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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7화 (17/257)

제17화

밀턴 포레스트.

이 이름을 듣기만 해도 루이스는 혈압이 솟구쳤다.

약소국인 레스터 왕국의 귀족이면서 고작해야 시골 자작가.

원래 자신이 수도에서 백작가의 후계자로 있었다면 감히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 감히 자신하고 맞먹으려고 하고, 반발하기까지 했다.

감히 건방지게 말이다.

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이 험악한 회색 산맥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얼마 가지 못해 죽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런 귀족들을 얼마든지 봐온 루이스였다.

하지만 밀턴은 달랐다.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건 물론이고 임무가 없을 때는 자기 스스로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밀턴의 모습에 지휘관은 신임과 호감을 보였고 부하들도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마음에 안 들었다.

거기다 전쟁이 나자 밀턴은 더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적당히 몸을 사리며 출전을 미루는 자신과 다르게 밀턴은 항상 선두에 나가서 싸웠고 그때마다 적을 이기며 아군에게 찬사를 받았다.

거기다 적의 계략을 눈치채더니 사령관을 설득해서 바람의 계곡에서 적을 일방적으로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기까지 했다.

루이스가 보기에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지만 주변에서는 밀턴 포레스트의 능력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것도 몹시 귀에 거슬렸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에 밀턴은 삼백인장으로 승격을 했다.

자신의 상관이 된 것이다.

이것만 해도 미칠 것 같은데 밀턴은 보급 부대를 운영하면서 합법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그것도 상당한 금액이라고 들었다.

이제 그 돈으로 가문의 빚을 갚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말도 들렸다.

마음에 안 들었다.

저런 시골 귀족 따위가 자신의 상관이라니?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은 평생 이 회색 산맥에서 썩어야 하는데 저런 시골 귀족의 미래가 더 빛나고 있다니?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마음에 울화통이 터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루이스의 가슴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질투심과 열등감은 이윽고 싹을 틔웠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결국 루이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워커 경.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비밀리에 오라니요? 뭔가 중요한 일입니까?”

루이스는 자신과 항상 어울려 다니던 버틀랜드 리가와 마레즈 카르디아를 은밀하게 불렀다.

이 둘은 자신처럼 영구히 이 회색 산맥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루이스와 친해지면 제대 이후에 워커가의 재력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품고 루이스 곁에 달라붙어 있던 인물들이다.

루이스는 이들의 속셈을 대강 알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존재들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며 붙어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루이스는 거사를 눈앞에 두고 이 둘을 불렀다.

“모두 알겠지만… 지금 이 요새 안에서 우리 처지는 말이 아니오.”

루이스는 우선 불만부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두 명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게 다 그 외국에서 온 촌놈 때문입니다.”

“사령관도 마음에 안 들어요. 외국인을 그렇게 신임하다니, 어떻게 자국인을 내버려 두고 외국인부터 먼저 챙기는지….”

밀턴과 넬슨을 뒤에서 씹는 것 정도는 이들에게 있어서 흔한 일과였다.

이렇게 불평불만을 털어놓으면서 소소하게나마 공감대를 형성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루이스는 살롱의 귀부인들처럼 호박씨나 까려고 이 둘을 부른 게 아니었다.

“나도 두 사람에게 동감이오. 그래서 생각했소. 이제 이 억울한 상황을 뒤집어엎자고 말이오.”

루이스의 태도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안 두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루이스는 주변을 다시 살피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아무래도 이 나라는 가능성이 없는 것 같소. 그래서 말인데….”

이어지는 루이스의 말에 두 사람은 두 눈을 부릅떴다.

“공화국으로 망명을 할까 생각 중이오.”

“헉?!”

“워… 워커 경?!”

둘은 너무 놀라서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이 말을 누군가가 들었다면 세 명 모두 목이 날아갈 것이다.

루이스는 둘의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시오? 어차피 이 나라에 더 이상 있어봤자 우리 미래는 없소. 그렇다면 공화국에 망명해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루이스의 말에 버틀랜드와 마레즈는 서로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엄밀히 말해서 이 나라에서 미래가 없는 것은 루이스 한 명뿐이다.

이 둘은 몇 년만 더 있으면 곧 전역이다.

그렇게 되면 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혜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

당연히 루이스의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크흠… 워커 경.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지는 알겠지만 조금 신중하게 생각합시다. 지금 당신은 반역을 저지르려고 하는 겁니다.”

버틀랜드가 조심스럽게 충고를 했다.

하지만 루이스에게 그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오래 갈 리가 없소. 우리 같은 인재를 홀대하고 외국에서 온 촌놈이나 챙겨주는 나라 따위는 우리가 버리는 거요. 차라리 공화국에 가면 우리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거요.”

루이스의 말을 들은 순간 버틀랜드는 깨달았다.

‘아, 이 인간 제정신이 아니구나.’

애당초 철없는 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나는 못 들은 걸로 하겠소. 그럼 이만….”

더 이상 미친놈과 상종하다가는 자신에게도 똥물이 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버틀랜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등을 돌린 순간….

푸욱!

“커억….”

버틀랜드의 등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박혔다.

“루… 루이….”

버틀랜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뒤에서 찌른 루이스를 바라봤다.

루이스는 그런 버틀랜드에게 냉막한 눈을 하고 말했다.

“배신자는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서서히 쓰러진 버틀랜드에게서 시선을 돌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 마레즈를 바라봤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요?”

마레즈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거부하면 버틀랜드의 뒤를 따를 뿐이다.

“나는… 워커 경을 따르겠소.”

“현명한 선택이오. 그럼, 여기에 지장을 찍으시오.”

루이스는 품안에서 각서를 꺼내 지장을 강요했다.

중간에 발을 빼려고 해도 절대 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다.

설령 여기서 마레즈가 밀고를 한다고 해도 루이스가 반역에 협조하기로 한 각서를 가지고 있는 이상 공범죄를 면치 못하리라.

‘빌어먹을, 이 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몰랐는데….’

마레즈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각서에 지장을 찍었다.

그러면서 루이스에게 말했다.

“공화국으로 막연히 망명한다고 해도 우리가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소. 뭔가 생각이 있소?”

그냥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신도 버틀랜드의 뒤를 따를 것 같았기에 돌려서 말하는 마레즈였다.

별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거기에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다 손을 써 놨으니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루이스는 마레즈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마레즈는 크게 경악했다.

“설마… 그게 정말이오?”

“이미 준비는 끝났소.”

마레즈는 루이스가 진심으로 망명을 결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인간 정말 사고를 치는구나.’

마레즈로서는 발밑에 땅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도리도 없었다.

그날, 넬슨 카디널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내부의 배치랄까?

요새의 분위기랄까?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이 까마귀 요새에서 수십 년을 복무한 그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한 위화감이 감돌았다.

그는 즉시 요새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 내부 순찰을 돌았다.

그 결과 무엇이 이상한지 알 수 있었다.

요새의 내부 인원이 상당수 비어 있는 것이었다.

“프랜시스, 다른 지휘관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자네만 남아 있는 건가?

요새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휘관인 캐르버 프랜시스를 불러서 이유를 물었다.

“예. 포레스트 경은 보급품을 채우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다른 세 명은?”

“워커 경은 주변 정찰을 간다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명도 그런 워커 경이 나간 후에 역시 주변 정찰을 한다고 나갔습니다.”

“세 명 모두?”

“예.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넬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겨울에는 정찰 범위가 극단적으로 좁아진다. 그런데 어째서 백인대가 세 개나 동원될 필요가 있는 거지?”

“그거야….”

캐르버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자신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 세 명이 정찰 나간 방향은 어디지?”

“그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정찰 방향도 알려주지 않고 나갔다고? 그들이 언제 나갔지?”

“저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임무 일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 아침 일찍 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

넬슨은 몹시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정은 떠오르기는 했는데 좋은 예상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요새의 망루에서 보초병이 외쳤다.

“후문에서 정찰에 나갔던 아군이 귀환 중입니다.”

보초병의 말에 요새의 후문에서는 병사들이 두꺼운 방벽을 열기 시작했다.

“후문 개방!”

그리고 넬슨은 그 광경을 보더니 갑자기 급하게 뛰어서 망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문을 닫아라! 어서!”

급하게 소리치는 넬슨의 옆에서 따라온 캐르버가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아군이 귀환하는데….”

“저들은 아군이 아니다!”

“예?!”

당황해서 되묻는 캐르버에게 넬슨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급하게 외쳤다.

“산맥 내부로 정찰 간 병력이 어째서 후문으로 귀환하느냐? 어째서 갈 때는 300명 정도였던 병력이 저렇게 늘어났느냐?!”

“어… 어어….”

“당장 전 병력은 전투태세에 들어가라! 적이다!”

넬슨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와서 넬슨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적… 적이다!”

“전원 전투태세!”

그 순간 까마귀 요새의 전원이 깨달았다.

정말로 적이 쳐들어 왔음을 말이다.

“쳇, 안 맞았나?”

결국 까마귀 요새의 문이 닫히고 프레드릭은 혀를 찼다.

그 옆에서는 루이스 워커가 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눈치챈 모양입니다.”

“아아… 가능하면 쉽게 처리하고 싶었는데, 역시 무리였나 보군.”

프레드릭은 까마귀 요새의 후문이 다시 닫히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넬슨의 판단대로 후방에서 나타난 군은 적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과 원래 까마귀 요새 소속이었던 루이스 워커가 이끄는 연합군이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공화국에 망명하는 대가로 까마귀 요새를 적에게 넘기려고 한 것이다.

비록 회색 산맥으로 유배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해도 워커가의 상단을 이용해서 지령을 내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지령을 이용해서 공화국에 접선해 망명 신청을 했다.

자신을 받아주면 그 대가로 까마귀 요새를 넘겨주겠다고 말이다.

프레드릭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군을 움직였다.

이 겨울에 회색 산맥에서 군을 움직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하지만, 회색 산맥을 넘지 않고 옆으로 빙 돌아서 국경을 넘는 것은 가능했다.

물론 문제는 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내부를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에 적에게 발각될 위험이 높다.

하지만, 이 부분을 해결해 주겠다고 루이스가 나선 것이다.

워커 가문의 상단을 이용해서 병사들을 호위 병력으로 위장시키면 된다.

한 번에 많은 수가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100명 단위로 나눠서 움직인다면 적국의 한복판을 태연하게 가로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프레드릭은 자신의 병력을 나눠서 스트라부스 왕국에 잠입했고, 어제 막 루이스가 이끌고 나온 300명의 병력과 합류한 것이다.

그리고 정찰을 나갔다가 복귀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요새 안으로 진입할 생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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