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5화 (15/257)

제15화

“웃? 이건….”

밀턴은 깜짝 놀랐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이게 뭔지는 밀턴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제롬은 무인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모두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정신적인 자극을 받아서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 있었다.

밀턴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희귀한 일인 것이다.

제롬의 몸에서 흘러넘치던 오러가 서서히 갈무리되었고 제롬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밀턴을 향해서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말했다.

“자작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니, 나야 뭐….”

밀턴은 조금 얼떨떨했다.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제롬에게 큰 은혜를 입혀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깨달음으로 인해서 경지는 얼마나 상승한 건가? 설마 이제 마스터?”

제롬은 원래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였다.

그러니 깨달음으로 인해서 경지가 상승한다면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롬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스터의 벽은 아직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직전에는 도달한 것 같습니다.”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제롬은 자신의 손을 뻗어서 거기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밀턴의 손끝에서 검의 형체를 한 숏 소드 정도의 오러가 생겨났다.

“오오오….”

무기를 쓰지도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러를 다루는 모습에 밀턴은 감탄했다.

지금의 밀턴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경지였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 얼마나 강해진 걸까?’

밀턴은 문득 제롬의 스텟창을 다시 확인해 봤다.

[제롬 테이커]

기사 LV.6

무력 - 89 통솔 - 77

지력 - 40 정치 - 25

충성 - 80

특성 - 용맹, 돌파, 냉철,

용맹 LV.5 :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력이 올라가며 자기 지휘하에 있는 병력의 사기를 상승시킨다.

돌파 LV.7 : 기마대를 이끌고 적의 진형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레벨이 높을수록 더 강한 돌파력을 발휘한다.

냉철 LV.5 : 전투 중에 전황 전체를 보는 안목이 높아진다.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유연함을 발휘해서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전체적인 수치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전에는 용병이었던 직업창이 기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력 수치가 딱 89에 멈춰 있었는데 제롬과의 대화로 미뤄볼 때 아마 90이라는 수치가 익스퍼트와 마스터의 경계일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변한 수치는 충성이었다.

이전에 제롬의 충성심은 69였다.

용병으로서 신뢰가 가는 고용주에게 바치는 의리에 가까운 감정으로 그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지금 제롬의 충성은 80에 달했다.

이 정도면 이미 용병과 고용주로서의 관계는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치가 밀턴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지금 승부를 걸어볼까?’

결심을 굳힌 밀턴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제롬에게 말했다.

“제롬 테이커. 용병이 아니라 기사인 자네에게 정식으로 제의하겠네.”

“말씀하십시오.”

“제롬 테이커, 나의 기사가 되어 주게. 나는 자네를 필요로 하네.”

밀턴의 말에 제롬은 잠시 침묵하다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 검을 양손으로 수평으로 받쳐서 밀턴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다.

“저 제롬 테이커, 이 순간부터 심장이 멈추는 그날까지 나의 주군 밀턴 포레스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 순간 밀턴은 제롬의 충성심이 다시 한 번 크게 뛰는 것을 보았다.

[충성 - 92]

‘됐다!’

밀턴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전부터 탐은 내고 있었지만 기어코 제롬을 자신의 기사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 짜릿한 성취감과 함께 마음이 하늘로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영웅 전기 같은 것을 보면 군주들이 유능한 신하를 원하는 마음을 종종 구애(求愛)에 빗대서 표현하고는 했다.

왜 그런 표현을 하는지 밀턴도 이제 알 것 같았다.

마음속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자신의 기사가 되어준 제롬에게는 감사함이 가득했다.

“고맙네. 제롬, 자네라는 기사에 부끄럽지 않은 주군이 되어주겠네.”

“주군은 이미 저에게 과분한 분이십니다.”

밀턴은 제롬의 충성을 받았고, 그 순간 밀턴의 머릿속에 한 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군주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설마….’

밀턴은 서둘러서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해 봤다.

[밀턴 포레스트 자작]

군주 LV.2

무력 - 70 통솔 - 79

지력 - 74 정치 - 50

충성 - 100

특성 - 카리스마, 각성.

카리스마 LV.2 :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해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올릴 수 있다.

각성 LV.1 : 신하를 각성시켜서 정신적으로 능력을 끌어올리며, 충성심을 상승시킨다.

‘오오오… 새로운 특성이 생겼어.’

스텟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각성이라고 하는 특성이 생겼다.

거기다 기사의 숫자도 원래는 세 명이었는데 제롬이 더해져서 네 명이 되었고 말이다.

“좋았어!”

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군주의 레벨이 오르면서 새로운 특성도 생겼고, 우수한 기사도 얻었다.

특히 새로 생긴 각성이라는 스킬이 마음에 쏙 들었다.

제롬에게 깨달음을 주면서 생긴 특성 같았다.

이걸 잘만 활용하면 릭이나 토미 같은 젊은 기사들에게도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후후… 잘만 하면 우리 영지의 기사들은 전원이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른 자들로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밀턴이었다.

다음날 밀턴은 제롬이 자신의 기사가 되었다고 정식으로 알렸다.

안 그래도 제롬을 존경하며 반쯤 스승처럼 모시고 있던 릭과 토미는 몹시 기뻐하며 제롬을 환영했다.

그리고 일반 병사들도 겸허하고 자애로운 성품의 제롬이 자신들의 편이 되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다.

의욕에 가득 차 있는 제롬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군, 제가 주군의 기사가 된 이상 이제 본격적으로 기사와 병사들의 조련에 힘을 쓰고 싶습니다.”

요새로 돌아가자마자 제롬은 밀턴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까지도 훈련을 봐주지 않았나?”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좀 더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키려고 합니다.”

“음, 좋겠지. 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가 훈련을 봐준다면 기사와 병사들도 크게 좋아할 걸세.”

“감사합니다.”

기꺼이 허락하는 밀턴의 말에 제롬은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훗날 밀턴은 생각했다.

제롬이 한 말 중에 ‘본격적’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 더 깊게 생각했어야 했다고 말이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고 밀턴의 휘하 병력들에게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일어나라! 그 따위 근성으로는 전쟁에서 바로 죽어 버릴 거다!”

“자신의 한계를 멋대로 정하지 마라! 인간에게 한계는 없다!”

“포기하면 그 순간 죽는다!”

일단 훈련이 시작되자 제롬은 악마처럼 변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밀턴은 제롬의 머리 위에 쓰지도 않은 빨간색 모자가 보이는 듯했다.

‘아! 그래도 마지막 하나는 약간 명대사 같은데….’

박문수 시절 감상했던 명작 만화가 살짝 떠오른 밀턴이었다.

이제까지 용병 신분으로 기사와 병사들의 훈련을 봐주던 밀턴이었다.

하지만, 부외자의 위치에서 훈련을 봐주는 것과 정식으로 기사가 되어서 하급자들을 조련시키는 것은 제롬에게 있어서 완전히 다른 일이었던 것이다.

기사인 릭과 토미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일반 병사들까지 제롬은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한계라는 것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직전까지 끌고 갔다가 풀어주고 다시 끌고 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밀턴은 생각했다.

‘내가 제롬보다 윗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가끔 군대 가면 이렇게 느껴지는 후임들이 있다.

내가 저놈보다 군대 일찍 와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느끼게 하는 후임 말이다.

밀턴에게는 제롬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 방심은 금물이다.

어느 정도 기사들과 병사들의 훈련 시스템이 궤도에 오르자 제롬은 그 시선을 밀턴에게 돌렸다.

“주군, 이제 부대의 훈련 시스템은 그럭저럭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아… 그래. 수고했네. 이제 자네도 개인 수련에 신경 쓸 수 있겠군. 어서 마스터에 올라야지. 하하하하….”

어쩐지 몹시 불안해진 밀턴은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제롬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주군의 훈련을 등한시했지만….”

‘그냥 계속 등한시하지?’

불안감이 더욱더 선명해지는 밀턴이었다.

그리고 제롬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밀턴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주군의 훈련을 시작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제가 반드시 주군을 더 강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꼭 그래야 하나?”

“물론입니다. 저만 믿어 주십시오.”

“…….”

불안감은 기어코 현실이 되었다.

제롬의 등 뒤에서는 미친 듯이 구르고 있는 부하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씨익 웃고 있었다.

어서 당신도 우리와 같은 지옥으로 떨어져라, 라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밀턴에게 제롬은 굳건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주군. 제가 반드시 1년 안에 주군을 익스퍼트의 경지에 이르게 하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밀턴이었다.

그리고….

“아직 멀었습니다. 주군! 더 하실 수 있습니다!”

“고작 여기서 지치면 어떻게 합니까? 근성을 보여 주십시오!”

“일어나십시오. 아직 죽으려면 멀었습니다!”

밀턴 역시 부하들과 함께, 아니 그보다 더한 훈련 지옥에 떨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회색 산맥에는 첫눈이 내렸다.

항상 크고 작은 소모전이 벌어지는 회색 산맥이었지만 겨울만은 이 산맥에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회색 산맥은 매 겨울마다 엄청난 양의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무릎까지 쌓이는 것은 적은 편이었고 사람 허리까지는 쌓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겨울은 인간이 전쟁을 하려고 해도 자연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 시기였다.

지구에 유명한 프랑스인처럼 불가능이 없는 사전 하나만 믿고 호기 부리며 산을 넘으려고 하다간 죽기 십상이었다.

실제 그런 전례도 꽤 많았고 말이다.

그 대신 겨울은 준비의 시간이었다.

눈이 녹아서 봄이 되면 다시 시작될 전쟁에 대비해서 물자를 비축하고 병사들을 조련시켰다.

특히, 이번 겨울에는 물자의 비축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참모부에서는 내년 봄에 끝장을 볼 생각인 것 같네.”

사석에서 넬슨이 밀턴에게 은근히 해준 말이었다.

밀턴이 생각해도 참모부가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은 당연했다.

듣기로는 힐데스 공화국의 식량 사정은 생각보다 훨씬 나쁘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책사가 참모로 있고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기사가 선두에 선다고 해도 보급이 악화된 군대는 오합지졸일 뿐이다.

아마 이번 겨울은 적들에게 유난히 혹독한 겨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이 되면 서부 전선에서는 지루한 소모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군을 진격시킬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팽팽한 균형을 무너트리고 회색 산맥 전부를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이제까지 서부 전선이 좀처럼 진격하지 못한 것은 험난한 회색 산맥의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힐데스 공화국의 방어 때문이다.

그 회색 산맥을 넘어서기만 하면 이제 힐데스 공화국 전체를 공략 대상으로 삼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리기에는 밀턴의 공이 컸다.

다만, 참모부에서 공적을 최대한 축소시켜 명성을 얻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밀턴은 전쟁터에서의 명성에는 큰 집착이 없었다.

어차피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고 여기서 명예를 얻는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된다고 보지는 않았다.

대신 밀턴 본인은 좀 더 실질적인 이득을 얻어내고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