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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28화 (28/257)

제28화

하먼 자작은 포레스트 영지에서 편지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그 어린 애송이가 이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머리를 숙인다는 예상을 하며 기분 좋게 편지의 봉인을 뜯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 하먼 자작에게

최근 우리 영지로 그대의 영지에서 유민들이 넘어와 골칫거리가 되고 있소.

도대체 영지를 얼마나 엉망으로 운영하면 죄 없는 영지민들이 유민 취급받는 것도 불사하며 우리 영지로 넘어오는지 모르겠으나 이들로 인해서 우리 영지에 상당한 피해가 벌어지고 있소.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자신의 무능함으로 인해서 이웃에게 폐를 끼쳐서야 쓰겠소?

선대부터 이어온 인연을 봐서 지금까지의 민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 주겠소.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지민의 이탈이 이어질 경우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밀턴 포레스트 씀-

편지를 다 읽은 하먼 자작은 편지를 북북 찢어 버리며 외쳤다.

“이 버릇없는 애송이가?!”

잔에 물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가득 찼던 하먼 자작의 인내심도 이제는 한계에 달했다.

편지의 내용은 무례를 넘어서 대놓고 자신의 무능함을 비판하며 시비를 거는 내용이었다.

새까맣게 어린 밀턴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 참을 수 있을 정도로 하먼 자작은 인내심이 강하지 못했다.

“기사들을 모아라! 지금 당장 포레스트 영지를 공격하겠다.”

“영주님 조금 고정… 어억!”

퍼억!

하먼 자작을 말리려는 집사는 그대로 하먼 자작의 발길질에 뒤로 뒹굴어 버렸다.

“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결국 하먼 자작은 다른 두 귀족과 맺었던 약속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즉시 군을 일으켰다.

“밀턴 포레스트! 내 직접 네놈의 목을 쳐서 이 분을 풀 테다.”

분노에 가득 찬 하먼 자작은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하먼 자작은 선전포고도 없이 바로 군을 일으켰다.

아무리 영지전, 아니 오히려 영지전이기에 승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명분과 수순이 중요한 법이지만….

어지간히 열이 받은 하먼 자작은 이대로 불시에 포레스트 영지를 공격해서 당황하고 있는 밀턴의 목을 치겠다, 라는 나름의 지략(?)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주군, 하먼 자작의 군대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래? 예상대로군.”

선전 포고를 하든 말든 밀턴은 이미 정찰망을 만들어서 하먼 자작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밀턴의 옆에 있던 제롬은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생각보다 더 단순하군요. 편지 한 장에 낚여서 군을 움직이다니.”

“시골 귀족 주제에 고집 하나는 어디 공작 수준인 인간이거든. 나한테 모독을 당한 순간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다 사라졌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쉽게 낚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미끼도 안 단 바늘을 덥석 물어 버린 느낌이군요.”

“물고기가 아니라 개구리지. 생각 없이 움직이기만 하면 일단 입에 넣고 본다는 점에서 말이야.”

밀턴은 조소를 지었다.

일단 적이 움직였다는 시점에서 밀턴의 첫 번째 계략은 적중했다.

아무리 이길 자신이 있다고 해도 세 개의 영지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좀 문제였다.

그래서 밀턴은 세 개의 영지 중에 한 개를 우선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 계략을 짰다.

그 대상으로 찍힌 것이 하먼 자작이었다.

하먼 자작의 성격이 급한 것은 인근에서 유명한 일이었고, 일전에 만남에서 그 소문의 진위 여부까지 직접 확인했다.

그래서 밀턴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편지를 보내서 하먼 자작을 도발한 것이다.

사실 편지가 안 통하면 제2안, 제3안으로 계속해서 시비를 걸 수 있는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것도 없이 편지 한 장에 하먼 자작은 덥석 낚여서 군을 움직인 것이다.

“병력의 규모는 어느 정도지?”

“예. 겉으로 보이기에는 총 600명 정도입니다.”

“600? 예상보다 더 많군.”

“예. 용병을 고용해서 요 근래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영지민들도 대거 동원했다고 합니다. 무장이 빈약한 남자들이 대량으로 섞여 있었습니다.”

“영지민을 동원했다고?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군요.”

영주에게 있어서 영지민은 보호의 대상이다.

자신의 영지에서 살게 해 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는 동시에 그들을 돌보고 지켜야 할 의무가 발생한다.

물론 국가적으로 큰 전쟁이 벌어져서 징집령이 떨어지면 영지민들에게도 강제 징집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국가에서도 최후의 수단이다.

그런데 국가 단위의 전쟁도 아니고 영지전에서 영지민들을 강제 동원하다니?

이건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저버린 행위였다.

‘원래 쓰레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경우 없는 놈일 줄은 몰랐군.’

밀턴은 어이가 없었고, 제롬의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혐오감이 드러나 있었다.

“주군,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제가 당장 하먼 자작의 목을 치겠습니다.”

제롬은 당장이라도 군을 이끌고 출격하겠다는 듯이 기세가 등등했다.

원래도 그런 작전이었다.

제롬을 선두로 해서 단숨에 적진을 일점 돌파한 뒤 적의 수뇌부를 친다.

단순하지만 이건 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머리수에서 열세라도 군의 질적으로는 압도적인 우위에 있으며 무엇보다 제롬이 선두에 선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시골 영지에 익스퍼트의 기사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그냥 익스퍼트도 아니고 최상급인 제롬이 선두에 서서 닥치는 대로 밀어붙이면 적은 아군의 돌진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밀턴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자 확실한 승리수였다.

그런데….

“잠깐 작전을 수정하도록 하지.”

밀턴의 말에 제롬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주군.”

“적이 영지민을 동원했다고 하잖나? 그렇다면 무고한 이들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좋겠어.”

“아!”

밀턴의 말에 제롬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사실 밀턴은 이번에 하먼 자작을 물리치고 나면 영지를 통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롭게 취임한 영주가 자신들을 학살했던 인물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초반에 인심을 잡기가 어려워질 것 같으니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일반인들의 피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줄일 수 있는 건 줄여 봐야지.”

밀턴이 그렇게 말하자 제롬은 크게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그렇군요. 미처 거기까지는 제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롬은 단연코 기사도를 신봉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출신은 고위 귀족이었다.

가끔 평민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부족한 면이 보이고는 했다.

지금도 영지민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는 했지만 그건 하먼 자작의 비열함에 관한 것이지 강제로 동원된 영지민들의 억울함에 공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부분을 밀턴이 일깨워 주면 바로 수긍하는 도덕심은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제롬이다 보니 어떤 상황이라도 약자를 배려하는 밀턴의 모습은 한층 더 이상적인 주군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 이분을 평생 따르기로 한 것은….’

제롬은 밀턴을 향해서 남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하먼 자작은 군을 이끌고 포레스트 영지로 당당하게 진군했다.

‘그 애송이 녀석, 내가 갑자기 군을 이끌고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을 거다.’

그는 자신의 기습이 무척 절묘한 작전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절묘하다기보다는 전쟁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룰인 선전 포고도 생략한 야만적인 행태일 뿐이었지만 원래 소인배들은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에 도가 튼 족속들이다.

하먼 자작의 머릿속에는 지금의 기습이 비겁하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대로 포레스트 영지를 급습해서 밀턴의 목을 치고 그 후에 얻을 달콤한 이익에 관한 미래를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주군! 척후병이 전방에 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전방에 적을?”

“예. 포레스트 영지의 기사 둘이 군사 50을 이끌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50? 하하하하하… 아무리 시골 영지라고는 해도 고작 50이라고?”

처음에 적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 살짝 긴장했던 하먼 자작이었지만 적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알고 나자 오히려 기가 더 살았다.

“지금 당장 쓸어버려라.”

“기사단을 출동시킬까요?”

“아니. 기사단은 아껴둔다. 그 대신 징집병을 앞장세우고 그 뒤에 병사들을 돌격시켜라.”

하먼 자작은 적의 숫자가 아무리 적다고 해도 기사단 전력이 혹시나 손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징집병을 앞장세웠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징집병들의 뒤에서 창을 겨누며 말했다.

“대형을 정돈해라. 자작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돌격하는 거다.”

징집병들은 갑옷 하나 없었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낡은 창뿐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싸우기도 싫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의 뒤에는 병사들이 날카로운 창을 세우고 있었기에 명령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전열을 만든 하먼 자작의 군대는 릭과 토미가 이끄는 적들과 조우했다.

“멈춰라! 너희들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영지를 침범한 것이냐? 여기가 포레스트 자작가라는 것을 모르느냐!”

전방에서 호통을 치듯이 외치는 사람은 포레스트 영지의 기사인 토미였다.

그런 토미를 알아본 하먼 자작의 기사가 보고를 올렸다.

“포레스트 영지의 기사인 토미라는 놈입니다. 그 옆에는 릭이라는 놈입니다. 둘 다 포레스트 영지의 평민 기사들입니다.”

“흐음… 그렇군.”

상대가 기사라는 것을 알고 나자 하먼 자작은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 직접 말했다.

“나는 레이더 하먼 자작이다. 오늘 이 시간부로 포레스트 영지를 접수하기 위해서 왔다. 얌전히 항복하면 그대들을 나의 휘하로 받아들이겠다.”

하먼 자작은 최대한 근엄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병력의 차이도 압도적이니 자신이 나서서 회유를 하면 적도 이대로 항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미친 늙은이야! 어디서 선전 포고도 안 하고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쳐들어와서 항복? 너 같으면 쥐새끼한테 항복하겠냐?”

하먼 자작에게 돌아온 것은 릭의 욕설과 도발이었다.

“뭐… 뭐라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하먼 자작에게 릭이 다시 말했다.

“이제 귀도 먹었느냐? 너 같이 X도 안 서는 겁쟁이를 주군으로 모시느니 차라리 발정난 당나귀한테 기사 서약을 하겠다!”

“푸하하하하….”

“맞습니다. 기사님.”

릭이 걸쭉한 욕설을 내뱉자 포레스트 영지군 쪽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하먼 자작은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모욕에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모두 죽여주마! 공격하라!!”

하먼 자작의 외침에 600의 병력이 돌진했다.

공격해 오는 적을 보며 릭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자, 와라. 모두 상대해 주… 아앗! 왜 이래 인마?”

옆에서 토미가 릭의 귀밑에 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작전 잊었냐? 여기서 싸우면 어떻게 해?”

“…·아!”

탄성을 지르는 릭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정말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토미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병력을 지휘했다.

“적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 전군 후퇴해서 후방의 병력과 합류하라!”

“옛! 알겠습니다.”

토미의 지휘에 따라서 포레스트 영지군 50은 그대로 후퇴를 시작했다.

마치 준비되었다는 듯이 빠르게 후퇴하는 적을 보며 하먼 자작은 더욱더 애가 달았다.

“추격하라!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마라!”

“주군, 놈들의 후퇴가 빠릅니다. 징집병들의 걸음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곁에 있는 기사의 말에 하먼 자작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놈들을 내버려 두고 본대만으로 놈을 추적하면 되지 않나?!”

“그랬다가는 전열이 헝클어집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천천히… 윽!”

짜아악!

“이 멍청한 놈!”

하먼 자작은 말채찍으로 기사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기사에게 호통을 쳤다.

“적은 고작 50이 아니냐? 전열은 무슨 놈의 전열이냐! 본대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오나 정석대로라면 전열의 안정이 우선….”

“멍청한 놈! 아직도 이해를 못 했느냐? 적들이 후퇴하기 전에 본대와 합류한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여기서 놈들을 놓치면 그때는 더 힘든 전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정석이냐?!”

얼굴이 잘 익은 당근처럼 붉어진 하먼 자작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여기서 기사의 조언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하먼 자작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대로 행동 하느냐? 하지 않느냐? 라는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고집만 내세우는 지휘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전혀 모르는 하먼 자작은 그저 자신의 고집대로 부하들이 행동하기를 독촉했다.

“어서 추적하라. 어서!”

결국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하먼 자작의 외침에 어쩔 수 없이 본대가 먼저 적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몇몇 기사들이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릭이라는 놈의 목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하먼 자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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