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익스퍼트에 막 각성한 넬슨은 정말 용맹하게 싸웠다.
무너진 목책을 틈타서 적들이 집중적으로 넘어왔지만 입구가 좁았기 때문에 일반 병사들이 아무리 들어온다고 해도 넬슨은 거뜬히 막아냈다.
원래 일반 병사들이 익스퍼트를 잡아내려면 빙 둘러서 포위망을 형성하거나 활이나 석궁 같은 원거리 무기를 동원해서 공격을 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너진 목책을 통해서 넘어가다 보니 오로지 정면에서만 달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직! 콰앙!
그것도 막아야 할 입구가 하나뿐일 때나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쪽도 무너졌다!”
“공격! 여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목책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넬슨의 몸은 하나인데 막아야 할 입구는 이제 몇 개나 생긴 것이다.
“크윽….”
넬슨은 체인 소드를 꽉 틀어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끝인가?’
절망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었다.
“이제야 끝나는군. 3일이나 버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까마귀 요새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프레드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넬슨의 수성 능력은 적의 입장에서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일 정도로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3일이나 버텨낸 것이다.
만약 저 요새의 병력이 200명만 더 많았어도 프레드릭의 공격은 실패했을 것이다.
‘적이지만 대단한 인물이군. 이게 경력이라는 건가?’
프레드릭이 적에게 감탄과 경의를 느끼고 있는 그때….
“하하하… 별것 아니군요. 결국 이렇게 무너질 거면서 왜 무의미한 저항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한때는 같은 편이었던 루이스는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프레드릭은 그런 루이스를 힐끔 보며 웃어 버렸다.
‘이 병신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는 아는 건가?’
프레드릭의 입장에서 루이스 워커는 어떻게 보면 기회를 준 은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해서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다.
‘이런 놈은 어디에 가져다 놔도 내부를 썩게 만들지. 볼일만 끝나면 그대로 처리해야겠어.’
프레드릭은 루이스를 처분해야 할 시기를 적당히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도 후속 병력이 워커 가문의 상단을 통해서 여기로 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 후속 병력이 모두 도착하기 전에는 루이스 워커도 쓸모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시라도 빨리 후속 병력이 도착해서 자신의 옆에 있는 역겨운 인간을 치워 버리고 싶어지는 프레드릭이었다.
그때….
“프레드릭 대위님. 후속 병력이 지금 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일이 다 끝나니 오는군.”
예정대로라면 보급 부대는 어제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전투가 거의 다 끝나가는 오늘에서야 오다니 조금 늦었다.
“이제라도 왔으니 다행이죠. 제가 직접 맞이하러 가겠습니다.”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후방의 병력을 인솔하기 위해서 향했다.
그런 루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프레드릭은 비웃었다.
‘전투에 끼어들기는 싫으니 뒤로 빠진다는 건가? 자기 한 몸은 끔찍하게 챙기는군.’
프레드릭에게 있어서 루이스는 어차피 곧 죽일 인간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서 오시오. 공화국에서 먼 걸음 하느라 수고가 많았소.”
루이스는 후속 병력의 인솔자에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앞으로는 공화국에서 활동할 예정이니 공화국 사람들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안겨 주려고 했다.
그런데….
“…….”
병력의 선두에 있는 자는 별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계속 병력을 진군시킬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루이스는 조금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잠깐, 정지하시오.”
“…….”
역시 상대는 묵묵하게 계속 다가오기만 했고 루이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정지! 거기서 멈춰, 그리고 투구를 벗고 신분을 밝혀라.”
루이스가 강경하게 소리를 치자 그제야 상대는 제자리에 멈췄다.
그리고는….
“여기까지군.”
작게 중얼거리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루이스의 안색은 파랗게 질렸다.
“너… 설마?”
상대의 목소리는 루이스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혈압이 솟구치고는 했으니 말이다.
“밀턴 포레스트?”
“공격!”
루이스의 말에 돌아온 대답은 밀턴의 공격 명령이었다.
“와아아아!”
“죽어라! 이 공화국 개새끼들아!”
동시에 밀턴 포레스트가 이끄는 병력 500명이 적의 후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령관님, 적의 배후에서 아군의 원군이 나타났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분투를 하고 있던 넬슨은 부하의 보고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아군? 소속은 어디인가?”
“밀턴 포레스트 경이라고 합니다.”
“밀턴! 그 친구가 돌아왔다는 건가?”
넬슨은 온몸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검을 위로 들어 올리며 아군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아군이 합류했다! 공화국의 개새끼들을 몰아내자!”
“우오오오오오!”
다 꺼져 가던 불씨가 다시 한번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트라부스 왕국군에 있어서 밀턴 포레스트의 등장은 반전의 희망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공화국군의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재앙이라는 말이었다.
“적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프레드릭은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까마귀 요새는 완벽하게 고립시킨 상황이었다.
포위망을 빈틈없이 구성했고 요새 안에는 전서구 한 마리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적이 원군을 보낸단 말인가?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원인의 규명이 아니라 대처 방안이다.’
프레드릭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살폈다.
후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원군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500명 정도이고 꽤 지친 기색도 보였다.
다만 여기에 호응해서 전방의 요새에서도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자 전열이 흐트러진 것이다.
교과서적으로 이럴 때는 둘 중에 하나를 먼저 진정시켜야 했다.
‘탈출을 위해서라면 약한 곳을 돌파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전투에서 지면 탈출은 어려워. 그렇다면….’
어차피 이 자리에서 끝장을 봐야 하는 전장이다.
프레드릭은 자신이 직접 검을 들고 후방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후방을 먼저 진정시킨다. 나를 따라라!”
프레드릭은 후방을 먼저 진정시키기로 했다.
“대위님을 따르라!”
“공화국의 저력을 보여주자!”
프레드릭이 과감한 결단을 빠르게 내린 덕분에 공화국군은 일단 전열을 유지하며 싸울 수 있었다.
전방에 요새의 병력은 이미 피로가 극에 달한 약졸들이다.
그러니 후방의 병력만 진정시킨다면 이 전투를 이길 수 있다, 라는 계산을 하고 프레드릭은 스스로 검을 뽑고 선두에서 적을 베어 갔다.
“크아악!”
“위험하다. 이놈은 익스퍼트야!”
“쉽게 접근하지 마라! 거리를… 크윽!”
프레드릭은 스스로를 전략가라고 생각했지만 검술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편은 아니었다.
재능도 있었고 노력도 기울였기에 그 역시 익스퍼트의 경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선두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적을 베어 넘기면서 예리한 안광으로 이 부대의 지휘관을 찾고 있었다.
‘저놈이다!’
혼전 속에서 목표를 찾은 프레드릭은 일직선으로 목표를 향해서 질주했다.
“비켜라. 조무래기들!”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을 베어버리며 빠르게 접근한 프레드릭은 단숨에 적의 목을 노리고 일격을 휘둘렀다.
‘끝이다!’
승리를 확신한 일격이 적을 베어버릴 거라고 생각한 그 순간….
“흡!”
카아앙!
상대는 검을 휘둘러서 자신의 검격을 쳐내 버렸다.
“크으으….”
비록 한 번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버렸지만 상대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주군!”
그러자 주변에 호위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그를 둘러싸며 상태를 살폈다.
‘안 좋아.’
프레드릭은 머리를 기민하게 굴려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우선 상대는 적의 지휘관이 맞다.
이놈을 잡으면 전투를 승리로 이끌 확률이 올라간다.
문제는 놈의 주변에 적의 기사들이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놈을 확실하게, 그리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나는 힐데스 공화국의 프레드릭 대위다! 그대에게 일기토를 신청한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프레드릭은 적을 호위 기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일기토를 신청했다.
공화국의 군인과 달리 왕국의 기사나 귀족들은 명예를 중요시한다.
그러니 이렇게 부하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일기토를 신청 받으면 체면 때문에라도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라는 계산을 하고 주변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외친 것이다.
다만….
‘일기토? 내가 왜?’
상대는 명예고 체면이고 별 관여하지 않는 밀턴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단 일격의 교환이었지만 밀턴은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일기토를 할 리가 없었다.
“웃기….”
밀턴이 거절을 막 하려는 그 순간….
“공화국의 개 주제에 두려움이 없구나! 감히 너 따위가 우리 주군에게 일기토를 신청하다니! 그 결정을 지옥에서 후회하도록 하여라!”
밀턴의 옆에 있던 제롬이 큰 소리로 외쳤다.
“…….”
그리고 밀턴은 입을 뻐끔거리면서 제롬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너 왜 그래?’라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호오오… 제법 자신이 있나 보군? 그래.”
상대가 받아들일 것처럼 말을 하자 프레드릭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 우리의 주군께서 네놈의 목을 친히 쳐주실 것이다. 공화국의 개에게는 과분한 영광인 줄 알거라.”
“좋다. 앞으로 나서라. 어디 실력도 그 자신감에 따라오는지 확인해 보겠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밀턴은 억울할 정도였지만 옆에서 제롬이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말했다.
“주군, 무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저 분수도 모르는 놈에게 죽음으로 교훈을 내려 주십시오.”
만약 여기서 밀턴에게 제롬의 충성심이 수치 92가 보이지 않았다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려고 음모를 꾸미는 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오오! 포레스트 경!”
“서부의 영웅!”
“공화국의 개에게 주제를 알려 주십시오!”
“모두 공간을 만들어라! 포레스트 경의 일기토가 벌어진다!”
도저히 거부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제길….’
결국 밀턴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밀턴 포레스트다. 공화국의 검술이 얼마나 엉망인지 견식해 보겠다.”
“우오오오오!”
캉캉캉캉캉!
주변 사람들은 함성을 높이고 무기를 두드리며 밀턴의 등장에 호응했다.
정작 밀턴은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밀턴과 프레드릭은 넓어진 자리에서 대치하고 자세를 잡았다.
프레드릭의 검에는 옅기는 했지만 분명히 오러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역시 익스퍼트였어. 하지만 제롬에 비해서는 별것 아니지.’
밀턴은 눈앞에 있는 상대를 보면서 자신이 아주 못 이길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밀턴에게는 상대의 특성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군인 LV.5
무력 - 71 통솔 - 85
지력 - 82 정치 - 71
충성 - 0
특성 - 매복, 공성
매복 LV.5 : 유리한 지형을 살려서 아군을 매복시킨다. 성공 시 적군에 혼란을 야기할 확률이 크다.
공성 LV.3 : 공성전에서 아군의 지휘력이 올라간다. 병사들의 피로 소모도가 줄어든다.
특성이나 스테이터스를 봐도 눈앞에 있는 상대는 원래 무인이라기보다는 전략가에 가까운 군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것 자체는 대단했지만 무력은 71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밀턴의 무력이 70이니까 사실상 수치는 1밖에 나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 무력 89인 제롬에게 미친 듯이 굴림 당하는데 71짜리 익스퍼트야 충분히 할 만하지 뭐.’
밀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