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전쟁에서 전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투 후에도 뒤처리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가장 먼저 해야 할 뒤처리는….
“루이스 워커.”
당연히 배신자의 처리였다.
넬슨의 앞에 끌려온 루이스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넬슨은 그런 루이스를 냉엄하게 쳐다보며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공화국과의 내통과 반란, 직무의 방기, 그리고 아군 장교 버틀랜드 리가의 살해 혐의로 너를 즉결 처분한다.”
넬슨의 말을 들은 루이스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웃기지 마라! 나는 워커 가문의 장손이다. 감히 변방의 지휘관 따위가 나를 처형한다고!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루이스는 여기까지 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넬슨은 놈의 개소리에 대꾸하는 대신 자신의 체인 소드를 들고 천천히 루이스의 앞에 섰다.
그러자 루이스는 더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루이스 워커다! 워커 가문의 장남이란 말이다! 듣고 있냐?! 이 망할 늙은이야! 내 목에 칼이 닿기만 하면 너 따위는….”
스팟!
루이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넬슨의 검은 빠르게 빛살을 그렸다.
그리고….
툭!
악과 독기가 가득한 표정 그대로 루이스의 목이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넬슨은 그런 루이스의 목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었다면 좀 더 출세했을 거다.”
워커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는 가문이라고 해도 넬슨은 루이스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루이스의 목을 날려버린 후에 넬슨의 눈은 그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마레즈 카르디아에게 향했다.
“마레즈….”
“살… 살려 주십시오. 백작님.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이번 전투에 공헌한 바도 있지 않습니까?”
마레즈가 다급하게 하는 말을 들은 넬슨은 고개를 돌려서 밀턴을 바라봤다.
그리고 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합니다.”
이번 전투에 있어서 프레드릭의 작전은 완벽한 듯 보였지만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바로 루이스 워커가 설득(?)했다고 생각한 마레즈 카르디아가 변수였다.
마레즈는 루이스가 버틀랜드를 죽이며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일에 끼어든 인물이었다.
계획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불안했다.
특히 그가 불안한 이유는 그의 가족이었다.
루이즈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가족도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쓰레기였다.
하지만 마레즈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일지언정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착 정도는 있는 인물이었다.
이대로 계획이 성공해서 공화국에 성공적으로 망명하게 된다고 해도 스트라부스 왕국에 남아 있는 자신의 가족에게는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가족 중에 한 명이 공화국에 망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가족들은 모두 노예로 떨어져 버린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고심 끝에 마레즈는 루이스를 배신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다만, 어떻게 배신을 해야 이 계획을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생각한 것이 밀턴이었다.
‘밀턴 포레스트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야.’
평소에 뒤에서 뭐라고 지껄이던 간에 마레즈도 알고는 있었다.
자신보다 밀턴 포레스트가 훨씬 더 유능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마레즈는 남몰래 사람을 보내서 밀턴에게 상황을 알린 것이다.
프라티노스에서 보급품 구입을 하고 있던 밀턴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골 때리는 놈이 사고를 크게 치는군.’
이제까지 자신을 바라보는 루이스 워커의 눈빛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밀턴이었다.
어차피 내년쯤에는 제대 계획이 있었고 그 후에는 전혀 볼 일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설마 이런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주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요새로 귀환하시겠습니까?”
옆에서 제롬이 하는 말을 들은 밀턴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 그것보다 우선은….”
밀턴은 프라티노스에서 병력을 빌려 총 500명의 병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까마귀 요새로 향한 게 아니라 우선은 워커 가문의 상단 행적부터 찾았다.
적들이 워커 가문의 상단으로 위장한 채 이동한다는 정보를 안 이상 우선 후속 부대부터 끊어버려야 했다.
‘지금 당장 요새로 귀환해 봐야 적을 이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러니 철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렇게 해서 밀턴은 즉시 워커 가문의 상단으로 위장해서 이동 중이던 공화국군을 공격해서 그들을 격멸했다.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장 깃발을 훔치고 그들의 옷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제 요새로 돌아간다! 루이스 워커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려주자!”
“옛. 주군!”
그렇게 해서 까마귀 요새로 돌아간 밀턴은 적의 뒤를 치고 요새를 구원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레즈 카르디아가 완전히 배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틀린 일입니다.”
밀턴이 이렇게 말하자 넬슨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을 했다.
결코 길지 않은 그 시간이 마레즈 본인에게는 10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넬슨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달려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넬슨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루이스 워커와 똑같은 죄로 다스려서야 형평성이 맞지 않겠군.”
“하아아아….”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마레즈였다.
“하지만!”
그러나 넬슨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동료인 버틀랜드 리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외면한 죄. 이유가 어찌 되었든 공화국에 협력을 한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목을 날려 버리기에는 충분하지.”
“백… 백작님,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마레즈는 양팔이 묶여 있지만 않았다면 넬슨의 바지라도 잡고 늘어질 듯했다.
그런 마레즈에게 넬슨이 최종 선고를 내렸다.
“마레즈 카르디아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 복무 기간을 10년 더 늘린다.”
“10… 10년?”
이제 내년이 되면 전역이 예정되어 있던 마레즈에게 있어서 넬슨의 선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쯧쯧쯧… 불쌍한 놈.’
밀턴은 그런 마레즈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전생에 군에 갔다 온 밀턴이었기에 제대의 간절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복무 기간이 10년 연장된다니….
‘불쌍해 죽겠네.’
진심으로 동정이 가는 밀턴이었다.
“백…. 백작님. 10년이나 더 복무하라 하는 말씀은 너무….”
“왜? 부족하면 20년으로 해줄까?”
“아, 아닙니다.”
마레즈는 푹 늘어진 표정이었지만 그냥 체념해 버렸다.
그렇게 배신자들의 처벌을 끝냈다.
그리고 넬슨은 밀턴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가장 먼저 꺼낸 단어는….
“자네 나라로 돌아가게. 밀턴.”
이었다.
밀턴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이해를 한 밀턴이 되물었다.
“아니, 저는 아직 복무 중인데 어떻게 돌아가란 말입니까?”
“전역 서류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해 주지. 자네는 어서 돌아가게. 최대한 빨리.”
밀턴에게 빠르게 돌아가라고 말하는 넬슨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밀턴은 그런 넬슨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제가 위험한 겁니까?”
그 한마디에 넬슨의 표정은 침통해졌다.
“미안하네.”
“백작님의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 나라의 일이지. 정말 미안하네.”
넬슨이 밀턴을 빨리 전역시켜 버리려고 결심한 것은 밀턴이 또 한 번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서부 전선의 참모부에서는 외국의 귀족들이 자국의 귀족들의 기를 죽일 정도로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밀턴이 새운 공적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귀족인 루이스 워커의 배신을 타국의 귀족인 밀턴이 나서서 정리해 준 것이다.
이것을 공론화시키는 순간 참모부에서는 밀턴을 눈엣가시 취급할 것이다.
거기다 워커 가문도 문제였다.
“루이스 워커 자체는 쓰레기였지만, 놈의 가문은 스트라부스 왕국 안에서도 20위권 안에 들어가는 거부일세. 아마… 자네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밀턴은 화를 내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조국의 더러운 부패를 이야기해 주는 넬슨의 침통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자네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네를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는 것뿐일세. 다행히도 자네는 타국의 귀족이니 내가 전역을 시키면 이대로 돌아가면 되겠지.”
넬슨의 말을 다 들은 밀턴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내년쯤에는 전역할 예정이었으니까 좀 빨라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죠.”
‘어차피 가문의 빚을 갚을 만큼의 돈은 다 벌었으니까 말이야.’
밀턴이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넬슨이 마주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자네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싸워 주었는데… 우리는 그런 자네를 차별과 멸시로 대했어. 정말 미안하네.”
“고개를 드십시오. 백작님의 탓이 아니지 않습니까?”
“…….”
밀턴의 말이 넬슨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한평생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을 긍지로 삼아온 노장에게 있어서 자신의 조국이 썩어빠진 부분을 직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괴로움일 것이다.
특히 그 썩어빠진 부분을 스스로 도려낼 수 있는 힘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는 비참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네.”
이대로 자리에 있어 봐야 끝없이 사과만 들을 것 같았기에 밀턴은 그냥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끌고 온 병력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와아아!”
“만세! 드디어 돌아간다!”
환호성이 터졌다.
이 요새에 와서 밀턴의 지휘하에 들어온 병사들은 섭섭함을 표했지만 밀턴과 함께 포레스트 영지에서 참전한 병사들은 이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의 명령으로 먼 타국의 전쟁터에 참가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 그게 좋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보상은 넉넉하게 해줘야겠군.’
밀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모두에게 최대한 빠르게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떠난다.”
“예. 주군.”
“최대한 서두르겠습니다.”
릭과 토미도 밀턴의 명령에 얼굴에 미소를 잔뜩 머금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흘 후.
밀턴이 까마귀 요새를 전역할 날이 왔다.
넬슨이 자잘한 처리를 다 해주었기 때문에 서부 전선의 참모부에 가서 따로 보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정말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모두 잊은 건 없겠지.”
“없습니다. 자작님.”
“빨리 돌아가고 싶습니다.”
병사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빨리 돌아가지. 우리들의 집으로.”
그렇게 말하며 밀턴이 요새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서부 전선의 영웅. 밀턴 포레스트 자작에게 경례!”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요새의 정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어…? 이건 무슨….”
미처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밀턴은 당황했다.
사람의 수를 보건대 이건 까마귀 요새의 인원들만이 아니다.
요새의 모든 병력은 물론이고 밀턴이 떠난다는 말을 들은 프라티노스 도시의 경비대를 비롯해 상인들까지 밀턴을 배웅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떠나는 밀턴에게 덕담을 하듯이 말했다.
“전역을 축하드립니다. 자작님.”
“언제라도 서부에 오시면 환영하겠습니다.”
“항상 몸조심하십시오. 자작님.”
“자작님의 활약은 제가 손자에게까지 전하겠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밀턴에게 준비한 송별식이었다.
밀턴은 살짝 코끝이 찡해졌다.
‘나 이런 스타일 아닌데.’
여기서 눈물이라도 흘리면 엄청나게 쪽팔릴 것 같은 밀턴이었다.
그리고 넬슨이 그런 밀턴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여러 가지로 수고 많았네. 밀턴.”
“아닙니다. 백작님. 혹시 이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 백작님이십니까?”
“설마? 전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야.”
넬슨은 요새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고 밀턴에게 말했다.
“그만큼 자네가 큰 활약을 했다는 거지.”
“…….”
“우리 서부 전선의 군인과 왕국민들은 자네를 잊지 않겠네. 혹시라도 어려운 일이 있거든 편지 한 장만 날리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력을 다하겠네.”
“감사합니다. 백작님.”
밀턴은 그렇게 넬슨과 인사를 올리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요새를 떠났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 만세!”
“서부의 영웅 만세!”
그렇게 밀턴의 서부 전선에서의 생활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