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그렇게 되었네. 정말 미안하군.”
넬슨 카디널은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대강의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외국에서 온 유능한 청년 귀족에게 자국의 치부를 보이는 것 같아서 그는 얼굴이 붉어졌다.
밀턴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의 차별은 예상했던 바였고, 밀턴의 입장에서는 멀리 있는 참모부보다는 가까이 있는 직속상관인 넬슨의 눈에 드는 것이 더 쓸모 있었다.
물론 돈이 아쉬운 상황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에 피곤하게 심력을 쓰는 것은 싫었다.
“전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백작으로 승작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거 참, 승작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말년에 부하 복이 좋아서 이렇게 되는군.”
넬슨은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지난 세월 동안 서부 전선에서 활동하며 그가 세운 공적을 생각하면 사실 백작위는 진작 주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정치적 처세가 좋지 않아서 항상 공적에 비해 평가가 떨어졌고 출세에서도 완전히 멀어졌던 것이다.
아마 이번에 밀턴이 세운 공이 아니었다면 그는 영원히 승작하지 않고 자작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넬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밀턴에게 더 미안했다.
“사실 나보다는 자네가 더 큰 포상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넬슨은 은밀한 어조로 밀턴에게 말했다.
“자네 우리나라로 귀화할 생각은 없나?”
“스트라부스 왕국으로 말입니까?”
“그렇지. 자네가 우리나라로 귀화한다면 참모부에서도 포상을 더 높게 평가해 줄 걸세.”
넬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안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밀턴은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조국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음, 그렇군. 내가 미처 자네의 애국심을 고려하지 못했군.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백작님.”
정중하게 사과하는 넬슨이었지만 사실 밀턴에게 애국심은 없다.
버릴 수 없는 것은 레스터 왕국이 아니라 포레스트 영지였다.
아무리 시골 영지라고 해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고 또 조상 대대로 지켜온 터전이 아닌가?
그걸 포기할 거라면 애당초 전쟁터에 나오지 않고 빚을 피해서 야반도주했을 것이다.
“유감이야. 자네 같은 인재가 우리나라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넬슨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했지만 그렇다고 밀턴이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참모부에서 이번에 자네가 올린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는 우선 현금 2,000골드를 제시했네. 그리고 현재 백인장의 직위를 한 단계 올려서 삼백인장으로 승격시킨다고 하더군.”
“2,000골드라….”
밀턴은 쓰게 웃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너무 적었다.
서부 전선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큰 공을 세웠는데 받은 포상은 너무나 미미했다.
넬슨은 그런 밀턴에게 미안하다 못해 부끄럽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나도 다시 항의를 해 봤지만 참모부에서 내 말이 먹히는 편이 아니라네.”
“…….”
넬슨은 자신의 직위와 연줄 안에서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시도했다.
하지만 참모부에서는 외국인, 그것도 고작 백인장에 불과한 밀턴의 공적을 높게 쳐주지 않았다.
“정말 미안하네.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결국 넬슨이 할 수 있는 건 진심으로 밀턴에게 사과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밀턴이 얼마나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넬슨 역시 젊은 시절에 지금의 밀턴 같은 불합리함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변방 요새의 천인장에 머물고 있는 자신에 비해서 공적도 형편없던 동기들이 참모부에서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고 고속 출세를 하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졌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잔뜩 취하며 썩어빠진 참모부를 욕하고는 했다.
‘같은 나라 사람인 내가 그 정도였는데 외국인인 이 친구의 심정은 오죽할까?’
넬슨은 그저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밀턴은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오히려 넬슨을 위로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백작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자네 괜찮은가?”
“솔직히 괜찮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죠. 신경 쓴다고 뭐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밀턴 포레스트의 인생에 이렇게 불합리한 차별은 없었지만 박문수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서….
전생의 중학생 시절 야구를 했을 때의 일이다.
실력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실제 연습 시합을 하면 그럭저럭 팀에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감독은 정식 시합만 되면 자신을 채용해 주지 않았다.
자신보다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선수가 대신 자신의 포지션에 나가는 것을 보고 박문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중에야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진 선수의 부모가 감독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선수의 부모가 감독의 차를 바꿔준 것을 비롯해 꽤 고가의 선물을 주었다는 것도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박문수는 야구부를 그만뒀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씁쓸한 진실을 깨달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종종 더러운 일이 벌어지고, 그때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아니 한국보다 훨씬 더 권력자의 입김이 강한 곳인데 이런 불합리가 안 벌어질 리가 없지.’
밀턴은 이 불합리함을 거스를 힘도 수단도 없으니 지금의 상황을 일단 받아들였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일단 기억해 두는 것뿐이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빚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오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그 중학교 감독의 경우 박문수가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비리를 샅샅이 캐낸 뒤 SNS에 올려 버렸다.
덕분에 학교는 난리가 났고 그 감독과 감독에게 뇌물을 준 사람도 인터넷에서 마녀사냥을 당했다.
결국 반항도 때를 봐가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권력의 불합리함에 그때그때 맞서는 것은 피곤할 뿐더러 승산도 희박하다.
일단 기억해 두고 끈기 있게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일단 참자.’
밀턴은 그렇게 생각하며 넬슨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2,000골드면 충분합니다. 삼백인장으로 승격한 것도 나름 유용하게 쓰이겠죠.”
밀턴이 그렇게 말하자 넬슨은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까지 욕심이 없을 수가 있는 건가?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넬슨은 밀턴에게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해는 호의를 불렀고, 넬슨은 예정에 없었던 말을 꺼냈다.
“크흠… 이건 참모부에서 내리는 공식적인 포상은 아니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자네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나?”
“제안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자네, 우리 요새의 보급 부대를 맡아보지 않겠나?”
넬슨의 은밀한 제안에 밀턴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이제까지의 대화의 흐름에서 이어지는 제안이란 말인가?
“명령을 내리면 하겠지만…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밀턴의 말에 넬슨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자네는 잘 모르겠군. 이 산악 요새에서 보급 부대를 맡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잘 듣게. 보급 부대라는 임무는 말일세….”
그리고 넬슨은 보급 부대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회색 산맥의 요새들은 장기 농성전에 버티기 위해서 항상 물자를 꾸준하게 비축해 놓는다.
식량, 무기, 그 외에 필요한 생필품 등등….
그리고 이 모든 물품은 상단을 통해서 전달받는 게 아니라 군의 지휘관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후방의 도시에 가서 구매해 온다.
처음에 이런 방식을 취하게 한 것은 운송료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상인들에게 운송을 맡기는 것보다 직접 도시에 가서 거래를 하는 편이 운송비를 더 절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막상 하고 보니 보급 부대를 운용하는 장교들 입장에서는 콩고물이 꽤 짭짤하게 떨어졌다.
상인과 직거래를 하는 게 아니라 도시에 직접 가서 여러 상인들 사이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상인들끼리 가격 경쟁이 붙는다.
그럼 군의 입장에서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보급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군에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서 많은 상인들이 후방의 도시에 몰렸고, 그로 인해서 도시의 상업 자체가 크게 발달했다.
이번에 위기에 처했던 상업 도시 프라티노스는 바로 그렇게 성장한 도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군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보급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정해진 금액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보급품을 구입하기 시작한 건 좋은데….
견물생심이라고 보급 부대의 지휘관들 중에 몇몇이 큰돈을 만지다 보니 슬슬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거짓 장부를 작성하며 횡령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상인과 짜고 보급품을 실제 가격보다 더 비싸게 사주며 그 차익을 챙긴 것이다.
지구로 치면 일종의 방산 비리인데 이걸로 보급 부대의 지휘관들은 막대한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원래 나쁜 일이 더 빨리 유행을 탄다고 하던가?
어느새 보급 부대의 지휘관들 전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비리를 저질렀다.
그러나 꼬리가 기니 결국은 들통이 나 버린 것이다.
이 비리가 참모부에 적발되어서 결국에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특히 참모부를 놀라게 한 것은 횡령한 금액이었다.
일개 하급 지휘관이 챙긴 금액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 오간 것이다.
비리는 비리지만 이 정도의 금액을 절감할 수 있다면 현재의 방식 자체는 절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참모부는 보급 부대를 계속 자체적으로 운영하게 했고, 대신 장교들의 횡령을 막기 위해서 채찍과 당근을 제시했다.
횡령을 하면 군법으로 엄하게 처벌한다고 공표를 했고, 한편으로는 보급품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절약한 금액의 10퍼센트를 해당 장교에게 성과급으로 주겠다고 고지했다.
자체적으로 당근을 제시해서 열심히 일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 후로 회색 산맥의 요새에서는 하급 지휘관들이 가장 탐내는 보직이 바로 보급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합법적인 수단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요새당 한 명씩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서부 전선 전체를 뒤져도 열 명 밖에 없는 진정한 꿀 보직인 것이다.
“어떤가? 자네 가문의 빚을 갚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물… 물론이죠.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넬슨의 설명을 들은 밀턴은 기꺼이 하겠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자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다행이군. 이제까지 우리 까마귀 요새의 보급 부대는 내가 직접 운영했지만 앞으로는 자네가 하도록 하게.”
“예! 감사합니다!”
밀턴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건 참모부가 내린 무늬만 포상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었다.
‘자다가 떡이 생긴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밀턴은 서부 전선에 착임한 이후로 가장 기분이 좋았다.
밀턴이 뛰어난 공적을 올리고 서부 전선 최고의 알짜배기라고 불리는 보급 부대까지 운영하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평소에 밀턴을 시기하던 3인방의 질투심이 폭발했다.
“어떻게 그런 외국인 애송이한테 보급 부대를 맡길 수 있지?”
“넬슨, 그 늙은이가 노망이 난 게 틀림없소. 안 그렇소?”
“젠장, 관에 들어갈 나이도 한참 지난 인간이 왜 그렇게 정정한지 몰라.”
루이스 워커, 버틀랜드 리가, 마레즈 카르디아.
밀턴이 잘나가면 잘나갈수록 이 세 명은 곤란해졌다.
초반에 텃새를 부리면서 척을 져 놔서 그런지 이제 와서 친하게 지내기도 힘든데 상대는 어느새 자신의 상급자가 되어 버렸다.
외국인인 밀턴의 자작 작위는 사실 귀족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승진을 하면서 삼백인장이 되고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군의 지휘 체계상 밀턴이 엄연하게 이 세 명의 상급자가 된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간단한 명령도 내릴 수 있는 상급자 말이다.
그리고 밀턴은 과거의 해묵은 일을 그냥 쿨 하게 넘어가 주는 타입의 인간도 아니었다.
“오늘은 나한테 야간 정찰 명령을 내리더군요.”
“나도 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적의 2차 습격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젠장, 나한테는 요새의 목책 정비를 이번 주 안으로 마쳐 놓으라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렇다.
밀턴은 자신이 상급자가 된 이후로 텃세를 부리던 이 3인방에게 계속해서 임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위험한 임무를 부여할 정도의 권한은 없었지만 귀찮고 힘든 임무를 골라서 맡길 수는 있었다.
밀턴은 이 셋에게 그런 임무를 맡겼다.
이 셋은 그런 밀턴에게 반발하고 싶었지만 이제 직위가 딸리니 그럴 수도 없었다.
‘빌어먹을, 언젠가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다.’
그 세 명 모두가 밀턴을 향한 적의를 불태웠지만 그중에서도 루이스 워커의 눈에는 명백한 살기가 돌고 있었다.
이게 어떤 방향으로 불똥을 튀길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