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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6화 (16/257)

제16화

내년 봄에 대규모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다는 말은 올겨울에 최대한 물자를 비축해 둬야 한다는 말이다.

식량은 물론이고 무기, 의복, 그 외에 야영에 필요한 필수품 등등….

군의 보급 물자라는 것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더구나 내년 봄이 되면 회색 산맥의 요새는 아군이 전진하는 과정에서 물자를 보급하는 중계 기지가 된다.

그러니 비축해 놔야 하는 물량도 작년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확 늘어 있었다.

밀턴으로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배는 물이 들어왔을 때 띄워야 하는 법이지.’

밀턴은 보다 적극적으로 기회를 살리기로 했다.

보급 물자를 구입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호의적인 프라티노스 상인들과 거래를 했다.

자신의 자금을 투자해서 군에 유용한 물건을 제작하게 한 것이다.

밀턴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화기나 화학 무기를 만드는 것은 절대 무리다.

하지만 이 세계의 기술에 약간의 아이디어를 더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은 있었다.

개인용 수통, 야삽, 워커 등등….

이 세계에서는 만들 수 있지만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아서 만들지 못했던 물건들이다.

이런 물건을 상인들에게 만들게 하고 군에 납품을 시켰다.

물건의 유용함을 인정한 서부 전선의 참모부는 물건의 구입을 허락했고, 이로 인해서 사업에 아이디어를 내고 투자를 한 밀턴은 상당한 금액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밀턴은 빚을 다 갚고도 남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

당초 이 전쟁에 참가한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내년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될 즈음에는 제대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시간이 무난하게 흘러가기만 하면 되겠군.’

밀턴은 이제야 문제가 모두 해결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기고 있는 쪽에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지고 있는 쪽은 반대로 절박함을 품기 마련이다.

“빌어먹을, 망할 자식들, 개만도 못한 지휘부 새끼들….”

한 남자의 입에서는 쉬지도 않고 입에서 욕이 나오고 있었다.

“지휘부가 이렇게 썩어빠져 가지고 우리 공화국이 계속 못 이기고 있는 거야. 지랄 맞은 새끼들….”

남들이 들으면 반역죄로 몰려서 처형당할 수도 있는 말이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사실 그의 주변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봐서는 절대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남자의 이름은 프레드릭이었다.

이번에 회색 산맥을 넘어서 적의 보급 창고 역할을 하고 있는 프라티노스를 습격하자는 작전을 계획하고 직접 진두지휘했던 젊은 지휘관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이 참 쉽다고 느껴졌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있었고, 내부에 적을 만들지 않을 정도의 처세술도 있었다.

그러니 그 능력을 살려서 적절한 공을 세우며 고속 승진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동기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승진이 빨랐다.

그렇게 대위까지 진급했고 이제 한 계단만 더 올라가면 드디어 소령의 직위까지 넘볼 수 있었다.

그랬는데….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쳐 버리고 말았다.

스스로도 인정한다.

작전의 실패는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바람의 계곡으로 진입할 때 적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채고 복병을 준비하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승승장구하기만 해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교만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세심하게 준비한 작전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대가는 뼈아픈 패배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인생 전반을 쉽게 살아온 프레드릭에게 있어서 이것은 첫 실패였다.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실패는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를 교훈 삼아서 다음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프레드릭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데 있었다.

애당초 이번 작전은 힐데스 공화국에 닥친 흉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적에게 같은 피해를 안겨주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작전이 실패하자 힐데스 공화국의 지휘부는 프레드릭에게 지금의 보급 상황이 나빠진 것에 대한 책임까지 슬쩍 떠넘겼다.

‘프레드릭이 이번에 무리한 작전을 입안해서 소모한 물자 때문에 보급에 문제가 생겼다.’라는 식으로 덮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비록 자신이 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작전 실패와 보급 상황이 열악해진 것에는 관계가 없다.

상황이 열악해진 것은 공화국에 흉년이 들었고, 동맹인 하노버슈 공화국과 코브르크 공화국이 식량 수출을 반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잘못이란 말인가?

이것은 책임 전가다.

내년 봄에 적이 쳐들어올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지휘부에서는 자신들의 경력에 흠집을 내기 싫어서 일선 지휘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정치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새끼들… 전부 찢어서 개 먹이로 쓰기도 아까울 쓰레기 새끼들….”

프레드릭에게 있어서 가장 답답한 것은 이렇게 지휘부에서 노골적인 찍어 누르기를 하는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공들여서 만들어 놓은 지휘부의 연줄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다.

그들은 프레드릭의 실패를 확정지었고 예전처럼 유능한 장교가 아니라 쳐내야 할 잔가지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결국, 파멸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절망과 좌절은 한때 촉망받던 유능한 젊은이를 빠르게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게 지금의 프레드릭의 처지였다.

그런 그에게 부관이 다급하게 찾아왔다.

“프레드릭 대위님.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이냐?”

술에 취해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프레드릭에게 부관이 다가와서 한 장의 편지를 내밀었다.

“대위님 앞으로 이런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편지? 뭐냐? 내 직위 해제가 확정되기라도 했나? 아니면 영창?”

“그게…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프레드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점차 그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싹 날아갔다.

“이건… 믿을 만한 건가?”

“그 부분은 대위님이 직접 판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프레드릭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고민에 빠졌다.

이게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짜라면….

고민에 빠져 있던 프레드릭은 눈을 질끈 감고는 부관에게 말했다.

“당장 부대를 준비해라. 움직인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프레드릭은 결심했다.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파멸이다.

지휘부에서는 절대 자신을 살려둘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편지의 내용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몸부림일 수도 있었다.

“젠장, 어쩌다 내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었다.

루이스 워커.

그는 워커 백작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위커 가문 작위는 백작이지만 상업으로 번창하여 축적된 부는 여느 후작가들 이상이라고 할 정도로 큰 가문이다.

이 워커 백작 부부에게는 좀처럼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원래 손이 귀한 가문인지 워커 백작은 나이가 40이 넘도록 자식을 보지 못했고, 결국 먼 친척 중에 한 명을 양자로 데리고 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부인이 임신을 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

그게 바로 루이스 워커였다.

백작은 몹시 기뻐하면서 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웠다.

그는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손에 쥐여 주었고 절대 나무라지 않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도록 키웠다.

종종 아들이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다.

딱 잘라 말해서….

부모로서는 최악의 형태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렇게 자라난 루이스 워커는 인내심도 없고, 타인을 배려하는 배려심도 없었다.

그저 이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심만이 가득했다.

그랬던 루이스가 16세에 처음으로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생겼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꽃이라고 불리는 라일라 공주.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루이스는 한눈에 반했고, 아버지에게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워커 백작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라일라 공주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다.

그것도 워커 가문보다 훨씬 더 위세가 높은 바이칼 공작가의 장남과 말이다.

워커 가문이 제법 잘나가는 가문이라고 해도 왕실과 공작가의 약혼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가능 불가능을 넘어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다.

워커 백작은 아들을 잘 타이르고 납득시켰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당하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은 힘으로 손에 넣어라.

이게 루이스가 물렁한 부모 밑에서 자라며 스스로 얻은 교훈이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설령 사고를 쳐도 나중에 아버지가 모두 수습을 해 주겠지.’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간이 크게도 파티장에서 왕실의 공주에게 다가가서 은밀하게 그녀의 술잔에 약을 탔다.

그리고 쓰러진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면서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일단 몸만이라도 자기 여자로 만들면 마음도 따라올 것이다, 라는 무근거로 행동한 루이스였다.

다만 어설픈 루이스의 행동이 성공할 정도로 스트라부스 왕족의 경호는 무르지 않았다.

라일라 공주의 호위 기사들은 이상을 감지하자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들이 라일라 공주를 찾았을 때 놈은 막 라일라 공주의 드레스 끈을 풀고 있었다.

당연히 기사들은 루이스를 제압하고 거칠게 구속했다.

루이스는 중간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개소리를 하며 반항했지만 현행범으로 잡힌 상황에서 그따위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워커 백작은 경악했다.

자기 아들이 종종 사고를 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당장 왕실에서 루이스를 사형시킨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워커 백작은 왕실에 간곡히 용서를 빌고 막대한 돈을 기부하면서 애원했다.

제발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말이다.

그런 워커 백작의 부탁에 왕실은 루이스의 형벌을 감형했다.

사실 루이스를 처형하기 위해서는 그의 죄목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데 그렇게 했다가는 라일라 공주의 명예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러니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좋겠다는 정치적인 판단도 있었다.

그 결과, 루이스 워커는 평생을 회색 산맥에서 종군하며 살아야 했다.

목숨을 살렸지만 회색 산맥을 벗어나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았고, 그는 평생 국가를 위해서 공화국과의 전쟁에 몸을 바쳐야 했다.

워커 백작은 막대한 재산을 소모했지만 아들을 살렸다는 것에 그저 안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루이스 워커는 회색 산맥에 처박힌 이후로 매일 불만이 축척되어 왔다.

화려한 수도에서 생활하던 자신이 전쟁터에서 험악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자신을 구해주지 못하는 아버지도 싫어졌다.

자신이 이렇게 큰 벌을 받을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고 지금의 처우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일국의 공주를 겁탈하려고 한 놈의 생각으로는 너무 터무니없지만 루이스라는 인간은 그런 인간이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도 자신에게 합리화와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참회? 속죄? 그런 감정은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루하루 불만만 쌓여 가는 나날 속에서 루이스의 불만에 제대로 불을 지른 것은 밀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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