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6화 (26/257)

제26화

“170골드?”

“농담이겠지? 아무리 요즘 곡물 가격이 금값이라고 해도….”

이건 보석이나 미술품 같은 사치품을 손에 넣기 위해서 벌이는 경매가 아니다.

식량을 구매해서 다른 곳에 다시 팔기 위해서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산 가격보다 비싸게 팔 자신이 없다면 물건을 구입해 봐야 손해를 볼 뿐이다.

귀리 600포대에 170골드.

여기 있는 상인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 가격으로 구입을 해서는 손해 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70골드 무리야. 이문은 고사하고 본전 챙기기에도 아슬아슬한 가격인데.’

그 전에 155골드를 불렀던 베머릭 상단의 인물은 170골드를 부른 인물을 바라봤다.

물건을 부른 사람은 그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샤를롯트 상단의 지부장 중에 한 명으로 몇 번 거래를 한 적도 있었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획기적인 기획력은 떨어져도 건실하고 신중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이렇게 파격적인 거래를 하다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있는 여인은 누구지?’

베머릭 상단의 상단주는 뒤늦게 샤를롯트 상단의 지부장 옆에 있는 여인 한 명을 눈에 담았다.

얼굴은 레이스가 달린 모자로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애인이나 아내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부장이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을 대하는 태도는 윗사람을 대하는 듯 정중했다.

조금만 생각하니 답은 바로 나왔다.

‘저 여자가 샤를롯트 상단의 주인이구나.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상단주가 직접 나왔다는 말은 샤를롯트 상단이 이번 경매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베머릭 상단의 인물은 이번 경매가 쉽게 풀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170골드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하나, 둘, 셋. 귀리 600포대는 샤를롯트 상단에 낙찰되었습니다.”

땅땅땅!

그렇게 귀리 경매가 끝나고 바로 보리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보리 1,100포대. 시작 가격은 370골드입니다.”

이것도 고가였다.

거의 보리 세 포대당 1골드를 친 것이니 말이다.

작년의 두 배에 가까운 시세였지만 요즘 이 정도면 오히려 싼 거였다.

당연히 상인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400골드.”

“420골드.”

“450골드.”

보리는 귀리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은 식량이었다.

평민들의 주식은 보리에 밀을 약간 섞어서 만드는 보리빵 정도였으니 말이다.

귀리의 경우 가격이 폭락하면 사람이 먹기보다는 말 먹이로 쓰이는 곡물이었지만 보리는 다르다.

가격은 순식간에 500골드를 넘어갔다.

“580골드!”

모두를 주춤하게 한 것은 코넬 상단이 부른 가격이었다.

“580이라… 우리는 무리군.”

“저 가격으로 사서는 이문을 볼 자신이 없다.”

“못 따라가겠어.”

상인들은 저마다 계산을 해봤지만 580이라는 가격은 따라갈 수 없었다.

코넬 상단의 대표는 그런 주변 상단을 보면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는 무리지. 이건 레스터 왕국에서 가장 넓은 유통망을 지니고 있는 우리 코넬 상단이 아슬아슬하게 부를 수 있는 가격이다.’

코넬 상단의 대표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상단인 코넬 상단에서도 이 가격을 넘어가면 이문을 남길 수 없다.

그 말은 다른 상단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가격이라는 것이다.

“580골드 나왔습니다. 이 이상은 없습니까?”

맥스의 확인하는 말에 코넬 상단의 대표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때….

“650골드.”

샤를롯트 상단에서 가격을 올렸다.

순간 코넬 상단의 대표가 울컥했다.

‘샤를롯트 상단? 감히….’

조금 전에 귀리를 매수할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번에 보리까지 가로채려고 하다니….

이제까지 레스터 왕국의 최고 상단으로 군림해온 코넬 상단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코넬 상단의 대표는 손을 들고 외쳤다.

“680골드!”

“오오오오….”

“680골드라고?”

“내 30년 상인 인생에 보리 가격이 이렇게 올라가는 건 처음 보는군.”

주변 상인들의 감탄을 들으며 코넬 상단의 대표는 샤를롯트 상단 쪽을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도 따라올 수 있느냐?’

이건 이미 손익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코넬 상단의 대표는 어느 정도 손해를 봐도 좋으니 레스터 왕국 최고의 상단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이 정도 손해 금액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건 지금 코넬 상단의 대표로 경매에 참가한 남자가 코넬 상단주의 남동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금액이라면 샤를롯트 상단은 손을 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700골드.”

샤를롯트 상단은 태연하게 가격을 올렸다.

“뭐라고?”

“700? 700이라고?”

“미친… 아무리 식량 가격이 올랐다고 해도 보리 1,100포대에 700골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가격으로는 손익을 낼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냐?”

이쯤 되면 다른 상단들은 샤를롯트 상단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700골드 나왔습니다. 더 이상 없으십니까?”

맥스가 장내를 확인했다.

당연히 더 있을 리가 없었다.

상인들이 느끼기에 여기서 가격을 더 올린다고 해도 샤를롯트 상단은 또 따라붙을 것 같았다.

결국….

“700골드에 샤를롯트 상단 낙찰입니다.”

그렇게 샤를롯트 상단에 보리가 낙찰되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밀 800포대입니다. 시작 가격은 400골드로 시작하겠습니다.”

맥스의 말이 떨어지자 이번에 상단들은 앞다퉈서 가격을 부르지 않고 샤를롯트 상단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설마 이것도?’

‘미치겠군. 의도를 모르겠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있나.’

눈치가 보이는 이들은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법.

일단 조심스럽게 경매에 참여를 하자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450골드.”

“480골드.”

“500골드.”

여기저기서 올라가는 가격은 꽤 빠르게 올라갔다.

이제 마지막 물건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원래 밀은 곡물 중에서는 가장 고가이다.

순수 100% 밀로만 만든 빵은 귀족들만 먹는 고급품으로 취급되고, 평민들은 생일이나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먹지도 못했다.

보통 평민들이 먹는 빵은 밀에 다른 곡물을 섞어서 만드는 빵이 대부분이다.

즉, 보리나 귀리에 비해서 밀은 원래 가격이 더 비싼 물건인 것이다.

그러니 경매도 가장 마지막에 붙인 것이지만 말이다.

가격은 어느새 700골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경쟁자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던 무렵….

“800골드.”

샤를롯트 상단이 큰 폭으로 가격을 불렀다.

그러자 다른 상단이 이를 악물고 따라붙었다.

“820골드.”

“850골드.”

상인으로서의 자존심에 불이 붙은 걸까?

아니면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강박 관념 때문일까?

가격은 꽤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넬 상단이 그 경쟁에 종지부를 찍듯이 말했다.

“1,000골드.”

식량 가격이 아무리 올랐다고 해도 밀 800포대에 1,000골드.

이건 틀림없이 왕국의 기록일 것이다.

코넬 상단의 대표는 가격을 부른 후에 샤를롯트 상단을 보며 ‘이래도 따라올 테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샤를롯트 상단의 지부장은 곁에 있는 여인에게 뭔가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놀란 얼굴을 하고 몇 가지를 더 확인하더니 목청을 다듬고 말했다.

“2,000골드.”

이 한마디에 분위기가 확 변했다.

“…….”

“…….”

“…….”

시끌시끌하던 경매장에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10여 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상인들은 정신을 차렸다.

“2,000골드라고?”

“지금… 아니 이게 무슨….”

다른 상단들은 이제 샤를롯트 상단의 저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2,000골드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돈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돈에는 쓰임새가 있는 법.

군사 병기나 귀중품을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식량을 매입하기 위한 가격으로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아무리 곡물 가격이 올랐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가격이다.

뭔가 이면에 다른 의미가 있지 않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상인들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샤를롯트 상단의 노림수는 도대체 뭘까?

‘포레스트 자작가와 샤를롯트 상단이 뒤에서 무슨 거래라도 했던 건가?’

‘이해가 안 가는군. 그럴 거면 뭐 하러 경매를 진행한 거지?’

의문이 상인들의 머릿속에서 회오리치며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무엇 하나 확신은 없었다.

지금 확실한 것은 딱 하나.

이 경매가 끝났다는 것이다.

“2… 2,000골드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맥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좌중을 확인했다.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샤를롯트 상단에 밀 800포대가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샤를롯트 상단에 모든 곡물이 낙찰되었다.

졸지에 이 경매에 참가한 다른 상단들은 닭 쫓던 개 모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밀턴은 이 경매로 인해서 단번에 3,000골드에 가까운 거금을 벌게 되었다.

“총 수익이 2,870골드?”

“예. 그렇습니다. 영주님.”

“이거 실화냐?”

“예?”

“아… 아니, 진짜냐고?”

맥스의 보고를 받은 밀턴은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전생의 말투를 사용하고 말았다.

“예. 정말입니다.”

맥스는 경매에서 있었던 일을 밀턴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샤를롯트 상단, 그 지긋지긋한 인간들이 전량을 다 구입했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영주님.”

“흐으음….”

밀턴은 턱을 괴고 고심에 빠졌다.

이번 경매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예상 수입 금액이 밀턴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밀턴은 잘해 봐야 1,500골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3,000골드에 가까운 금액이 생겨 버린 것이다.

원래 밀턴이 가지고 있던 금액과 더불어서 이제 보유 자금이 1만 골드를 넘었다.

아마도 포레스트 자작가의 건립 이후로 재정 상황이 최고로 풍족한 시기는 바로 지금일 것이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긴 한데….

“무슨 꿍꿍이일까?”

밀턴은 샤를롯트 상단의 목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상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밀턴과 샤를롯트 상단의 사이에 뒷거래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밀턴도 궁금했다.

도대체 왜 샤를롯트 상단이 자신에게 이런 거금을 안겨주는 것일까?

엄밀하게 말해서 샤를롯트 상단과의 사이는 썩 좋지 않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상대의 노림수를 모르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다.

결국 밀턴은 맥스에게 지시했다.

“샤를롯트 상단의 지부장을 불러와.”

“예. 알겠습니다.”

경매도 끝났으니 이제는 만난다고 해도 별로 거리낄 것은 없었다.

잠시 후.

밀턴의 앞에 익숙한 얼굴의 샤를롯트 상단의 지부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지부장의 옆에는 면사를 쓰고 있는 하얀색 드레스의 여인도 함께 있었다.

‘저 여자는… 상단주인가?’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가 여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상단의 이름부터가 ‘샤를롯트’니까 뻔한 것이었다.

다만 레스터 왕국에서도 제법 큰 상단인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는 자신이 일선에 나서지 않고 항상 대리인을 내세웠다.

당연히 변방의 시골 영주인 밀턴은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의 얼굴 같은 것은 모른다.

그저 상황을 봐서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앉으시오.”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부장은 밀턴에게 여인을 소개하며 말했다.

“이분은 샤를롯트 상단의 상단주이신 샤를롯트 님입니다.”

“별로 놀랍지는 않군요.”

뻔한 상황이다 보니 놀랄 것도 없었다.

놀라운 것이 있다면….

“처음 뵙겠습니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

그 상단주 여인이 인사를 하며 얼굴을 가린 레이스를 위로 걷어 올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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