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손님으로 찾아온 영주들을 돌려보내고 밀턴은 행정관인 맥스와 기사단장인 제롬을 호출했다.
그리고 그 세 명과의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두 설명해줬다.
밀턴의 설명을 다 들은 후에 맥스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저놈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라고?”
“…….”
맥스는 밀턴의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있는데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라. 무슨 말을 하던 화내지 않을 테니까.”
밀턴의 허락이 떨어지자 맥스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솔직한 제 심정으로는… 저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식량을 상인들에게 팔아서 우리 영지가 얻는 것은 경제적인 이득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득을 대가로 인근에 적을 만드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행정관은 그렇게 생각하나.”
밀턴은 맥스의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맥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똑똑한 친구이기는 한데… 머리를 쓰는 방면이 책략이나 지략보다는 내정에 더 특화되어 있군.’
밀턴은 고개를 돌려서 제롬을 보며 말했다.
“제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제 생각은 맥스 행정관과는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보게.”
밀턴의 허락을 받은 제롬은 입을 열었다.
“우선, 저들이 영주님에게 한 언행을 봤을 때, 설령 식량을 팔았다고 해도 고마움을 느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저 당연히 받을 권리를 받았다고 생각할 뿐일 겁니다. 그래서야 우호적인 관계가 성립될 리가 없죠.”
제롬의 말에 맥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식량을 팔지 않음으로 인해서 거의 확실한 적을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이번 거래를 통해서 좋은 관계를 만드는 시작을….”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좋은 관계. 그건 눈높이를 대등하게 맞춘 후에야 논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건 제롬 경이 기사이기에 힘의 논리에 의거해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는 싸움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행정관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틀리지 않은 이상론이지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듯하군요.”
둘의 언쟁을 들으면서 밀턴은 기본적으로 제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원래 귀족 출신이라서 그런지 제롬은 귀족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저 세 명이 밀턴에게 무리한 요구를 당당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포레스트 자작가를 깔보았기 때문이다.
귀족 사회는 겉으로 봤을 땐 고고하고 우아해 보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철저한 힘의 논리에 의해서 저울추가 움직이는 사회다.
저들의 인식 속에 ‘포레스트 자작가는 우리보다 격하에 있는 상대다.’라는 인식이 지워지기 전까지는 우호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밀턴은 둘의 언쟁에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
밀턴은 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말했다.
“둘의 말 중에 무엇이 맞는지는 입증할 길이 없다. 과정의 옳고 그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무엇이 맞는지는 나중이 되어 봐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맥스.”
“예. 말씀하십시오.”
“설령 네 말이 맞다고 해도 이미 저지른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예.”
“그렇다면, 지나간 일에 대한 불만은 나중에 얘기하고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 논의하는 게 나의 가신으로서 그대가 할 일이 아닌가?”
밀턴의 말에 맥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아니, 됐다. 나에게 충언을 하는 것도 그대들의 역할이지. 사과할 일은 아니다.”
밀턴은 그렇게 맥스를 납득시킨 후 제롬을 향해서 말했다
“제롬, 현재 병력의 준비는 어느 정도로 되어 있나?”
“예. 그동안 주군의 명령대로 영지군을 새롭게 모집하고 개편한 결과 병력은 순조롭게 증강되었습니다. 현재 총 200인의 병력과 수습 기사 20인.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정식 기사가 네 명 있습니다.”
“200이라… 나쁘지 않군.”
밀턴의 말에 맥스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님은 영지전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당연히 생각해 둬야지. 안 그런가?”
밀턴의 말에 맥스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리고 영지전의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고를 넓히자 맥스가 가장 먼저 떠올린 대안은….
“그렇다면 병력이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바로 병력의 증강이었다.
맥스의 머릿속에는 주변 영지의 병력 상황이 대략적으로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략적인 정보만 놓고 봤을 때 상황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하먼 자작과 로스와이 자작의 영지 병력은 못해도 300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로스케이즈 백작의 영지병은 700이 넘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세 영지의 병력을 다 합치면 총 1,300인가? 꽤 많군.”
밀턴의 태연한 대답에 맥스는 흥분으로 언성을 높이면서 말했다.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도 영지병을 더 모집해서 병력을 늘리거나 혹은 용병을 모집해서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맥스의 말은 정론이다.
적의 숫자가 많으니 우리도 숫자를 늘려서 대응한다.
이건 정말로 정론 중에 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병력을 무분별하게 늘려봤자 그 병력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춰지지 않으면 병력은 예산 낭비일 뿐이야.”
밀턴이 생각하기에 영지의 병력을 지금 상태에서 강제로 늘려 봐야 영지의 부담으로 돌아올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이상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병력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롬 경.”
맥스는 재롬에게 동의를 요구했다.
영지의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는 제롬이라면 병력의 증강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롬은 맥스를 향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지의 기사단장을 맡은 몸으로서 병력을 증강시켜야 한다는 말은 반갑게 들립니다.”
“그렇다면….”
“하지만, 주군의 말대로 그게 영지의 부담으로 이어진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제롬의 말에 맥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영지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병력으로도 이길 수 있다면 굳이 군살을 불릴 필요는 없죠.”
제롬의 말에 맥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적의 병력이 여섯 배가 넘는데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제롬은 지극히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밀턴 역시 제롬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영지의 병력 증강은 필요 없다는 것이지.”
밀턴과 제롬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으며 맥스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주님. 세 영지가 병력을 합치면 그 병력이 무려 1,000이 넘습니다.”
“알고 있다.”
“그리고 기사의 숫자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식 기사로 20명 이상, 수습 기사까지 더하면 50명은 가뿐하게 넘겠죠.”
“대강 그 정도 되겠지.”
태연하게 대답하는 밀턴을 보며 맥스는 답답해서 거의 따지듯이 물었다.
“그런데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밀턴과 제롬은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정말로 승리를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장담을 하니 맥스도 정말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맥스, 전쟁에 관해서는 기사단장인 제롬과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승리를 장담하지.”
밀턴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이제는 진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주가 이름까지 걸고 맹세를 했는데 여기서 더 의심한다는 것은 신하로서의 불충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영주님. 저는 영지전 이후 승리를 생각하며 전후 처리를 위한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게. 아, 그 전에 이번에 벌어질 경매부터 잘 처리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이제 맥스는 괜한 걱정을 하는 것보다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아직 오래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까지 지켜본 결과 밀턴은 허튼소리를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정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할 일에 집중하자.’
맥스가 먼저 물러나고 밀턴은 제롬과 단둘이 남아서 얘기를 나눴다.
둘이 남자 먼저 제롬이 입을 열었다.
“행정관은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큰 모양이군요.”
“똑똑한 친구이긴 하지만 평화로운 영지에서 한평생을 평화롭게 살아왔으니 전쟁에 대해서는 생소함과 두려움이 크겠지.”
“이해합니다. 확실히 포레스트 영지, 아니 이 나라는 평화롭더군요.”
“맞아. 특히 이런 변방은 더욱더 그렇지. 내가 알기로 이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영지전이 50년 전이라고 하던가?”
“부럽기 짝이 없군요. 제 고국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제롬의 말에 밀턴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 지금 같은 시기에는 이게 마냥 좋은 일만도 아니지.”
밀턴이 보기에 사실 이 나라의 사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제롬의 고국인 스트라부스 왕국은 기본적으로 군사력이 강한 나라다.
북방에 자리하고 있는 세 개의 공화국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때문에 귀족들의 기질도 상당히 거칠고 과격했다.
귀족들 간의 결투도 빈번하게 벌어졌고, 영지전도 상당히 많이 발생했다.
자연스럽게 군대는 강군이고, 병사들의 수준도 높았다.
일단, 실전을 거쳐보지 못한 병사는 몇 년이 지나도 전부 신병으로 취급할 정도였다.
거기에 비해서 이 레스터 왕국은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길고 긴 평화는 때때로 인간을 나태하게 만든다.
병사들은 군기를 우습게 여기고 있고 기사들은 수련을 등한시하고 있으며 실제 전쟁을 경험해본 참모도 거의 없다.
나라가 평화로운 것은 정말 좋은 일이지만….
시대가 혼란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가라앉는 것은 그 평화에 안주하고 있는 나라다.
“군사의 질만 따지면 우리 군이 실전도 한 번 거치지 않은 오합지졸들에게 질 리가 없지. 하지만….”
“역시, 1,000이 넘는 적은 조금 거슬리나요?”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다섯 배가 넘는 적은 신경 쓰이는 법이지. 그러니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려면 역시 머리를 좀 써야겠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제롬은 이미 서부 전선에서 밀턴이 우수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 밀턴의 명령이 무엇이든 간에 순종적으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럴 때는….”
밀턴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다.
***
주변 영지의 위협은 둘째로 치고, 일단 포레스트 영지의 식량 경매는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밀 800포대, 보리 1,100포대, 귀리 600포대.
예전이라면 그렇게 큰 양은 아니었지만 요즘 같이 식량 가격이 폭등한 시기에는 상당한 양이었다.
그러니 많은 상단에서는 어떻게든 물량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경매 당일.
여러 상단들이 경매장에 모였다.
그리고 포레스트 영지의 행정관인 맥스가 직접 경매를 주관하기로 했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에 들어가겠습니다. 경매는 세 차례에 걸쳐서 이뤄집니다.”
그리고 맥스는 여러 상단의 대표들 앞에서 본격적으로 경매를 진행했다.
“먼저 귀리 600포대입니다. 시작 가격은 100골드입니다.”
곡물 중에서 가장 가격이 낮은 귀리가 여섯 포대에 1골드나 했다.
예전 같으면 1골드에 귀리 20포대는 너끈히 살 수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이 가격에서 못 사서 안달인 사람들이 널렸는데 말이다.
“110골드.”
“120골드.”
“130골드.”
경매가 시작되자 바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20개가 넘는 상단이 치열하게 경쟁을 시작했고, 가격은 금방 150골드를 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베머릭 상단이 155골드를 부르자 다른 상단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포기하기 시작했다.
“155골드 나왔습니다. 이 이상은 없습니까?”
맥스가 주변을 확인했다.
그 순간….
“170골드.”
한 명의 남자가 손을 들고 외쳤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상인들은 술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