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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23화 (23/257)

제23화

“영주님, 샤를롯트 상단의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올 게 왔군.’

집사의 보고를 받으면서 밀턴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접실로 안내해라. 아, 차는 주지 마. 아까우니까.”

살짝 쫌생이 같은 지시를 내린 밀턴이었다.

어쨌든 응접실로 향하자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샤를롯트 상단의 지부장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동안 잘 지냈나?”

밀턴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상대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예. 포레스트 자작님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샤를롯트 상단의 지부장은 밀턴이 전쟁터로 지원한 덕분에 본부에 불려 가서 된통 깨졌다.

잘못하면 지부장 자리마저 빼앗길 뻔했으니 밀턴에게 이를 가는 것도 당연했다.

“내 덕분이라니 다행이군. 자네 안색이 훤한 걸 보니 실로 통쾌… 아니 보람이 있다네.”

“…….”

밀턴이 대놓고 비꼬는 말에 지부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더 이상 밀턴과 대화를 해서 혈압을 상승시키는 것은 그만두고 업무만 보기로 했다.

“포레스트 자작님께서 저희 상단에 빌리신 금액은 총 10,500골드입니다. 처음에 8,500골드의 담보로는 영지를 저당 잡히셨고, 추가로 대출받은 2,000골드의 대가로 작위를 담보로 거셨습니다.”

“내가 그랬었나?”

“그랬습니다. 이제 와서 발뺌한다고 통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영주님이 스트라부스 왕국의 전쟁터에 참전하신 동안 부채가 동결되었기 때문에 이자는 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달 안에 빚의 50퍼센트를 변제하지 않으시겠다면 담보를 압류 조치하겠습니다.”

지부장은 이미 오기 전에 밀턴의 사정을 간략하게 조사했다.

빚을 피해서 전쟁터에 간 것은 좋지만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변변한 공을 세우지 못했다지? 거기다 중간에 불명예 전역을 했다고 할 정도니 엉망진창으로 생활하다가 왔다는 거야.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뭘 해도 안 되는 놈이 꼭 있다니까.’

이게 지부장의 안에 있는 밀턴에 대한 생각이었다.

밀턴이 서부 전선에서 세운 공적은 참모부가 최대한 축소시켰기 때문에 현지에서 멀리 떨어진 샤를롯트 상단의 정보력으로는 수집의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밀턴의 전역 과정은 상관인 넬슨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불명예 전역으로 처리를 했다.

공식 정보가 그렇게 남아 있다 보니 지부장이 밀턴을 한심한 놈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50퍼센트라… 그거 꽤 거금이군. 그걸 이달 안에 변제하란 말인가?”

“계약상 그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저를 원망하지….”

“귀찮게 50퍼센트는 무슨, 전액 변제하도록 하지.”

“말아주시기… 예?”

지부장은 밀턴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밀턴은 그런 지부장에게 한 장의 수표를 내밀었다.

“스트라부스 왕국 발행의 공식 수표일세. 정확하게 10,000골드짜리지. 500골드는 현금으로 준비했으니 갈 때 찾아가게.”

“…….”

“왜 그러나? 안 받을 건가?”

“아. 아닙니다. 그게….”

당황한 지부장에게 밀턴은 수표를 직접 주머니에 꽂아주고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돈도 받았으니 빨리 내 앞에서 꺼져주게. 자네가 절세미녀도 아니고 자주 보고 싶은 인상은 아니군.”

지부장도 밀턴에게 쌓인 것이 많았겠지만 그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샤를롯트 상단에 진 빚 때문에 전쟁터에 뛰어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부장은 확인증을 써 주고 돈을 받은 후에 포레스트 영지를 떠났다.

거의 쫓겨나다시피 내몰린 그는 떠나면서도 영문을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1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 안에 어떻게 이런 돈을 마련한 거지?”

일단 빚을 받았는데도 뒷맛이 엄청 찝찝한 지부장이었다.

상대가 빚을 갚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그는 곧 영지와 작위를 압류하겠다고 본부에 보고했었다.

그런데 상대가 빚을 다 갚았으니 본의 아니게 잘못된 정보를 올린 셈이 되었다.

“제길… 이거 또 깨지는 것 아니야?”

***

빚을 다 갚은 것으로 인해서 이제 밀턴의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

이제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아무래도… 안온하게 살아가기에는 시대가 좀 좋지 않지?’

서부 전선의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밀턴은 그냥 평범한 귀족의 일원으로서 안온한 인생을 살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서부 전선에 갔다 이후 생각이 좀 변했다.

지금의 시대는 사상의 대립으로 인해서 칼이 부딪히는 피가 흐르는 혼란의 시대였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하지만, 큰 전쟁의 배후에는 항상 사상의 대립이 있었다.

북부의 공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전 대륙에 펼친다는 몽상을 절대 접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공화주의가 이 세상을 제패하면 전 대륙에 평화가 찾아오고 낙원이 이룩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쩌는 개소리지.’

당연히 밀턴은 동의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전생을 보내봤던 밀턴이 보기에 공화주의도 허점투성이의 제도였다.

지금의 신분 제도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사회의 시스템이 그런 거다.

사회를 완벽하게 안정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밀턴, 아니 박문수를 비롯한 21세기의 지구인들도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무수한 피가 흐른 후에야 가능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지금 그 피가 흐르는 과정 중에 있다.

혼란은 필연인 것이다.

특히 밀턴이 살고 있는 레스터 왕국은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였다.

스트라부스 왕국과 달리 공화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경에서 대치는 항상 이뤄지고 있었다.

즉,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와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서 살아가려면….

‘힘이 필요해. 권력, 돈, 군사력, 정보력 등등.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시대인 거야.’

밀턴은 현재의 안온한 삶보다는 힘을 키워 미래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지금 시대에 영주로서의 힘이라고 하면 일단 군사력이었다.

중앙의 귀족들과 달리 변경의 봉토 귀족들에게 있어서 군사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영지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안정적으로 진압할 수 있어야 했고, 또 이웃 영지와 마찰이 생겼을 때 영지전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물론 영지전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패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벌어질 수 있는 요지는 항상 준비해 두어야 했다.

다행이도 밀턴에게는 군사력 부분에서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제롬 테이커라는 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가 말이다.

그리고 제롬은 본인의 무위를 떠나서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다.

밀턴을 익스퍼트에 올려놓은 후에 더욱더 의욕이 생겼는지 그 밑에 있는 릭과 토미를 반드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려 놓겠다고 집념을 발휘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 둘은 매일매일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스텟을 살펴보면 조금씩 조금씩 무력 수치가 올라가는 게 보이기도 했다.

“기사의 육성은 제롬에게 맡겨두면 될 테고, 문제는 역시 병사들인가?”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영지의 상태창을 열어봤다.

영지 - 포레스트 영지.

인구 - 7,360명.

자금 - 7,550골드.

주요 생산품 - 밀, 보리, 귀리.

군사력 - 기사 4인, 수습 기사 20인, 기병 10인, 보병 100인. 궁병 50인.

기사와 용병 출신의 수습 기사를 제외하고 순수 병력이 200명이 안 된다.

사실 병사를 더 늘리려고 하면 늘릴 수는 있다.

평민 남성들에게 병사는 꽤 인기 있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모집 공고만 내면 얼마든지 사람이 몰릴 것이다.

하지만 병사는 그냥 모집한다고 다가 아니다.

먹이고,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고, 거기다 다달이 월급까지 챙겨서 줘야 한다.

기사만큼은 아니지만 병사들 역시 만만치 않게 돈이 들어간다.

원래 군대라는 것은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유지비가 든다는 이야기다.

지금 밀턴은 샤를롯트 상단에 빚을 갚고도 꽤 풍족한 자금을 가지고 있다.

7,550골드라는 돈은 틀림없이 포레스트 영지가 생긴 이후 가장 풍족한 재정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무작정 낭비할 수는 없다.

병사를 늘리려면 그 늘어난 병사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역시, 돈을 더 벌어야 하나? 그래도 이번에는 밑천이 있으니 예전처럼 막막하지는 않겠군.”

자고로 돈이 돈을 버는 법이다.

충분한 밑천이 있는 이상 예전처럼 아주 막막한 상태는 아니었다.

실제 밀턴은 서부 전선에서 보급 부대를 운영하면서 상업이 번창한 포레스트 도시의 상인들과 자주 접했다.

덕분에 상거래에 관해서도 아주 생초보는 아닌 셈이다.

‘어디 좋은 투자처라도 없나?’

밀턴이 돈을 어떻게 굴릴지 고심하고 있는 그때.

맥스가 갑자기 밀턴을 찾아왔다.

“영주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정기 보고를 바로 오전에 받았는데 별도의 보고를 해야 한다는 맥스의 말에 밀턴은 무슨 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말해 봐.”

“예. 몇몇 상단에서 우리 영지에서 잉여분의 식량을 구입하겠다고 합니다.”

“식량을? 아아… 그러고 보니 올해 수확이 별로라고 했던가?”

“예. 덕분에 식량값이 꽤 올랐다고 합니다. 거기다 우리 영지는 영주님이 전쟁터에 가셨던 덕분에 올해 세금이 면제된 상황입니다. 덕분에 식량에 여분은 꽤 있습니다.”

“그렇군. 여기서 식량을 팔면 돈 좀 만질 수 있겠어.”

밀턴은 탄성을 질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미 자신의 수중에는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놔두고 괜히 다른 곳에 돈을 투자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어느 상단에서 접선을 했지?”

기대감을 품고 물어보는 밀턴에게 맥스가 준비해온 명단을 읽었다.

“코넬 상단, 샤를롯트 상단, 베머릭 상단, 로마니아 상단, 그리고….”

“잠깐, 잠깐… 도대체 상단이 몇 개나 붙은 거야?”

밀턴의 말에 맥스는 서류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총 아홉 개의 상단에서 식량을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아홉 개?”

밀턴은 깜짝 놀랐다.

포레스트 영지는 꽤 외진 곳에 있는 궁벽한 시골 영지다.

상단은 1년에 두 번이나 들릴까 말까한 정도인데 무려 아홉 개가 찾아오다니?

밀턴이 알기로는 자신이 태어나고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식량 가격이 그렇게 올랐나?”

“예. 흉년도 흉년이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식량을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격이 올랐고 상인들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사적이라고 합니다.”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식량을 수입해…? 아아아. 그렇군.”

밀턴은 상황을 이해했다.

스트라부스 왕국은 올해 봄이 오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회색 산맥의 겨울이 길기는 해도 4월이면 눈이 녹고 군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힐데스 공화국이 흉년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본격적으로 밀어 버릴 생각으로 군을 동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대군이 움직이면 그 대군을 유지하기 위한 물자도 대량으로 필요한 법.

자국의 식량 생산량이 결코 나쁘지 않은 스트라부스 왕국이 수입까지 해서 군량을 준비한다면 진짜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덕분에 주변 국가인 우리나라의 식량 가격도 폭등하는 것일 테고 말이야. 나로서는 잘된 일이군.’

밀턴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지금 우리 영지에 식량의 잉여분은 얼마나 있지?”

“밀 800포대, 보리 1,100포대, 귀리 600포대입니다.”

“그 물량이 없어도 우리 영지의 식량 사정에 문제는 없는 거겠지?”

“예. 몇 번이고 계산했고, 혹시 몰라서 비상 비축분을 따로 빼고 남은 분량입니다.”

맥스의 꼼꼼한 일처리에 밀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그 전량을 상인들에게 경매로 붙인다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정보를 모르는 다른 상단들에게도 은근히 경매에 관한 소식을 알려라.”

“다른 상단에도 말입니까?”

맥스의 질문에 밀턴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야 경쟁에 불이 붙지.”

밀턴은 이번 기회에 한몫을 제대로 챙기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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