령의 성을 빈틈없이 포위했다.

로스케이즈 백작의 성은 해자는 없었지만 성벽이 높고 성문이 튼튼해서 정면으로 공략하기에는 꽤 어려워 보였다.

‘역시 공성 병기가 필요하겠어.’

밀턴은 일단 포위망을 구성한 이후 주변의 숲에서 목재를 조달해서 공성 병기의 제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쉬는 동안 밀턴은 자신의 관자놀이에 깊은 흉터를 남긴 붉은 머리의 용병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용병 출신의 수습 기사 한 명이 그를 알고 있었다.

“붉은 머리에 큰 활을 사용하는 궁수라면 트라이크입니다.”

“트라이크? 유명인인가?”

“예. 용병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입니다. 붉은 머리의 트라이크라고 하면 롱보우 용병단을 이끌고 있는 용병단장입니다.”

“호오? 용병단장이라고?”

“예. 규모도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명 정도 되는 용병단인데 단장에 대한 충성심 높기로 소문났습니다.”

“실력은 어떻지?”

“그게…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용병이라서 실력에 관한 소문은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활을 잘 쏘는 용병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저 활을 잘 쏘는 용병?”

밀턴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말에서 떨어트린 그 활 솜씨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기술이었다.

그런 신기를 부리는 인물인데도 실력에 대한 소문이 그저 그렇다는 식으로 나다니.

‘확실히 궁수에 대한 평판이 낮아. 그런 세간의 평가 속에서도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추도록 수련을 거듭했다니?’

밀턴은 점점 붉은 머리의 궁수, 아니 트라이크라는 남자가 탐이 났다.

그때 토미가 밀턴의 막사에 들어와서 말했다.

“주군, 지시하신 공성 병기의 제작이 끝났습니다.”

“그래? 한번 보도록 하지.”

밀턴은 자신의 지시대로 만든 공성 병기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군. 제작에 힘쓴 목수들에게 상을 내리고 오늘은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라.”

“물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오늘 안으로 저 성을 무너트릴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밀턴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

“밀턴 포레스트… 이놈, 내가 여기서 끝날 줄 아느냐?”

평원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위기에 몰린 로스케이즈 백작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병력을 상당수 잃었지만 그는 아직 방법이 있었다.

로스케이즈 백작성은 튼튼하고 물자도 충분하다.

여기서 농성을 하며 중앙에 사람을 보내서 정치적인 로비를 하면 이 영지전을 중간에 중지시킬 수 있다.

밀턴이 가장 염려하던 방향으로 계획을 잡은 그는 성벽을 철통같이 지켰다.

성문은 아예 열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성문의 뒤편에도 방벽을 준비하여 적이 성문을 부순다고 해도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또 성벽에도 병사들을 충분히 배치해서 적이 갈고리를 걸고 넘어온다고 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어디 올 테면 와 봐라. 전부 성벽에서 떨어트려 주마.”

궁지에 몰린 자의 마지막 자존심일까?

로스케이즈 백작의 눈에는 시퍼런 독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로스케이즈 백작의 각오가 허무하게도 밀턴은 포위망을 형성한 후에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화살 한 대는 고사하고 도발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포위망만 유지할 뿐이었다.

시간을 끌어야 하는 로스케이즈 백작으로서는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로스케이즈 백작은 불안했다.

“뭐지? 저놈이 도대체 뭘 노리는 걸까?”

이미 한 번 호되게 당한 후이기 때문에 로스케이즈 백작은 몹시 불안했다.

적이 당장이라도 공격해 올 거라고 생각하며 투지를 다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공격해 오지 않으니 불안감이 더 강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로스케이즈 백작의 근심 어린 말에 옆에 있던 참모가 말했다.

“어쩌면 별다른 방도가 보이지 않아서 저쪽에서도 그저 지켜만 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고립시켜서 말려 죽이겠다고? 아니야. 그렇게 바보는 아닐 거야.”

로스케이즈 백작성에는 식수도 충분하고 식량도 1년은 더 버틸 수 있는 양이 비축되어 있다.

그리고 영지전이 길어지면 중앙에서 끼어들 텐데 밀턴이 그걸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중앙에 사람을 보내서 정치적인 로비를 하는 게 아닐까요?”

“으음….”

이제까지 나온 대답 중에는 가장 그럴 듯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지를 않았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놈들은 전쟁을 서둘러서 종결시키려고 하는 듯해. 그런데 그런 장기 전략을 취할까?’

로스케이즈 백작은 투지가 점점 작아지고 그 자리에 의심과 불안감이 가득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로스케이즈 백작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을 때.

“백작님. 놈들이 움직입니다.”

드디어 밀턴의 병력이 움직였다.

높은 성벽에서 적을 바라보는 로스케이즈 백작은 신중하게 적을 살폈다.

“발리스타나 캐터필터는 보이지 않는군.”

“예. 대신에 처음 보는 수레를 가지고 왔습니다. 천막으로 덮어놨는데 크기로 봐서는 아마 파성추인 것 같습니다.”

“성문을 부수겠다고? 큭… 좋다. 얼마든지 해봐라.”

로스케인즈 백작의 성문은 굉장히 튼튼했다.

해자가 없는 성이다 보니 성문은 특히 더 단단하게 지은 것이다.

거기다 이미 성문의 뒤편에 든든한 방벽을 더해 두었다.

파성추로 성벽을 부순다고 해도 적이 진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로스케이즈 백작은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호령했다.

“봐라! 적들은 변변찮은 공성 병기 하나도 없다. 발리스타도 없고 캐터필터도 없다. 저런 빈약한 장비로 우리 성벽을 넘겠다는 객기가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로스케이즈 백작은 큰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렸다.

이전 전투에서 일방적인 패배를 겪은 직후이기 때문에 아군의 사기를 최대한 올리려고 적의 단점을 지적한 것이지만 거짓은 없었다.

“공성 병기가 없기는 없네.”

“아무리 익스퍼트라고 해도 성벽을 타고 오르지는 못하겠지?”

“성문이 부서진다고 해도 대비는 든든히 해놨고 말이야.”

불안감에 젖어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조금씩 희망적인 의견들이 나왔다.

그런 병사들에게 로스케이즈 백작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호령했다.

“적이 오는 족족 화살을 먹여줘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오오오오오!”

주위 기사들을 시작으로 해서 성벽 위의 병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로스케이즈 백작의 큰 목소리는 아군뿐만 아니라 적인 밀턴에게도 들렸다.

“제법이군. 적절한 명분으로 아군의 사기를 올렸어.”

한 번 패배해서 기가 꽤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기가 아무리 오른다고 해도 밀턴은 이 공성전에 자신이 있었다.

“시대를 앞지르는 전쟁을 보여주지.”

밀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작전대로 시작한다. 전군, 공격하라.”

“와아아아아아!”

밀턴의 명령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쏴라!”

퍼퍼퍼퍽!

성벽 위에서 적의 화살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화살은 보병이 미리 준비한 커다란 방패에 막혀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밀턴이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동안 보병에게 지급한 타워실드였다.

몸을 가리고도 남을 커다란 방패에 막혀서 화살 공격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계속 쏴라! 화살은 충분하다.”

“방패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 방패로는 성벽을 무너트릴 수 없다.”

하지만 로스케이즈 백작령의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독려했고 계속해서 화살이 쏟아졌다.

“큭….”

“아악! 내 팔!”

화살의 공격 빈도가 올라가자 보병 중에서 약간의 피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방패 꼼꼼하게 겹쳐!”

“궁수는 사거리에 들어왔으면 공격하라. 적을 견제하라!”

포레스트 영지의 고참 기사인 토미와 릭은 솔선하며 병사들을 지휘했다.

궁수들이 반격을 시작하자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도 기세가 약간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대의 수레가 앞으로 전진했다.

“성벽에 가까이 붙여야 한다!”

“계속 밀어! 밀어!”

포레스트 영지의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수레를 성벽 아래로 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스케이즈 백작은 속으로 조소했다.

“파성추로 성문을 부수는 동안 우리는 그냥 지켜볼 것 같으냐?”

로스케이즈 백작은 파성추가 성문 아래까지 다가오면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서 태워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주군, 놈들이 파성추를 성문이 아니라 성벽의 다른 곳에 붙이고 있습니다.”

“뭐라고?”

로스케이즈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문 아래에 도착하기만 하면 불을 붙여서 태워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문이 아닌 다른 곳에 파성추를 가져가다니?

“무슨 꿍꿍이인 거지?”

파성추로 성벽을 무너트린다?

아니다.

파성추로 성벽을 무너트리려면 하루 종일 두들겨야 할 것이다.

그동안 이쪽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다는 말인가?

‘놈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의미 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다.’

로스케이즈 백작은 섬뜩한 느낌을 받고 기사에게 명령했다.

“당장 불화살을 날리고 기름을 부어라. 저 꺼림칙한 파성추를 어서 태워 버려라!”

로스케이즈 백작이 그렇게 지시를 내린 순간….

“지금이다!”

큰 호령 소리와 함께 수레를 감싸고 있던 천막이 걷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모습은 이제까지 사람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저건 뭐지?”

“처음 보는 물건인데?”

그것은 커다란 수레 위에 사다리를 싣고 있는 형태였다.

사다리는 굵은 줄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상인들이 쓰는 짐수레에 사다리를 실어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 순간 로스케이즈 백작은 크게 놀랐다.

“사다리? 설마 저놈들….”

정확하게는 아니라도 직감적으로 대강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줄을 끊어라!”

“옛!”

기사의 명령과 함께 수레 위에 사다리를 고정하고 있던 줄이 끊어졌다.

그러자….

쿠웅!

탄성으로 당겨져 있던 사다리가 펴지면서 성벽 위에 정확하게 걸쳐졌다.

“어…? 어어?”

“이런… 사다리가 이렇게 쉽게?”

성벽위의 병사들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밀턴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건 처음 보지? 이게 바로 운제(雲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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