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32화 (32/257)

제32화

경악과 공포에 휩싸인 올리버를 향해 밀턴은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올리버는 얼떨결에 검을 들어서 그 공격을 막았지만….

콰아앙!

“크윽….”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올리버는 크게 밀리며 휘청거렸고 하마터면 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리고 단 두 합의 교환으로 올리버는 확신했다.

“익스퍼트였던 겁니까?”

“뭐, 그렇지.”

밀턴은 어깨에 검을 두드리며 말했다.

익스퍼트는 그저 검에 오러를 씌우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오러를 몸 안에서 운영해서 신체 능력 전반을 크게 상승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체중이 40kg 이상 가벼운 밀턴이 힘으로 올리버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궁금증은 풀렸나? 그럼 끝내지.”

“잠… 잠깐….”

밀턴의 검이 쾌속하게 휘둘러졌고 올리버는 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도망가려 한 것이다.

하지만….

스팟!

날카롭게 날아간 밀턴의 참격은 올리버의 목을 말끔하게 베어 버렸다.

올리버는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죽었고, 그의 말은 목을 잃은 주인을 태운 상태로 진형으로 달려갔다.

“우오오오오오오!”

“포레스트 자작님 만세!”

“영주님 만세!”

밀턴이 승리하자 아군의 진형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승리의 함성이 터지는 반대편에서는 다른 의미의 함성이 터졌다.

“멍청한 놈! 자신만만하게 나가서 지면 어쩌자는 거냐!”

로스케이즈 백작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외쳤다.

일기토의 패배에서 분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자원해서 용맹하게 나간 자신의 기사를 매도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다른 기사들이 모두 듣고 있을 때는 특히나 더 그렇다.

“누가 나가서 저놈의 목을 가져올 사람은 없느냐?”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 로스케이즈 백작은 주변의 기사들을 닦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간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올리버를 압도적으로 이긴 밀턴의 실력을 봤을 때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죽은 올리버를 모독하는 로스케이즈 백작의 태도는 기사도를 따르는 기사들의 입장에서 배신감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때로는 죽음도 명령이라면 불사하는 것이 기사다.

하지만 주군이 기사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저 개죽음일 뿐이다.

그 누구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승리를 거둔 밀턴은 목청을 크게 높여서 적을 도발했다.

“내 목을 가져갈 사람은 누구도 없느냐? 로스케이즈 백작령의 기사들은 모두 겁쟁이들뿐이냐?”

일기토로 얻은 승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밀턴은 큰 목소리로 적을 자극했다.

그런 밀턴의 도발에 로스케이즈 백작은 복장이 뒤집어지는 굴욕감을 느꼈다.

“정말 아무도 없느냐? 누구든 가서 저놈의 목을 가져올 기사는 없느냔 말이다!”

얼굴이 붉어진 로스케이즈 백작이 다시 한 번 기사들을 닦달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그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할 뿐.

앞으로 나서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못난 작자들 같으니라고!”

이 순간 로스케이즈 백작은 자신의 기사들이 모두 밥버러지로 보였다.

평소 기사 병력이 잡아먹는 돈이 얼마인데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안 된단 말인가?

짜증이 한계까지 치밀어 오른 로스케이즈 백작에게 누군가가 말했다.

“내가 한번 해보겠수다.”

“너는…?”

마침 지원자가 나타났지만 로스케이즈 백작의 표정은 구겨졌다.

앞으로 나선 남자는 가죽 갑옷을 입고 붉은 머리카락의 남성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고 키가 컸지만 몸에 쓸데없는 근육이 붙어 있지 않아서 날렵해 보이는 체격이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남자의 무장이었다.

허리에 짧은 숏소드 하나가 달려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조 무장이었다.

진짜 주 무장은 그의 등에 매여져 있는 거대한 활이었다.

보통의 장궁보다 훨씬 더 큰 사이즈의 활이었다.

즉, 이 남자의 주 무기는 활인 것이다.

일기토에 나선다고 말한 것치고는 참 독특한 무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남자의 말에 로스케이즈 백작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쯧, 집어치워라.”

“아무나 가면 되는 것 아니오? 보수만 두둑하게 준다면 한 번 해주겠소.”

“용병 따위가 어디서 감히 기사의 대결에 나서려고 하느냐?”

로스케이즈 백작의 호통에 다른 기사들도 동조했다.

“주제를 알아라.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라고 생각한 거냐?”

“도대체 활 따위로 어떻게 일기토를 하겠다는 거냐?”

“비겁하게 몇 발 화살이나 날리다가 도망칠 생각이냐? 그럴 바에는 안 하는 편이 낫다.”

거친 매도를 들으면서 붉은 머리의 용병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신들 손해지 뭐. 난 굳이 안 해도 상관없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뒤로 물러나자 가신 중에 한 명이 로스케이즈 백작에게 말했다.

“주군, 더 이상 적의 의도에 이끌리는 것은 상책이 아닌 듯합니다.”

“으음….”

“상대가 일기토로 나온 건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어서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적이 유리한 점을 살려주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장점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장점?”

“적의 병력은 우리의 3분에 1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면전으로 국면을 바꾼다면 우리가 유리할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사기가….”

사실 사기보다는 로스케이즈 백작의 자존심이 더 문제였다.

하지만 가신은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거듭했다.

“적의 사기가 올랐다고 해도 세 배의 병력 차이는 큽니다. 어쩌면 적의 작전은 전면전 이전에 일기토로 우리의 기사 전력을 손상시키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으음….”

듣고 보니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리고 자신이 유리한 방식으로 싸울 수 있는데 일기토를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좋다. 바로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려라. 놈들을 힘으로 짓뭉개 버린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뿔피리 소리가 넓게 울려 퍼지고 지휘관들이 군을 움직였다.

“정렬하라!”

“앞으로 구보!”

“창을 똑바로 들어라.”

3,000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성 없는 것들. 딱 한 번 졌을 뿐인데 포기하다니….”

밀턴은 투덜거리면서 자신을 향해서 전진하는 병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면 승부 전에 일기토로 적의 기사 전력을 좀 더 깎아내고 싶은 건 정말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이지 절대 정면 승부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수준의 차이를 보여주마! 전군 나를 따라라!”

밀턴은 크게 외치며 선두에서 말을 몰아 적을 향해 돌격했다.

“오오오오오!”

“돌격!”

그리고 그런 밀턴의 뒤를 기사단을 위주로 한 병력이 서둘러서 뒤따랐다.

1,000대 3,000의 정면충돌.

전쟁에 있어서 머릿수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사실 이건 결과가 뻔한 싸움이었다.

지형이나 전략적 우위를 살려서 싸우는 방식이 아닌 정면 승부에서 세 배에 달하는 병력 차이는 너무나 큰 차이였다.

그러나….

“내 뒤를 이어라! 적을 돌파한다!”

소수의 병력이라고 해도 어떻게 힘을 집중시키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종류의 위력을 발휘하는 법.

밀턴은 자신의 검에 보란 듯이 오러를 끌어올렸다.

“익… 익스퍼트라고?”

“말도 안 돼.”

밀턴의 검에 오러가 일렁거리자 적진은 크게 동요했다.

이제까지 익스퍼트임을 숨기고 있던 밀턴이었지만 지금은 반대로 익스퍼트라는 것을 드러냈다.

덕분에 적은 크게 위축되었고 밀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돌격!!”

밀턴은 직접 선두에 서서 기사단을 이끌고 정면으로 중앙 돌파를 시도했다.

밀턴을 선두로 해서 쐐기 형태로 집중된 힘이 3,000의 병력을 파고들었다.

“큭… 막아라!”

“기사단! 기사단은 무엇을 하느냐!?”

“밀턴 포레스트는 익스퍼트다. 기사는 최소한 셋 이상이 함께 덤벼라!”

적들은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 밀턴을 막으려고 했지만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밀턴의 돌파력은 쉽게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밀턴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하자 진형 자체가 크게 흔들렸다.

단기로 돌격을 해봐야 적진에 작은 구멍을 내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그 구멍에 후속 병력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자 구멍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결국 이대로 내버려 두면 돌파 공격에 진형이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일점 돌파로 적진을 무너트리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버텨라. 중장보병은 방패를 단단하게 겹쳐라! 창병은 후미에서 창을 높게 들어라! 적의 기마 돌격을 막아라!”

적도 바보만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밀턴이 자신의 무력을 앞장세워서 일점 돌파를 한다면 로스케이즈 백작군의 장점은 세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중무장한 보병을 두껍게 겹쳐서 벽을 만들고 뒤에서 창병으로 견제를 하자 기어코 밀턴의 돌진력이 멈췄다.

그러자….

“지금이다! 크레센트 진형을 취해라! 적을 포위 섬멸한다!”

적진의 좌우에서 병력이 앞으로 나가며 초승달 형태의 진형으로 밀턴과 그 수하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돌파를 시도했을 때 중간에 막히게 되면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중간하게 파고든 상황에서 진퇴가 불가능해졌을 때 적이 포위망을 구축하면….

‘최악의 상황이지.’

밀턴은 적의 병력 움직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정석대로 잘 움직이는 것을 보아하니 병력을 지휘하는 인간이 영 맹물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정석은 정석일 뿐. 내가 여기에 대응책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나?”

밀턴은 품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서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그리고 신호가 터지기 무섭게 포위망이 다 완성되지 않은 왼쪽 진형에서 한 무리의 기마가 돌진을 시도했다.

“적이 포위진을 방해한다!”

“창을 세우고 기마 돌진을 막아라!”

로스케이즈 백작령의 군사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그 병력을 막으려고 했다.

장창병이 뭉쳐서 고슴도치처럼 창을 세우며 적을 저지하려는 그 모습은 올바른 대응이었다.

하지만….

“꺼져라!”

익스퍼트 최상급인 제롬에게는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크아아악!”

“으아악!”

단 일격에 적의 방진을 파괴한 제롬의 검에는 밀턴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파괴적인 오러가 맺혀 있었다.

“익스퍼트가 한 명 더?”

“못… 못 막아.”

“으아아아아아!”

제롬이 오러를 과시하듯이 휘두르자 적 병력은 전의를 잃고 겁을 먹었다.

제롬은 그런 적진을 휘하 병력을 이끌며 철저하게 파괴했다.

밀턴보다 훨씬 더 강한 제롬이 보이는 파괴력은 미처 준비가 되지 못한 병사들의 방진으로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쓸어 버려라. 여기가 승패를 가늠하는 분수령이다!”

제롬의 명령을 받고 그 뒤를 따르던 기마 병력도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이 어르신이 포레스트 영지의 릭이다.”

“이 돌대가리하고 같은 취급 받기는 싫지만 내가 토미다.”

릭과 토미를 시작으로 해서 제롬과 함께 날뛰는 병력에는 포레스트 영지의 알짜배기 기사들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밀턴이 중앙 돌파를 시도했을 때 그 후위를 받쳐준 병력은 용병 출신의 수습 기사들이었고, 정식 기사 열 명은 모두 제롬의 휘하에 대기 중이었다.

즉, 밀턴의 전략은 이랬다.

1안은 자신이 중앙 돌파를 했을 때 그걸로 적진을 돌파해서 로스케이즈 백작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것이었다.

단, 이게 실패할 시에는 적이 포위 진형으로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때는 외부에 남겨 두었던 제롬이 정예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의 밖에서 적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작전이 제대로 맞아떨어져서 적의 우측 진형은 거의 괴멸 상태였다.

“적을 막아라!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정면 승부에서도 자신의 군이 밀리는 모습을 보고 로스케이즈 백작은 크게 화를 냈다.

포위망이 다 무너지고 산개된 병력이 우측부터 하나씩 무너져 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적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우측의 기마 병력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기사단을 보내라! 어서! 저것도 못 막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로스케이즈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기사단은 포위망 안에 있는 포레스트 자작을 견제… 어이쿠!”

로스케이즈 백작에게 상황을 알리던 가신은 날아온 투구에 머리를 맞고 말에서 떨어질 것처럼 휘청했다.

“이 못난 놈! 그럼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냔 말이냐?!”

“…….”

로스케이즈 백작의 호통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머리로 생각하기에 이미 전쟁의 승패가 기울어 버렸다.

로스케이즈 백작은 이번 전쟁을 위해서 병력을 증강시키는 길을 선택했고, 많은 돈을 투자해서 3,000의 병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포레스트 영지군의 강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영주인 밀턴 포레스트도 강했고 그 영주보다 훨씬 더 강해 보이는 기사도 한 명 있었다.

전선의 선두에 서서 오러를 넘실거리며 날뛰는 둘의 모습을 보고서야 포레스트 영지에 익스퍼트가 둘이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실수다. 이럴 줄 알았으면 3,000이 아니라 5,000은 준비했어야 했어. 설마 익스퍼트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을 줄이야.’

로스케이즈 백작의 참모는 후회가 가득했지만 지금 와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때 로스케이즈 백작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로스케이즈 백작! 지금 갈 테니 목이나 씻고 기다려라!”

밀턴이 크게 외치며 동시에 로스케이즈 백작을 향해서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