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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14화 (14/257)

제14화

제롬 테이커는 무려 후작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다만, 장남이 아니고 삼남, 그것도 첩의 자식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후작가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귀족으로서의 교육을 모두 받으면서 자라왔다.

그중에서도 제롬은 검술에 엄청난 재능을 보였다.

원래 테이커 후작가는 무가였고 대대로 훌륭한 기사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정실에게서 태어난 장남과 차남의 재능은 아버지인 테이커 후작을 만족시킬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제롬이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제롬은 테이커 후작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았다.

그 총애는 이미 후계자로 낙점된 장남이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각별한 것이었다.

그래서 장남은 제롬을 스트라부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 아카데미로 보내 버렸다.

대외적인 이유는 동생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 훌륭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동생을 멀리 보내 버리려는 의도였다.

사실 제롬은 아무래도 좋았다.

배다른 형제들이라고 해도 피를 나눈 친족인데 권력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을 떠나면서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일리아나의 존재였다.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제롬과 똑같은 어머니를 둔 동복의 여동생이었다.

첩의 자식이라고 해도 검술에 재능을 보이며 아버지의 비호를 받는 자신과 달리 여동생은 집안에서 무척이나 홀대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에 딱히 모난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후작가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차별받는 이유는 제롬 때문이었다.

제롬이 두각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장남과 차남은 첩의 자식인 제롬을 질투했다.

하지만 테이커 후작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제롬에게는 서툰 장난질을 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만만한 일리아나가 표적이 된 것이다.

테이커 후작도 그녀에게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그녀는 장남과 차남의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제롬은 그런 여동생을 항상 안타까워했고 최대한 지켜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즉, 이 후작가에서 자신이 떠나고 나면 더 이상 여동생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게 제롬의 불안감이었지만 오라버니를 생각하는 기특한 여동생은 그런 제롬에게 직접 말했다.

자신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고 기사 아카데미에 가라고 말이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서 오라버니의 미래를 가로막는 것이 싫었던 일리아나는 그렇게 제롬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제롬은 아카데미의 입학을 결심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정식 기사로서 기사단에 입단하면 자신도 홀로 설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힘으로 동생을 보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롬이 기사 아카데미로 상경하는 날 일리아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라버니를 배웅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의 보호자 제롬이 곁을 떠나는 것은 그녀도 슬펐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한 점의 얼룩도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라버니를 배웅했다.

심지가 굳고 성품이 고운 여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좋은 결과만 따라오는 건 아니다.

그날의 미소가 제롬이 기억하는 여동생의 마지막이었다.

수도의 아카데미에 입학한 제롬은 수련에 매진했다.

우수한 기사가 되어서 여동생을 지켜주기 위해서 잠자는 시간도 아껴 가며 노력했다.

교수들은 그런 제롬의 노력을 인정하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기 위해서 열심히 지도했다.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고 거기에 훌륭한 환경까지 갖춰진 상황이다.

여기서 발전을 하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제롬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익스퍼트의 경지에 눈을 떴다.

그리고 아카데미 내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출전해서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상급생들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여동생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사실을 밝히니 여동생은 몹시 기뻐하며 답장을 주었다.

그때가 제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러나….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4년이 조금 넘어가던 시기에 제롬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가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그래. 공화주의자들이 부추겨서 농민들을 봉기시켰다나 봐.”

동급생인 친구가 전해준 소식은 제롬에게 있어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지? 아버지는? 내 형제들은?”

“그건 아직 몰라. 하지만 좀 더 기다리면 소식이 전해지겠지.”

다음 소식이 전해지려면 한참을 또 기다려야 할 것이다.

제롬은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날 밤.

제롬은 아카데미를 무단으로 이탈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말을 달려서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으로 가는 동안 조금씩 가문의 소식을 들었지만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영주에게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일이야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었다.

실제 테이커 후작가는 일반 평민들에게 그렇게 관대한 가문은 아니었으니 반란이 일어날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반란이 위험한 이유는 공화주의자들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자들은 왕국의 신분제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종종 세작을 잠입시켜서 자신들의 사상을 왕국의 하층민들에게 퍼트린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을 자극해서 무기를 들게 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때 공화주의자들은 반란군을 어느 정도 지원하기도 한다.

그래야 왕국 내부에 더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테이커 후작에 일어난 반란도 그렇다.

대대로 무가로서 명맥을 이어온 테이커 후작 가문에는 기사도 많고 사병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반란군이 득세를 하고 있다는 것은 뒤에 공화주의자들이 파견한 지원군이 있다는 말이었다.

‘제발… 제발 무사하기를….’

제롬은 최대한 빠르게 말을 달리며 자신의 가족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제롬은 꼬박 열흘을 쉬지 않고 달려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제롬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반란군들은 테이커 후작가를 완전히 불태웠고, 그 후에 주변 영지의 연합군에 밀려서 소멸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제롬의 눈에 보인 것은 불타고 재가 되어버린 고향의 모습이었다.

병사와 영지민, 가릴 것 없이 무수한 시체가 있었고 영주성은 무너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웃의 영주들은 어디까지나 반란군을 처벌했을 뿐.

영지의 뒷수습에 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해 뒀던 것이다.

“아버님, 형님, 일리아나!”

제롬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자신의 가족을 찾았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고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제롬이 가족을 찾았을 때 그 모습은 잔혹한 절망 그 자체였다.

“아… 아아….”

제롬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눈앞에는 장대에 꼬챙이 꿰듯이 꿰뚫린 여동생의 시체가 있었다.

반란군은 격전 끝에 영주성을 무너트리고 자신들의 분노를 잔혹성으로 폭발시켰다.

영주와 가족을 잡아서 돌로 쳐 죽이고, 그 시체를 허공에 매달아서 자신들의 승리를 과시했다.

제롬의 눈앞에 있는 것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제롬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감싸며 비통한 절규를 터트렸다.

“그날, 여동생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맹세했습니다. 너를 이렇게 만든 공화주의자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말이죠.”

“그래서 용병이 되었다는 건가?”

“예. 그리고 첫 일을 시작하려는 순간 자작님이 저를 고용하신 겁니다.”

제롬의 길고 과거사를 들은 밀턴은 이제야 모든 것이 납득이 갔다.

‘귀족 출신인건 알았지만 왜 그렇게 공화주의자를 싫어하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군.’

하지만 밀턴은 아직도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반란이 끝났다면, 영지가 몰수당했다거나 작위가 박탈당한 것은 아니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용병이 되는 것보다는 후작가의 후계자로서 사는 것이 자네의 복수를 위해서도 더 큰 힘이 되지 않겠나?”

일개 용병과 스트라부스 왕국의 후작가.

어느 쪽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논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어째서 제롬은 복수를 원하면서도 용병이 되어 버린 걸까?

밀턴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밀턴에게 제롬은 처연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저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 기사도를 버렸습니다. 이미 직접적인 복수의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 전체를 향한 증오심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기사도를 지킬 수 없는 제가 어떻게 대대로 무가였던 가문을 이어받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제롬의 말을 들은 밀턴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도를 맹신하는 걸 넘어서 거의 강박 관념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군.’

어지간하면 그냥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살아라, 라고 행동하는 것이 밀턴의 방식이었다.

남이 어떻게 살든 간에 어지간해서는 오지랖을 떨지 않는 게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답답해도 너무 답답해서 도저히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롬, 자네 생각은 틀렸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복수와 기사도를 양립할 수 없으니 복수를 선택했고, 그로 인해서 가문을 버린다, 라는 게 자네 설명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틀렸어.”

밀턴은 제롬의 생각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마치 이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확고하게 말이다.

“왜 복수를 위해서 기사를 포기하나? 그 두 가지는 버젓하게 자네의 마음속에서 양립하고 있는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나만 선택해야 할 이유가 뭔가?”

“그건… 진정한 기사라면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정의를 위해서 검을 뽑으며 약자를 보호하며, 절대 사적인 감정을 검에 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롬이 말한 것은 기사도의 교본에 실려 있는 구절 중에 하나였다.

물론 밀턴도 기사 교육을 받았기에 저 구절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밀턴의 감상은….

“그건 개지랄 같은 소리야.”

라는 것이었다.

“자… 자작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롬의 인생에서 기사도를 개소리라고 부정하는 귀족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정면에서 당당하게 말이다.

하지만 밀턴은 거침이 없었다.

“내가 자네 입장이라면 달랐을 것 같은가? 가족이 죽었고, 그 잔혹한 최후를 두 눈으로 보고도 복수심을 품지 않고 고결한 기사도에 충실할 것 같은가?”

“……”

“장담하건대 절대 그렇지 않을 걸세. 나 역시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야. 자네하고 똑같은 인간 말일세.”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대단한 일이며 복수보다 훨씬 더 어렵고 괴로운 선택이다.

그건 이미 성인(聖人)이라고 불러 마땅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의 훌륭함을 범인들에게 일반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네가 생각하는 기사도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야. 오점을 일절 허락하지 않고 완벽한 이상향을 지향하지. 하지만 그게 과연 현실에 맞을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밀턴은 제롬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기사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야. 화내고, 울고, 웃고, 눈물도 흘리는 평범한 사람이란 말이지. 그런 사람의 감정을 그저 기사도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억눌러서 그 범위를 벗어나면 안 된다? 세상에 그런 기사가 있기는 할까?”

“하지만….”

“이상론을 현실에 강요하면, 망가지거나 튕겨나가는 게 보통이야. 가장 가까운 예를 들면 공화주의자 놈들을 들 수 있겠지?”

“그런….”

밀턴의 말에 제롬은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쇼크 받은 표정을 지었다.

쉽게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머리로는 밀턴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화주의가 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기존 체제의 사람들도 공화주의를 연구했다.

적을 알아야 자신들도 거기에 맞춰서 대응을 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이 공화주의의 단점을 찾아서 세상에 설파했다.

그 단점이란 바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을 현실에 맞추는 것. 그게 공화주의의 최대 단점이지. 그렇지 않은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하는 말도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군. 자네가 주장한 기사도 역시 현실에 맞지 않은 이상향일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가….”

“자네가 살면서,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자네가 생각하는 완벽한 기사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아직은 없습니다.”

사람인 이상 완벽한 기사도를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는 그 높은 도덕심을 지키지 못하고, 또 어떤 이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다른 기사들은 모두 자격이 없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기사도에서 다소 벗어난다고 해도 그들이 정의를… 아!”

말을 하던 제롬은 스스로 정답을 깨달았다.

그렇다.

결벽증 환자처럼 룰에 얽매여서 거기에 기사의 자격을 운운할 필요는 없다.

‘내 가슴속에 정의가 있다면… 그리고 설령 비틀리고 쓰러진다고 해도 그 지향점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사다.”

제롬이 그렇게 말한 순간 그의 몸에서 은은한 오러가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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