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하먼 자작의 본대는 징집병을 멀리 떨어트리고 적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하지만 좀처럼 적이 잡히지 않았다.
같은 보병이라도 포레스트 영지의 병력은 발이 빠른 병사들로 엄선해서 무장도 최대한 가볍게 한 병력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고, 하먼 자작은 다음 수를 쓰기로 했다
“기사들이 먼저 나아가라. 저놈들을 놓치면 안 된다!”
하먼 자작은 자신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보병의 몸이 날래도 기마에 올라탄 기사들보다 더 빠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옛 주군!”
하먼 자작의 기사들은 그 명령을 받자마자 재빨리 앞으로 치고 나갔다.
빠르게 대열 앞으로 치고 나간 기마의 숫자는 열 기.
하먼 자작이 데리고 있는 기사 병력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때….
“다 왔군.”
토미가 위치를 확인한 후에 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삐이이이이!
높고 멀리 퍼지는 소리가 나왔다.
“우와, 그거 뿔피리보다 작은데도 소리는 굉장히 큰데?”
옆에서 릭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지금 토미가 사용한 물건은 원래 이 세계에는 없는 물건이지만 밀턴이 대장간에 의뢰를 해서 만들게 한 호루라기였다.
릭과 토미가 이끄는 병력이 예정된 위치에 도달하면 신호를 보내라고 밀턴이 준비해 준 것이다.
그리고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두 무리의 병력이 양옆에서 나타났다.
“적이 함정에 빠졌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것은 밀턴이 직접 이끄는 병력과 제롬이 이끄는 병력이었다.
각각 50의 병력을 거느리고 길목의 좌우에 매복하고 있던 밀턴과 제롬이 신호에 맞춰서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후퇴하고 있던 릭과 토미도 병력을 반전시켜서 적을 공격했다.
정면과 양 측면, 삼면에서 몰아치는 공격에 하먼 자작의 기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즉시 대응하라!”
“허둥거리지 마라! 적은 소수다!”
기사들은 병사들을 지휘하며 어떻게든 진형을 유지하고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리한 추적을 하기 위해서 이미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였고, 불시에 적의 매복까지 당했다.
병사들은 겁을 먹었고 기사들 역시 어디를 먼저 대응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더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제롬 테이커의 존재였다.
“목숨이 아깝거든 비켜라!”
“크아아악!”
몇몇 기사들이 제롬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그들은 제롬을 막는 것은 고사하고 발걸음을 늦추는 것도 불가능했다.
“괴… 괴물이다.”
“크윽… 누가 좀… 크아악!”
제롬이 선두에서 적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러자 제롬을 따르는 부대 전체에 엄청난 돌진력이 생겼다.
“테이커 경을 따라라!”
“적들은 이미 괴멸 직전이다!”
“우오오오오!”
병사들은 사기가 하늘까지 올라서 용맹하게 적진을 때려 부쉈다.
반대로 하먼 자작의 병사들은 기세가 완전히 잡아먹혀서 겁을 잔뜩 먹은 상태였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서부 전선에서 싸웠던 힐데스 공화국의 강군에 비하면 하먼 자작의 병력은 변변하게 실전도 거쳐 보지 못한 약졸에 불과했다.
제롬은 거칠 것 없이 적을 유린했고 한 박자 늦게 파고든 밀턴과 릭, 토미도 거침없이 적을 몰아붙였다.
“저… 저 괴물은 도대체 뭐냐? 어째서 포레스트 영지에 저런 놈이 있는 거냐?”
자신의 병력이 일방적으로 박살나는 모습을 보면서 하먼 자작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평화로운 나라에 평화로운 시골 귀족으로 전쟁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 하먼 자작이다.
지식으로 익스퍼트라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왕도에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들이 귀한 취급을 받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 익스퍼트가 전쟁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저럴 줄은 몰랐다.
아무리 익스퍼트라고 해도 설마 저 정도로 무지막지할 줄은 몰랐다.
돈을 잔뜩 들여서 중무장을 시킨 자신의 기사들이 무슨 허수아비처럼 반항도 못 하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하먼 자작은 공포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하먼 자작이 저기에 있다!”
그런 하먼 자작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적병 중에 누군가가 외친 소리 때문이었다.
“마… 마마… 막아라!”
하먼 자작은 자신을 향해서 돌격해 오는 적들을 향해서 부하들에게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정작 자신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서 후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군의 사기 떨어트리는 방법은 다 하는군요.”
“저렇게 골고루 다 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부하들을 싸우게 하고 혼자 도망가는 하먼 자작을 보며 밀턴과 제롬이 말했다.
어느새 이 둘은 적을 다 흩어버리고 하먼 자작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의 뒤로는 용병 출신의 수습 기사들이 말을 달리며 따르고 있었다.
유인책에 이은 매복계로 적을 완전히 박살내 놓은 것은 좋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누가 먼저 잡는지 내기할까?”
밀턴이 호기롭게 내기를 제시하자 제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마술에 자신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검술보다는 조금 승산이 보이는군.”
“하하하… 과연 그럴까요?”
둘은 서로를 마주 본 다음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직후….
“이럇!”
“하앗!”
동시에 둘의 말이 거칠게 질주했다.
정신없이 도망가고 있던 하먼 자작은 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둔감한 그가 느낄 정도로 확실하게 와닿는 그 느낌은 초식 동물이 포식자에게 사냥감으로 찍혔을 때의 감각과 흡사했다.
“히이이익, 오지 마!”
하먼 자작은 필사적으로 말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도망갔다.
하지만 기마술이라고는 교양 정도로밖에 익히지 않았던 그가 밀턴과 제롬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두두두두….
점점 가까워지는 추격자의 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하먼 자작은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퍼억!
히이잉!
하먼 자작의 말이 공격을 당해 크게 울부짖으면서 쓰러졌다.
“으아아악!”
이윽고 하먼 자작은 말에서 떨어졌다.
“제가 이겼습니다.”
“쳇, 한 끗 차이였는데….”
하먼 자작은 자신이라는 사냥감을 내려다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는 두 맹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살… 살려 주게.”
체면을 버리고 살려 달라고 하는 하먼 자작을 보며 밀턴은 싸늘한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하는 거 봐서.”
죽었다면 모를까 사로잡은 이상 이용 가치가 충분한 하먼 자작이었다.
영지전은 싱거울 정도로 손쉽게 끝났다.
단 한 번의 격돌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거기서 밀턴이 하먼 자작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를 앞장세워서 나머지 병력을 순순히 투항시킴으로 인해 전쟁은 끝났다.
밀턴으로서는 당연히 예상했던 승리였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
우선 밀턴은 사로잡은 하먼 자작에게 협조(?)를 구해야 했다.
그래서 인질로 사로잡은 하먼 자작을 협상의 테이블로 불러서 대담을 시작했다.
“영지를 넘기고 물러나면 개인적인 재산은 보장해 주겠소. 그걸로 외국에 가서 새 출발을 하도록 하시오.”
밀턴의 제의를 들은 하먼 자작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먼 자작령은 우리 가문 대대로 이어온 나의 영지다.”
“이제는 아니지. 영지전에서 패배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
하먼 자작은 입을 다물고 밀턴을 노려보기만 했다.
이미 결과가 정해진 전쟁이기는 했지만 순순히 자신의 영지를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계속 안 된다고 버티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는 근거 없는 계산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밀턴은 중년 아재의 땡깡 따위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최근에 내가 주변 영지에 소문 한 가지를 퍼트렸소.”
“무슨 소문 말이…오?”
밀턴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지전에서 승리하고 하먼 자작을 사로잡는 과정에서 하먼 자작이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 라는 소문이지.”
“그게 무슨 말이냐?”
깜짝 놀라서 반문하는 하먼 자작은 멀쩡한 자신을 부상자로 만든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그런 하먼 자작에게 밀턴이 친절하게 부가 설명을 해 주었다.
“부상을 입은 하먼 자작은 지금 포레스트 영지에서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소. 그런데 어째… 내 예감으로는 안타깝게도 하먼 자작은 최선을 다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사망할 것 같구려.”
밀턴의 말에 하먼 자작은 간이 심장이 철렁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설… 설마 나를 죽이겠다는 말이냐?”
“설마 그럴 리가? 사로잡은 이상 처형해 봤자 내가 귀족 사회에서 잔인한 야만인으로 찍힐 뿐이지 않소?”
“당연하지.”
하먼 자작은 힘을 잔뜩 주어서 말했다.
“다만,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치료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사망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안 그렇소?”
“그… 그런….”
결국 말 안 들으면 죽이겠다는 말이다.
하먼 자작은 힘이 쭉 빠졌다.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밀턴은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하먼 자작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반나절 정도 시간을 주겠소. 차분하게 생각해 본 후에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바라오.”
밀턴이 다시 찾아갔을 때 하먼 자작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나름 생각을 해봤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평범한 결론이지만 하먼 자작이 평생을 살면서 내린 결론 중에서 가장 현명한 판단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준다는 조건하에 밀턴에게 자신의 영지를 넘길 것을 약속했다.
정식으로 서류를 준비하고 거기에 하먼 자작이 인장을 찍는 순간….
[영지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새로운 영지인 하먼 자작령이 생겼습니다. 영지를 합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복수 영지를 관리하겠습니까?]
[Yes or No]
두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는 예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선택을 강요하는 메시지는 처음이었다.
밀턴은 조금 생각했지만 애당초 정해진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멀리 떨어진 영지도 아니고 관리하기 편하려면 합병하는 게 낫지.’
그리고 밀턴이 Yes를 선택하자 다시 메시지가 떴다.
[적대 세력인 하먼 자작령이 소멸되었습니다.]
[포레스트 영지가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인구와 영토가 더 늘어났습니다.]
[군주의 권능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새로운 특성인 ‘교섭’이 생겼습니다.]
‘좋아. 좋아.’
밀턴은 입이 귀에 걸리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자제했다.
지금 당장 상태창을 열어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알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하먼 자작과의 볼일을 마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제 나를 놔주는 것이오?”
“지금 당장은 곤란하군. 공식적으로 당신은 꽤 중상을 입은 상태라서 말이요.”
“그런…. 약속이 다르지 않소?”
하먼 자작이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완전히 기가 죽어서 이전처럼 오만하게 따지고 들지는 못했지만 중년의 아재가 울먹이는 모습도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걱정 안 해도 약속은 지킬 거요. 적어도 영지전이 완전히 끝난 후에는 풀어주도록 하지.”
“영지전은 끝나지 않았소? 내가 이렇게 항복 문서에 사인까지 했는데….”
“하먼 자작령과의 전쟁은 그렇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밀턴의 말에 하먼 자작은 찔끔한 얼굴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밀턴은 한 장의 종이를 더 꺼내서 하먼 자작에게 내밀었다.
“여기에 인장을 찍어 주시오. 이것까지 해 준다면 더 이상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없소.”
밀턴의 말에 하먼 자작은 서면에 써져 있는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이오? 이건 정말….”
“당신이 알 바 아니오.”
“…….”
“얌전히 인장이나 찍으시오.”
밀턴의 말에 하먼 자작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멋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하고 건드린 상대는 자신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거물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