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포레스트 영지에 남는 식량이 있고 그 식량이 경매로 나온다.
이 정보는 상인들 사이에서 발 빠르게 퍼졌다.
원래 상인이라는 존재는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기에 정보를 퍼트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발 빠른 상인들은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자금을 준비해서 서둘러 포레스트 영지로 향한 것이다.
식량 가격이 전체적으로 오른 상황이기 때문에 물량을 확보하면 할수록 그게 곧 돈이 되는 시기였고, 상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포레스트 영지에 먼저 자리를 잡고 선점했던 상인들만 울상을 지었다.
물량은 적은데 경쟁자가 늘어났으니 물건의 가격이 더 오르게 생긴 것이다.
밀턴은 영지로 몰려오는 상인들의 숫자를 보고 받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경쟁자가 이렇게 많으면 담합은 시도도 못 하겠지?’
이런 기회는 정말 흔하지 않았다.
밀턴은 이번 기회에 최대한 비싼 가격에 식량을 팔아서 돈을 챙기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작님. 손님 분들이 찾아왔습니다.”
집사가 밀턴에게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손님? 누군지 몰라도 다 거절하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 밀턴을 만나기 위해서 시도하는 상단은 많다.
하지만 밀턴은 사적인 만남이 경매의 공정성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모든 만남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게, 상인들이 아닙니다.”
“상인이 아니면 누구라는 거지?”
“그게 …입니다.”
집사가 손님이 누구인지 밝히자 밀턴은 인상을 찡그렸다.
“쯧, 한번 만나는 봐야겠군. 응접실로 안내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집사에게 지시를 내린 후에 밀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밀턴이 응접실에 내려가자 세 명의 중년 남성들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전형적인 중년의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는데 밀턴은 그 세 명을 다 알고 있었다.
밀턴은 그들 중에서 한 명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스케이즈 백작님.”
“그렇군. 자네가 아주 어릴 때 본 것 같으니… 대략 10년 만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로스와이 자작님과 하먼 자작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밀턴은 이 두 명에게 한 박자 늦게 인사를 올렸다.
로스케이즈 백작과 달리 이 둘의 작위는 자작이기 때문에 따로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였던 것이다.
이 세 명의 귀족은 포레스트 영지와 이웃하고 있는 영지의 귀족들이었다.
밀턴의 아버지인 전대 포레스트 자작과 인연이 있었고, 밀턴이 어린 시절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안면을 트기도 했다.
밀턴보다 작위가 높은 것은 로스케이즈 백작 한 명뿐이었지만 연배로 치면 다른 두 명도 밀턴보다 연장자이기 때문에 존대를 해준 것이다.
그러자 두 자작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밀턴에게 말했다.
“가문을 이어받은 걸 축하하오. 포레스트 자작.”
“아직 젊은 나이에 부담이 많겠지만, 힘든 일이 있거든 부담 가지지 말고 상담하시게.”
로스와이 자작과 하먼 자작의 말에 밀턴은 피식 웃어 버렸다.
특히 부담 가지지 말고 상담하라는 하먼 자작의 말은 진짜 개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밀턴이 샤를롯트 상단의 빚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금을 융통해 줄 수 있겠냐고 주변 영지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단 1골드도 빌려준 영주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어째 밀턴은 이 인간들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남자가 자리에 앉고 밀턴은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세 분이 갑자기 찾아오셨다니 놀랐습니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나요?”
빠르게 본론을 꺼내는 밀턴의 말에 세 명은 살짝 당황했지만 로스케이즈 백작이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별것 아니고, 자네가 영지를 이어받았다고 하니 한 번 정도는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군요.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밀턴이 일단 겸손하게 숙이고 나가자 세 명의 귀족들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젊은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로스케이즈 백작님.”
“포레스트 자작은 젊으니까요. 우리가 잘 이해하고 가르쳐야죠.”
세 명의 말을 들으면서 밀턴은 속으로 발끈했다.
‘이 꼰대들이….’
밀턴은 속으로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싱긋 웃으면서 세 명에게 말했다.
“제가 영지를 이어받고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이웃 영지의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올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
“…….”
“…….”
밀턴의 말에 세 명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포레스트 영지의 사정이 어려울 때 철저하게 외면한 이들이 이제 와서 친척 어르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행위를 밀턴이 은근하게 지적한 것이다.
“크흠, 과거는 모두 과거의 일이지. 앞으로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고 영지를 잘 이끌어 가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나?”
로스케이즈 백작이 과거의 일을 더 이상 걸고넘어지지 말고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자 밀턴도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듯이 말했다.
“그렇죠. 다행이도 저희 영지의 일은 잘 풀렸습니다. 여러분들이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죠.”
물론 그 말의 내용은 ‘너희들의 도움 없이도 나는 잘산다.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말이다.
더 이상 밀턴과 대화를 해 봐야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자 로스케이즈 백작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포레스트 자작. 내가 듣자 하니 자네 영지에서 식량을 경매로 내놨다고 하더군. 그게 사실인가?”
‘그럼 그렇지.’
밀턴은 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받았다.
“예. 그렇습니다.”
“허허… 대단하군. 우리 영지에서는 식량이 부족해서 영지민들이 다가올 겨울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말일세.”
“그렇습니까? 이상한 일이군요. 우리 영지는 괜찮은데 말입니다. 혹시 중간 과정에서 징세 업무에 오류가 난 것은 아닙니까?”
밀턴의 말에 옆에서 하먼 자작이 발끈하며 말했다.
“그 무슨 무례한 말인가? 로스케이즈 백작님이 영지민들에게 과한 세금을 물렸다 이 말인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하먼 자작의 말에 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아니냐?’
하지만 밀턴은 속으로 진실을 말해도 겉으로는 가식을 말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저는 그저 저보다 유능하고 연륜도 깊으신 로스케이즈 백작님이 식량 부족의 사태를 초래하셨다고 하기에 이상함을 느꼈을 뿐입니다. 혹시 징세 과정에서 행정 업무를 보는 이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면 하먼 자작님은 로스케이즈 백작님이 고의로 영지민들에게 ‘혹독한’ 세금을 물려서 죄 없는 영지민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하먼 자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여기서 밀턴의 말을 부정하면 로스케이즈 백작은 밀턴보다 무능한 영주가 되거나 혹은 악독한 영주가 되어 버린다.
‘무슨 어린놈이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서 있지?’
로스케이즈 백작은 하는 말마다 굵직한 뼈마디를 심어서 내뱉는 밀턴의 행동이 괘씸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포레스트 영지까지 찾아온 이유를 달성해야 했다.
“어쨌든, 듣자하니 자네 영지에는 꽤 많은 식량을 쌓아두고 있다고 하더군. 맞나?”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냥 적당한 정도죠.”
“그거라도 지금은 감지덕지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어차피 식량을 판다면 우리한테 팔지 않겠나?”
“여러분에게 말입니까?”
“그렇다네. 우리는 이미 식량을 구입할 돈도 가지고 왔네.”
로스케이즈 백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식량의 구입 가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 XXX들이….’
밀턴은 그 가격을 보는 순간 테이블을 확 발로 차 버리고 싶었다.
이들이 제시한 가격은 올해 식량 시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었다.
아니, 올해는 물론이고 작년만도 못했다.
상거래에서 물건을 싸게 사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뭐든지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 가격은 밀턴을 호구로 취급하지 않고는 절대 제시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밀턴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했다.
“이건 지금의 시세와는 맞지 않는 가격이군요.”
“허허… 자네 설마 우리를 상대로 장사를 하려고 한 건가? 오랫동안 이웃하며 친교를 다져온 우리를 상대로 시세를 따지다니?”
“쯧쯧쯧… 전대 포레스트 자작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한탄을 했겠군.”
“그렇게 말이오. 아직 젊어서 그런지 세상을 잘 모르는군.”
밀턴은 눈앞에 있는 꼰대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거슬렸다.
그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는 건지 로스케이즈 백작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보게 포레스트 자작, 우리는 자네와 이웃한 영지의 귀족들이야. 어떻게 보면 같은 파벌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어려울 때 자신의 돈벌이에 급급해서 이웃을 외면해서야 어떻게 귀족의 명예가 살겠는가?”
“그렇습니까? 이웃의 도움을 외면하는 게 명예에 금이 가는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최근 저희 영지가 어려울 때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말입니다.”
밀턴의 말에 로스케이즈 백작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아… 그건 다 지나간 일이지 않나?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문제 아닌가?”
“…….”
자신한테 유리한 입장만 강요하는 로스케이즈 백작의 행동은 역겹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웃기는 것은 밀턴에게 이런 꼰대 특유의 억지 논리가 익숙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혹시 이 인간 전생에 이 부장이었나?’
그렇다.
하는 짓이 딱 전생에 박문수가 다니던 회사의 부장과 똑같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과거를 부하들 머릿속에서 강제 편집시키고 부하들의 실책만 잡아내던 그 부장.
자신이 전생에 박문수의 기억을 각성한 만큼 눈앞에 있는 꼰대 역시 비슷한 전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그 꼰대 때문에 야근 신기록을 갱신하다 과로사 했으니 눈앞에 인물은 그렇게 말로만 듣던 전생의 원수일지도 모르겠다.
전생에서는 이런 꼰대들의 불합리한 억지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직장에서 월급 받아서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다른 두 명은 말할 것도 없고 잘난 척하며 훈계하는 로스케이즈 백작 역시 밀턴의 윗사람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작위가 한 단계 높기는 하지만 그게 수직적인 서열로 작용해서 명령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는 포레스트 영지고 밀턴은 이 영지의 주인으로서 영지에 독립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밀턴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세 분의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완곡하게 돌려서 거절하려던 밀턴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인간들은 그런 완곡한 거절에 납득할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이제는 대놓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밀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먼 자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포레스트 자작! 그게 무슨 말인가?!”
“소리치지 마시죠. 여러분들이 저에게 거래를 제의했고, 저는 그 거래를 거절하는 겁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셋 중에서 성질이 가장 급한 하먼 자작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감히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밀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런 하먼 자작을 바라봤다.
‘뭐? 어쩌라고?’
전혀 흔들리지 않는 밀턴의 싸늘한 눈빛을 보며 하먼 자작은 오히려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이… 이놈이 나이도 어린놈이….’
밀턴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달리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썩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군요.”
밀턴이 축객령을 내리자 로스케이즈 백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이제까지도 충분히 강압적인 말투였지만, 이제는 강압을 넘어서 명백하게 협박의 느낌이 감도는 말이었다.
“그건 백작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시죠.”
밀턴의 말에 로스와이 자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 듣자 듣자 하니….”
“아, 됐네.”
하지만, 그 로스케이즈 백작이 중간에 그 말을 자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을 나가기 전에 밀턴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가까운 시일 안에 또 보세.”
로스케이즈 백작의 이 말은 작별 인사라기보다는 위협이었다.
밀턴은 그걸 다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어떤 도발이든 모두 받아 주겠다고 장담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