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33화 (33/257)

제33화

‘로스케이즈 백작을 잡으면 끝이다.’

겹겹이 앞을 막고 있던 병력을 다 치워버린 밀턴은 이제 거칠 것 없다는 듯이 적의 머리를 치기 위해서 돌격했다.

“막… 막아라!”

로스케이즈 백작은 서둘러서 밀턴을 막으라고 했지만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다.

애당초 포위망이 실패한 순간부터 일은 틀어졌던 것이다.

단순하게 작전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진형 자체가 엉망으로 헝클어졌기 때문에 밀턴은 거칠 것 없이 적진을 유린할 수 있었다.

‘잡을 수 있다.’

적진을 종횡무진하게 누비던 밀턴은 로스케이즈 백작이 자신의 사정권에 있다고 판단했다.

“간다! 내 뒤를 따라라!”

밀턴은 주변의 호위 병력을 이끌고 로스케이즈 백작이 있는 곳으로 돌파를 시도하려 했다.

그때….

“내가 상대해 주겠다! 밀턴 포레스트!”

한 명의 기사가 용맹하게 밀턴의 앞을 가로막았다.

덕분에 밀턴은 달리던 말을 잠시 멈추고 말 머리를 높게 세웠다.

‘용기는 가상하군.’

“좋다. 상대해… 음?!”

쉬익!

밀턴은 그 순간 자신의 귓가를 스치고 뭔가가 날카롭게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뭐였지? 지금….’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핏자국을 보며 밀턴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쯧, 멍청한 놈이 재를 뿌리는군.”

붉은 머리의 장궁을 든 남자는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은밀하게 날린 화살이었는데 표적이 우연히도 말을 멈춰서 화살이 빗나가 버렸다.

“첫 발이 빗나가면 잡기 귀찮은데 말이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기형적으로 커다란 장궁을 다시 당겼다.

끼이이이익!

터질 듯한 등 근육이 꿈틀거리면서 커다란 활이 부러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게 휘어졌다.

그리고 그가 활시위를 놓자….

피잉!

공기를 진동시키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아올랐다.

“막아라!”

“주군을 보호… 커억!”

다시 날아온 화살이 밀턴을 보호하던 호위 기사 한 명을 관통했다.

‘판금 갑옷을 관통해? 무슨 화살이? 아니 그보다 도대체 어디서 쏘는 거지?’

이 전쟁이 시작하고 밀턴은 지금 이 순간 가장 큰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거 장난 아닌데?”

사정권 안에 잡았다고 생각한 로스케이즈 백작은 어느새 저 멀리 도망가 버렸다.

하지만 추적할 여유는 없었다.

누가 날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빠르고 강력한 화살이 정확하게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밀턴이 과감하게 돌진할 수가 없었고 결국은 로스케이즈 백작을 놓치고 만 것이다.

“젠장 어디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디에 숨어서 날리고 있는 거야?”

이 짜증나는 궁수를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밀턴은 궁수의 위치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자신을 노리는 궁수는 찾을 수가 없었다.

활이 날아오는 방향은 대강 알겠는데 그쪽에서는 혼전 중인 보병 병력밖에 없었다.

설마 저 안에서 활을 날렸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자작님! 저기 수레 위에 궁수 한 명이 있습니다.”

밀턴의 옆에 있던 수습 기사 한 명이 외쳤다.

밀턴이 그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수례 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기? 말도 안 돼. 거리가 얼마인데 저기서 무슨….”

“하지만 저 궁수가 활을 또 메기고 있습니다. 자작님.”

“그게 보인단 말이냐?”

“예. 제가 바닷가 출신이라서 눈은 좋습니다. 지금 활을 쏘려고… 엇!?”

그 용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 하나가 밀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큭!”

따앙!

밀턴은 급하게 방패를 들어서 화살을 막았다.

그리고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적을 바라봤다.

저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기사들로 빽빽하게 감싸인 자신을 정확하게 노리고 화살을 날린 것이다.

“미치겠군. 이거 실화냐?”

밀턴의 그 질문에 ‘그래 실화다.’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다시 한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땅!

“크으으….”

다시 한 번 방패를 들어서 화살을 막은 밀턴은 손목이 얼얼해짐을 느꼈다.

‘무슨 화살의 위력이….’

저렇게 멀리서 날아옴에도 불구하고 근거리에서 석궁을 막았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어쨌든 이제 확실해졌다.

저 궁수가 지금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잡아야겠지.”

밀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 뒤를 따라라. 돌격한다!”

그리고 밀턴은 자신을 방해한 궁수가 있는 쪽으로 말을 달렸다.

단 한 명의 궁수였지만 여기서 처리해 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골치 아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쪽으로 오는 건가?”

붉은 머리의 용병 궁수는 밀턴이 자신이 있는 쪽으로 똑바로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병력을 보내서 시간을 끌어 볼까요?”

그 옆에 있는 부하 용병의 말에 붉은 머리의 용병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 보아하니 익스퍼트 같은데 들이대 봤자 아까운 애들만 상하지.”

그리고 그는 손에 두 개의 화살을 쥐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걸로 끝내겠다.”

“대단한 궁수군. 무슨 라이플로 노리는 것도 아니고….”

밀턴은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대방의 궁술에 감탄했다.

이 세계에서 궁수라는 것은 병사의 일종이다.

물론 숙련된 궁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이고 또 전쟁터에서도 중요한 병종이다.

하지만 기사나 용병들 사이에서 궁수라는 것은 꽤 기피되는 직업이었다.

오러를 연공하기 위해서는 검이든 창이든 도끼든 간에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활은 그런 부분에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 숙련된 궁사는 있어도 명궁이나 신궁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궁사는 없었다.

전설 속의 종족인 엘프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나 별종은 있는 법.

가끔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자신이 먼저 걸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도 있는 법이다.

지금 밀턴에게 활을 날리고 있는 붉은 머리의 용병이 바로 그랬다.

보통의 활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하며 또한 정확했다.

그냥 적당히 겨눠서 날리는 게 아니라 화살 하나하나가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맨살 부분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활은 활이지. 집중하면 날아오는 화살 정도는 충분히 쳐낼 수 있어.’

밀턴은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화살에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적의 위치를 특정하고 난 후의 화살은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거슬리는 건 가까이 가면 갈수록 활의 위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과 적이 도주하면 잡을 방법이 없다는 건데….’

밀턴은 다급하게 앞으로 말을 몰았다.

지금 밀턴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해서 저 궁수가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추격이 힘들어진다.

‘그 전에 무조건 잡아야 해.’

“이럇!”

밀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의 속도를 올렸다.

쉬이익!

말을 타고 달리면서 밀턴은 자신을 향해서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안 통한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밀턴은 검을 휘둘러서 그 화살을 가볍게 쳐냈다.

땅!

그리고 화살을 쳐낸 그 순간….

“헉?!”

밀턴은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분명 화살을 쳐냈다.

쳐냈는데….

자신이 쳐낸 화살의 바로 뒤에서 똑같은 궤도로 똑같은 화살이 숨어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화살 한 발을 날리고 그 화살이 적에게 맞기도 전에 눈부신 속사로 두 번째 화살을 날린 것이다.

그것도 첫 번째 화살과 완전히 동일한 궤적으로 말이다.

그야말로 신기(神技)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기술이었다.

‘쳐내… 불가능….’

사고를 제대로 할 틈도 없이 밀턴은 힘껏 목을 틀었다.

퍼억!

“주군!”

“자작님!”

밀턴이 활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 순간 주변의 수습 기사들이 크게 놀라서 모여들었다.

“자작님을 지켜라!”

“방패 들어. 몸을 가려서 화살이 날아오지 못하게 해!”

수습 기사들은 노련한 용병 출신답게 밀턴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대장님. 해냈습니다.”

“또 멋지게 잡아내셨군요.”

“역시 대장님!”

붉은 머리의 용병 주변에서는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용병들이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장이 쏜 활로 적을 잡아내는 광경을 똑똑히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장본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장님.”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예? 아니 대장님 활을 머리에 맞고도 멀쩡하단 말입니까?”

“멀쩡하지야 않겠지. 하지만 지금 저놈들이 빈틈없이 둘러싸고 후퇴하는 이유는 시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가 아닐 거야.”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그렇겠지.”

붉은 머리의 용병의 말에 부하들은 무기를 들고 당장이라도 뛰어갈 자세를 잡았다.

그들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 머리의 용병은 그게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주군!!”

한쪽에서 사납게 날뛰고 있던 기사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의 용병은 그쪽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우익을 박살낸 그 기사로군. 실력은… 좀 전에 자작 나리보다 훨씬 위인가?’

사납게 날뛰는 제롬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무리할 것은 없다. 우리 쪽 고용주의 목숨은 건졌으니 우리는 이대로 후방으로 후퇴한다.”

“예!”

그리고 붉은 머리의 용병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유유히 후퇴했다.

“아악!”

“으아악!”

“크아악!!”

곡소리가 난다는 말은 아마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일 것이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체벌….

퍽! 퍽퍽퍽! 퍼억! 퍽퍽!

아니 지금은 그냥 대놓고 패고 있는 현장이다.

하지만 맞는 쪽은 감히 찍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못난 것들! 기사라는 놈들이 바로 곁에 있었으면서도 주군을 다치게 해?”

체벌을 주고 있는 상급자가 바로 기사단장인 제롬이기 때문이다.

실력으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개겨 볼 여지가 없는 상대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자신들이 생각해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수습 기사라고 해도 기사는 기사.

최우선 사항은 자신의 주군을 지키는 것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주군을 잃고도 목숨을 건사한 기사는 비웃음을 넘어서 경멸의 대상이 되는 법이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지켜야 하는 것이 기사도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곁에 있었으면서도 밀턴이 화살에 맞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비록 그 후에 낙마한 밀턴을 보호해서 무사히 후퇴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말이다.

만약 그거라도 똑바로 해내지 못했다면 제롬은 이들을 군법으로 다스렸을 것이다.

“주군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제롬이 수련 기사들을 족치는 행동을 그만둔 것은 토미가 이 말을 전해왔을 때였다.

“후우우… 토미.”

“예. 단장님.”

“이놈들은 네가 굴려라. 정신 상태를 처음부터 다시 바로 잡는다.”

“전쟁터인데 괜찮겠… 예. 알겠습니다!”

수습 기사들을 살짝 감싸주려고 한 토미였지만 제롬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바로 순응해 버렸다.

‘어쩌겠냐? 나도 살아야지.’

그리고 토미는 수련 기사들에게 말했다.

“일단 뛰자. 무리하지는 말고 가볍게 피 토할 때까지만.”

표정이 죽어나가는 수련 기사들이었다.

“주군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롬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얼굴의 반 이상을 붕대로 감고 있는 밀턴이 보였다.

“아아… 다행히도 말이야.”

밀턴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아직도 밀턴은 그 순간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흘렀다.

적의 화살이 자신의 미간으로 정확하게 날아왔고, 급하게 고개를 꺾어서 피했지만 화살은 관자놀이 부근을 적중한 것이다.

덕분에 오른쪽 눈 옆으로 긴 상처 자국이 생길 것 같았다.

‘잘생긴-전생보다-얼굴이라서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피식 웃으면서 속으로 푸념하는 밀턴이었다.

어쨌든 살았다.

밀턴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이 할 일을 했다.

“현재 상황은?”

“예. 적은 크게 후퇴한 뒤 영주 성에서 농성을 준비 중입니다.”

“쯧, 공성전을 하기 싫어서 이번 전투에 결정타를 먹이려고 했는데 말이야.”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밀턴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