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오오….”
밀턴은 자연스럽게 자기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오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밀턴 포레스트가 수도에 살면서도 봤던 우아한 귀족 영애들.
그리고 전생의 박문수로 살면서 TV에서 봤던 수많은 미인들.
그 전부를 포함해서 지금 밀턴의 눈앞에 있는 여인보다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은 없었다.
눈부신 금발에 호수처럼 파란 눈동자, 백옥을 연상하게 하는 티 없이 맑은 피부와 완벽한 조형미로 만들어진 이목구비.
무엇보다 그녀의 분위기가 대단했다.
온몸을 휘감고 있는 그 분위기는 청순함이나 섹시함 같은 여성미가 아니라 어딘가 신비함을 겸비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흔히 미모를 칭찬할 때 넋을 빼앗는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걸 실제로 체험해 보는 것은 밀턴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처음 뵙겠소. 밀턴 포레스트 자작이오.”
잠시 넋을 잃었던 밀턴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입니다. 샤를롯트라고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우아하게 인사를 하는 그녀를 보며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성이 없다. 평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서 있는 자세, 목소리의 톤, 그리고 인사를 할 때의 예법까지….
눈앞에 있는 여성의 예법은 시골 귀족인 밀턴이 오히려 어색하게 보일 정도로 완벽했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하게 예법을 주입받아서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베여 있지 않으면 이런 모습은 나올 수 없다.
‘평민은 아니야. 성을 말하지 않는 건 신분을 숨기는 거겠지. 어쩌면 샤를롯트라는 이름 자체도 가명일 수 있겠어.’
밀턴은 지금 눈앞에 있는 여성에 관해서 짐작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상대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법.
밀턴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하겠소. 당신들 덕분에 큰 수익이 생겼소.”
“감사합니다. 이걸 계기로 서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좋겠네요.”
살며시 미소 지으며 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좋은 관계를 넘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는 호구로 전락할 것만 같았다.
‘무슨 여자 미모가….’
여자의 미모를 무기로 분류한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은 틀림없이 마스터급일 것이다.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바로 잡으며 밀턴은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뭐가 말이죠?”
“경매의 낙찰가 말입니다. 그런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
밀턴의 말에 여인은 아무런 말없이 눈앞에 있는 차를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효율적인 침묵으로 대답을 회피한 그녀에게 밀턴이 말을 이었다.
“다른 상단들이 이미 저에게 항의를 했더군요. 미리 샤를롯트 상단과 밀약을 맺은 상태에서 무의미한 경매를 연 이유가 뭐냐고 말이죠.”
“어머? 그런 나쁜 사람들이 있었나요?”
“제가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셨으니까요.”
“물건을 비싸게 사는 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군요. 저희가 자작님에게 뭔가 폐라도 끼쳤나요?”
“그건 아니지요.”
“그렇다면 제가 자작님에게 추궁을 당할 이유는 없군요. 안 그런가요?”
‘이 여자 봐라….’
밀턴은 상대방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분명한데 그걸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애당초 내 호출에 순순히 응했다는 것은 상대도 목적이 있다는 것일 테지? 그럼 밀지만 말고 한번 당겨 볼까?’
밀턴은 정색을 하고 여인에게 일단 한발 물러나듯이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군. 내가 호기심이 조금 과했던 모양이오.”
“…….”
“그럼, 이제 우리들 사이에 더 볼일은 없는 모양이군. 경매의 물건을 성공적으로 낙찰한 것을 축하하오. 그럼 이만….”
밀턴은 이제 볼일은 다 봤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샤를롯트 상단주의 뒤편에 서 있던 지부장이 다급하게 밀턴을 붙잡았다.
“쯧….”
그 모습에 상단주인 여인은 혀를 찼고, 밀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너희들도 뭔가 목적이 있었으니 내 호출에 응한 거겠지.’
아마 밀턴이 부르지 않았다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저쪽에서 자리를 마련했을 것이다.
밀턴은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면서 여인에게 말했다.
“용건이 남아 있다면 말해 보시오.”
밀턴의 말에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시간을 끌어도 유리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님. 작위를 이어받자마자 선대의 빚을 지고 자신의 영지와 작위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하셨더군요.”
“작위는 엄밀히 말하면 내가… 뭐, 중요한건 아니니 넘어갑시다.”
“예. 그리고 우리 상단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전선에 뛰어들었구요. 그리고… 무척이나 대단한 활약을 하셨더군요.”
“흐음….”
밀턴이 팔짱을 끼고 부정도 긍정도 아닌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힐데스 공화국이 스트라부스 왕국의 보급 창고인 상업 도시 프라티노스를 노린 계략을 훌륭하게 막아 내셨더군요. 그 후에 일선 사령관의 호의로 보급 부대를 운영하며 자금을 축적하셨죠. 그리고 본인이 복무 중이던 까마귀 요새가 내통자의 배신으로 인해서 넘어갈 뻔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기도 하셨고, 또….”
“그만, 됐습니다.”
상대가 자신의 활동 내역을 줄줄이 늘어놓자 밀턴은 손을 흔들며 말을 멈췄다.
“저에 관해서 꽤 많은 조사를 하셨군요.”
“관심이 생겼거든요.”
“예?”
순간 밀턴은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거금을 마련해서 빚을 갚은 걸까?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작님의 행적을 조사하다 보니 이런 정보를 알게 되었답니다.”
“아. 예… 그렇군요.”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냐?’
잠시 실망감을 느끼는 밀턴이었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를 상인이라기보다는 요물로 생각하고 상대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사를 한 결과 저는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은 장래에 반드시 거물이 될 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거 참 영광이군요. 그럼 이번에 경매에서 지불한 금액은 저의 장래를 기대한 투자금이라고 봐도 될까요?”
“예.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원래 자작님과 우리 샤를롯트 상단은 그렇게 원만한 관계가 아니죠. 그러니, 좋은 관계까지는 아니라도 악감정이라도 없앤다면 남는 장사라고 판단했답니다.”
“그렇군요.”
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말에 수긍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거짓말이야.’
밀턴은 눈앞에 있는 여자, 아니 요물이 하는 말을 다 믿지 않았다.
장래성을 바라본 투자?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밀턴의 입장에서는 듣기 좋은 말이기 때문에 더욱더 경계심이 강해졌다.
이런 말을 마냥 흐뭇하게 받아들였다가는 진실을 바라보지 못할 수 있다.
사기꾼들에게 당할 때의 전형적인 패턴 중에 하나이다.
‘진짜 목적이 뭐지? 나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뭘 원하는 걸까?’
밀턴은 여전히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 이들을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같은 편으로 두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했다.
“알겠소. 나의 장래성을 높게 평가해줘서 고맙군.”
“당연한 일이죠.”
“보답으로 앞으로 우리 영지의 상거래는 샤를롯트 상단을 최우선으로 하겠소.”
밀턴이 이렇게 말하자 여인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군요.”
그 후로는 서로 간에 진부하지만 서로를 칭찬하는 대화가 오고 갔다.
샤를롯트는 자신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밀턴과 친분을 만드는 것이라는 듯 거기에만 집중했고, 밀턴 역시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 적절한 선을 유지하며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가는 길에 밀턴은 직접 샤를롯트를 배웅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가시는 길이 편안하시기 바라오.”
“감사합니다. 그럼 포레스트 자작님. 그럼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하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그녀를 배웅하며 밀턴은 말했다.
“타고난 요물이야. 괜한 마음먹지 말고 멀리하자.”
밀턴과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샤를롯트는 생각했다.
‘밀턴 포레스트라… 멀리까지 발걸음을 한 보람이 있기는 한 걸까?’
밀턴의 장래성에 투자 가치를 느꼈다는 것은 정말이었다.
하지만 그 투자 가치는 상인으로서의 안목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밀턴 포레스트라는 인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차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중년의 신사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볼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샤를롯트 님.”
그녀는 마차에 앉아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몰라요. 좀 더 지켜봐야겠어요.”
“그렇습니까?”
“예. 다만 씨를 뿌렸으니 좋은 싹이 트기를 기대할 뿐이죠.”
그녀의 말에 중년 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기로는 포레스트 영지를 노리고 영지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두세요.”
샤를롯트의 말에 중년 신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기껏 뿌려둔 씨가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짓밟히면 투자금만 손해를 볼 텐데요?”
“내가 원하는 결과물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에요. 밟아도 강인하게 일어나서 억세게 자라날 수 있는 잡초죠. 고작 이 정도에서 짓밟힐 인물이라면 그냥 투자금을 잃은 걸로 치고 손 터는 게 나아요.”
그녀의 말에 중년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샤를롯트 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자 그 안에서 샤를롯트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밀턴 포레스트. 과연 내가 원하는 인물일까?”
그 목소리에는 작은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되는 모습을 봤을 때 열등감이나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
좋은 감정은 아니지만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이다.
받아들이고 잘 컨트롤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소인배들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3,000골드? 그 애송이가 그런 거금을 벌었다고?!”
“엄밀히 말하면 3,000골드가 아니고 거기에 가까운….”
“지금 그게 중요한 거냐?!”
정확한 보고를 하는 집사에게 하먼 자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크으으… 그 애송이가….”
하먼 자작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포레스트 영지에 이웃한 세 개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 중에서 하먼 자작은 가장 성격이 급했다.
그리고 성격만 급한 것이 아니라 속도 좁았고, 부족한 능력에 비해서 욕심도 많았다.
그런 소인배가 포레스트 영지의 대박 경매 소식을 듣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건방진 놈. 나이도 어린놈이 감히 혼자서 거금을 벌어?”
옆에서 듣고 있는 집사는 나이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자기 주인인 하먼 자작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밀턴에 관한 욕설을 저주처럼 중얼거리던 하먼 자작은 이대로는 있을 수 없단 생각이 점점 커졌다.
“로스케이즈 백작님에게 서신을 보내서 일을 서둘러야겠어.”
사실 하먼 자작과, 로스와이 자작, 그리고 로스케이즈 백작은 최근에 밀약을 맺었다.
영지전을 벌여서 포레스트 영지를 집어삼킨 뒤 사이좋게 3등분하기로 말이다.
보통 영지전은 이겼을 때 얻을 게 커야 발생하는 법이다.
이제까지 포레스트 영지는 흔한 시골 영지 중에 하나였고, 기껏 영지를 집어삼켜 봐야 중앙에 내야 할 세금이 더 늘어날 뿐인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포레스트 영지에서 풍년이 들고, 또 경매로 거금을 버는 모습을 본 이상 영지의 가치가 변했다.
영지전을 벌여서라도 빼앗으면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많다고 느낀 세 영주들은 은밀하게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시에 군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서로 시기를 맞추기 위해서 거사가 일어날 때까지는 참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먼 자작의 인내심으로는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곧 있으면 완연한 겨울이 된다.
그렇다면 그 전에 군을 움직여서 적을 공격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셋이서 함께 공격을 해서 포레스트 영지를 갈라 먹는 것보다는 혼자서 공격해서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면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먼 자작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유혹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유혹은 대부분이 자신에게 유리한 미래뿐이었다.
압도적인 전과로 승리를 거두고 포레스트 영지를 아래에 둔 다음, 작위도 백작위로 승작해서 이제 로스케이즈 백작도 자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미래 말이다.
당장 군을 움직이기만 하면 그런 황홀한 미래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으으음… 약속은 괜히 해 가지고….”
하먼 자작은 지금 당장이라도 군을 이끌고 포레스트 자작의 영지를 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공격을 하기에는 다른 두 귀족과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똥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하먼 자작의 상태는 몹시 불안했다.
누가 봐도 정신이 불안정한 게 눈에 확 보일 정도로 말이다.
‘제발 이럴 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하먼 자작가의 집사는 속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자작님. 포레스트 영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꼭 무슨 일은 그런 염원을 배신하고 보란 듯이 나타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