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유감스럽게도 거기까지 쉽게 풀리지는 않는군.”
프레드릭의 말을 듣고 옆에서 마레즈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어쩔 겁니까? 이래서는 계획과 다르지 않습니까?”
이 일에 반강제로 끼어든 마당에 계획이 어긋나자 불안감이 더 심해졌다.
“걱정하지 마시오. 애당초 이런 경우도 상정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계책이 있는 겁니까?”
“계책? 그게 왜 필요하지?”
프레드릭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저 요새에 지금 남아 있는 병력은 총원을 다 따져도 300명 정도지. 수비 병력이 그렇게 적어서야 제 기능을 다 못 하는 법. 충분히 점령할 수 있소.”
“하지만, 까마귀 요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거기다 넬슨 사령관이 다른 요새로 원군을 요청하면….”
마레즈의 말에 프레드릭은 한심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럴 일은 없지. 이 겨울의 회색 산맥에서 군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소. 오히려 우리가 뒤를 따라오는 후속 병력이 합류하는 것이 먼저일 거요. 거기다….”
프레드릭은 웃으면서 루이스를 보며 말했다.
“저 요새는 이미 완벽하게 고립된 상태일 거요. 그렇지 않소?”
프레드릭과 루이스의 대화를 들으며 마레즈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한 겁니까?”
“저 요새는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으니, 원군은 일절 걱정할 필요가 없소.”
프레드릭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장담했다.
“빌어먹을, 전서구가….”
넬슨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요새의 문을 닫은 다음 수비 병력을 배치하고, 캐르버에게 지휘를 맡긴 후에 넬슨은 즉시 자신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다른 요새에 전서구를 날려서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 겨울에 회색 산맥에서 군을 움직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열 개의 요새 중에 하나라도 적에게 떨어지면 지금까지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회색 산맥의 요새는 하나가 공격당하면 두세 개의 요새들이 원군을 보내서 원호할 수 있도록 유기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하나라도 빠져 버리면 적이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이 되는 것이다.
다른 요새의 사령관들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원군을 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넬슨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죽어 있는 전서구였다.
“루이스, 그놈이 가기 전에 전서구의 먹이나 물에 독을 탔구나.”
넬슨은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이 상황에서 전령을 보낸다고 해도 적의 이목을 속이고 다른 요새까지 도착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즉, 지금 이 순간 까마귀 요새는 완벽하게 적에게 고립된 것이다.
“빌어먹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넬슨이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공격! 저 요새는 거의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다! 겁먹지 말고 공격하라!”
프레드릭의 명령이 떨어지자 약 700명의 병력이 까마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그중에서 약 300명은 원래 스트라부스 왕국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요새였던 까마귀 요새를 공격하는 일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공격하라! 명령에 불복하는 놈은 즉시 베어 버리겠다!”
뒤에서 루이스 워커가 그들을 위협하며 등을 떠밀었다.
실제로 명령에 불복종한 몇 명을 베어버리자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랐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막아라! 요새에 놈들이 가까이 오도록 하지 마라!”
넬슨은 직접 성벽에서 호령을 하며 병력을 지휘했다.
활을 쏘며 적이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적들은 머리 위로 방패를 올리고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겁먹지 마라. 화살 공격 말고는 적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제길….”
적의 지휘관이 말한 대로다.
원래 같으면 요새의 수성은 안에서 화살로 엄호를 하면서 요새의 바로 앞마당에서 진을 치고 싸우는 아군이 있어야 했다.
요새의 벽은 두꺼운 나무로 만든 목책이다.
이 회색 산맥은 습기가 많아서 화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석재를 쌓아서 만든 성벽보다 강도와 높이가 모자랐다.
그래서 벽에 적을 접근하게 하지 않고 앞마당에 아군을 배치한 뒤 망루에서 화살로 엄호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지금 까마귀 요새 안의 병력이라고 해 봐야 300명이 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적은 병력을 나눠서 배치한다는 것은 최악의 자충수였다.
지금은 그저 방벽을 믿고 어떻게든 벽의 위에서 적을 상대하는 게 최선이었다.
“도끼를 가지고 와라. 망루에 갈고리를 거는 놈들은 모두 찍어 버려라!”
결국 망루에 적이 접근하는 일이 벌어졌고, 넬슨은 이 와중에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요새의 벽은 나무로 되어 있다. 계속 공격해라.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돌로 되어 있는 성벽과 달리 요새의 목책은 적이 접근해서 두들기면 점점 더 내구도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콰직! 쾅! 쾅쾅!
여기저기서 적들이 요새의 목책을 공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넬슨의 입장에서는 흰개미가 집을 갉아먹는 소리처럼 들리는 소음이었다.
“제길, 공격해라! 적이 요새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넬슨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부하들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이들도 알고 있었다.
아군의 머리수가 적은 지금 요새의 유리함마저 사라진다면 끝장이라는 것을 말이다.
“꺼져라. 이 공화국 새끼들아!”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위기의식을 느낀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넬슨은 그들의 사이에서 자신도 직접 무기를 들고 도우면서 소리쳤다.
“포기하지 마라! 공화국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우오오오오오!”
“백작님이 함께하신다!”
“공화국 개새끼들을 다 지옥으로 보내 버리자!”
순간 까마귀 요새의 병사들은 사기가 확 올라갔다.
밀턴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감탄했을 것이다.
지금 넬슨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단결과 수성이 동시에 발휘되고 있었다.
단결 LV.7 : 위기 상황에도 부하들을 흐트러짐 없이 통솔할 수 있다. 매복이나 야습 같은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다.
수성 LV.8 : 수성전에서 아군의 사기를 상승시키고 본인의 지휘력이 상승한다.
이 두 가지 특성은 이 상황에서 유용하기도 할 뿐더러 레벨도 무려 7과 8이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를 정도로 열기에 취해서 미친 듯이 싸웠다.
덕분에 요새를 계속 공격해오던 적들의 공격이 조금씩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다니, 역시 하얀 까마귀라고 해야 하나?”
프레드릭은 잘 버티는 까마귀 요새를 보며 살짝 감탄했다.
하얀 까마귀라는 이름은 넬슨에게 붙어 있는 별명이었다.
워낙 서부 전선에 오랫동안 복무한 넬슨은 아군보다 적들에게 오히려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저 요새의 가치는 더 높지. 하얀 까마귀의 목을 가져가면 지휘부에서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부에서 정치적 희생양이 될 위기에 처한 프레드릭은 공적이 간절했다.
그러니 반드시 까마귀 요새를 무너트리는 동시에 넬슨 카디널의 목을 취해야 했다.
“병사들을 3개 조로 나눠라. 그리고 교대로 요새를 공격하라.”
“옛. 대위님.”
“거칠게 공격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적들이 쉬지 못하게 하라.”
“옛. 대위님.”
지금 당장 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프레드릭은 신중하게 필승의 전략을 취했다.
지금 적들의 상태는 말 그대로 능력 이상의 분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사기가 오른다고 해도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신들의 유리함을 살려 교대로 적을 공격함으로써 적들이 쉬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얀 까마귀. 어디 얼마나 버티나 한번 보자.”
적들이 조를 나눠서 교대로 파상 공격을 해오자 넬슨은 자신도 즉시 병력을 나뉘었다.
300명의 병력 중에 50명씩을 중간에 빼서 네 시간씩 강제적인 휴식을 취하게 했다.
“쉬어라! 쉬는 것도 전투다. 쉬는 시간에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놈은 군령으로 처벌하겠다!”
넬슨이 강제적으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귓가에 전투의 소음이 울리는 와중에 잠을 청한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번 쉬는 시간이 끝나면 20시간을 쉬지 않고 싸워야 했으니 말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넬슨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대응책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전투가 지속되면 아군의 체력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첫날, 어찌어찌 버텨는 냈지만 아군의 모습은 상당히 초췌해 있었다.
둘째 날,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기 시작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지휘관인 넬슨의 지휘력은 빛을 발휘했다.
그는 직접 방벽 위를 뛰어다니면서 적을 상대했고 그 옆에서는 캐르버 역시 분투를 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켰다.
“포기하지 마라! 공화국의 개새끼들한테 우리 요새를 넘겨줄 수는 없다!”
“우오오오!”
“백작님을 따르라!”
“공화국 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자!”
병사들은 이제 체력이 아니라 악으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분투를 보면서 정작 넬슨 본인은 잔인한 현실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이대로는 못 이겨.’
이렇게 한계를 쥐어짜는 듯한 전투가 계속될 수는 없었다.
넬슨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셋째 날….
결국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졌다.
우직… 우지지직!
요새의 목책 한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틀을 내내 돌아가며 두드린 끝에 결국 내구도에 한계가 온 것이다.
“넘어간다!”
“계속 쳐라!”
“오오오오오!”
콰아앙!
결국 방벽의 한곳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곳으로 공화국의 병사들이 물 밀 듯이 밀고 들어갔다.
그런 공화국군이 가장 먼저 마주한 인물은 바로….
“감히 어디를!”
천둥 같은 고함과 함께 커다란 체인 소드를 휘두르고 있는 넬슨과 캐르버였다.
“크아아악!”
가장 선두로 요새 안에 진입한 자는 그런 넬슨의 검에 목숨을 달리했다.
넬슨은 평생을 이 서부 전선에 바쳐왔다.
비록 출세와는 멀어졌다고 해도 그동안 굳건하게 이 전선을 지켜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긍지였다.
이 긍지가 침범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 순간 넬슨의 심장에서 다 타버려서 없어졌다고 생각한 불씨가 타올랐다.
“내 시체를 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아악!
넬슨의 검에서 오러가 일렁거리며 피어났다.
“백… 백작님!”
넬슨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 따라온 캐르버도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유저 최상급의 경지에 머물렀던 넬슨이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익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넬슨 스스로도 이건 뜻밖이었다.
검술이 정체된 지도 이미 20년이 넘었다.
그냥 자신은 익스퍼트가 될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벽을 넘어버릴 줄은 몰랐다.
어쩌면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신이 자신에게 선물을 내려준 기분이었다.
“하… 하하하하… 좋다. 어디 화려하게 가 보자!”
넬슨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용맹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노련한 지휘관이 아니라 마치 30년은 더 어리고 혈기왕성한 기사의 모습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