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11화 (11/257)

제11화

계곡의 위에서 아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밀턴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직속 부하인 제롬과 릭, 토미가 함께 있었다.

“다행이도 늦지 않았군요.”

“천만다행이지.”

“협조가 빨랐기에 다행입니다.”

적이 바람의 계곡을 지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밀턴은 바로 움직였다.

제롬과 릭, 토미 세 명만을 데리고 빠르게 이동한 밀턴의 목적지는 바람의 계곡이었다.

이들 네 명만으로 이동한 이유는 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분대 단위로라도 병력을 빼면 적에게 포착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네 명만이 단독으로 움직인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탈영병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은밀하게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다.

“주군. 아무리 제롬 경이 있다고 해도 우리 넷만 가서는 적을 막을 수 없지 않습니까?”

가는 도중에 토미가 한 말대로다.

바람의 계곡은 방어에 용이한 지형이었지만 그래도 그 지형을 살리려면 병력이 필요하다.

고작 네 명이서 어떻게 2,000명의 적을 막겠는가?

네 명 중에 마스터가 있지 않은 이상은 절대 무리였다.

밀턴은 걱정하는 토미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보안상 말해 줄 수 없지만 다 방법이 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바람의 계곡으로 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밀턴이 이렇게 말하자 그의 기사들과 제롬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주군이 그러시다면 뭐….’

‘자작님에게 뭔가 생각이 있는 거겠지.’

그동안 이들이 보아온 밀턴 포레스트라는 남자는 결코 생각 없이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 밀턴이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다면 정말로 뭔가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수인 만큼 빠르게 이동한 그들은 바람의 계곡에 도착했고, 거기서 밀턴이 말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밀턴 포레스트 경 맞습니까?”

“그렇소. 당신의 소속과 이름은?”

“예. 프라티노스 경비대 소속의 테리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휘하 병력 500명을 데리고 포레스트 경의 지휘하에 들어가겠습니다.”

절도 있게 대답하는 남자의 뒤로는 500명의 병력들이 대기 중이었다.

프라티노스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비대 병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바람의 계곡으로 진군 중인 적을 막기 위해서는 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새에서 병력을 빼면 적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다.

그러니 밀턴은 적들의 공격 대상인 프라티노스에서 병력을 빼 적에게 대응해야 한다고 넬슨에게 간언했다.

넬슨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밀턴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는 서둘러 전서구를 보내서 프라티노스의 시장에게 현재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일개 천인장에 불과한 넬슨이었지만 그는 직위 이전에 수십 년 동안 서부 전선에서 부대끼며 만들어진 현장의 인맥이 있었다.

거대 상업 도시인 프라티노스 시장과 직통으로 연결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넬슨의 연락을 받은 프라티노스의 시장은 바로 움직였다.

그가 알기로 넬슨 카디널이라는 남자는 절대 허튼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가 위기라고 하면 정말 위기인 것이다.

시장은 즉시 도시 안의 경비대를 총동원했다.

군사적인 병력은 여유가 없었지만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겨둔 경비대는 아직 있었다.

어차피 이들을 남겨둔다고 해도 프라티노스의 성벽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시장은 이들을 과감하게 투입한 것이다.

이로서 프라티노스의 수비 병력은 정말로 제로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좋았어. 이 정도면 할 수 있다.’

밀턴은 병력의 상태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작 500명이었지만 전원이 건장한 남자들이었고 물자가 풍부한 도시에서 출발한 만큼 무장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귀하들의 협조에 감사한다.”

“저희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얼마든지 명령해 주십시오.”

“좋은 자세다. 그럼 바로 움직여 주기 바란다. 우선….”

밀턴은 병력을 움직여서 바람의 계곡 안에 일단 장애물을 만들게 했다.

결코 적이 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정도의 것도 아닌 그런 것을 말이다.

“주군. 어차피 장애물을 만들려고 하면 적의 행군을 확실하게 저지할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중간에 릭이 밀턴에게 물어봤지만 밀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적들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높이로 지어. 산악전의 귀재들이니까 2미터 정도의 장애물은 전부 쉽게 넘을 거다.”

“그래서는 적을 막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예?”

“내 목적은 적을 막는 게 아니야. 여기서 괴멸시켜 버리는 거지.”

밀턴의 말에 릭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뒤에서 친구이자 동기인 토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돌대가리를 굴린다고 답이 나오냐? 빨리 움직이기나 해.”

“누가 돌대가리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릭이었지만 그래도 빠르게 병사들을 지휘하며 작업을 완료시켜 갔다.

그리고 릭은 그때 왜 밀턴이 장애물을 낮게 지으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후퇴! 후퇴하라!”

“어서 물러… 커억!”

중간부터 쏟아지는 화살 비를 못 견디고 적들 사이에서도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후퇴를 하려던 자들은 중간에 자신들이 무시하고 넘어온 바리케이트가 장애가 되어서 좀처럼 넘어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행군 중에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높이의 장애물이었지만 전투 중에, 그것도 위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이 상황에서도 무시할 수 있는 장애물은 아니었다.

“제길! 빨리 가라고! 앞에 뭐 해!”

“씨발 새끼들아 꾸물거리지 말고… 커억!”

힐데스 공화국의 정예 병력 2,000명은 전진도 후퇴도, 전투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주군하고 나는 머리가 다르긴 다르군.”

릭이 중얼거리는 말을 옆에서 들은 토미가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냐?”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주군 대단하지 않나?”

“갑자기 무슨 말이야?”

손은 쉬지 않고 화살을 쏘고 있는 둘이었지만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적의 공격이 닿지도 않는 절벽 고지대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하고 있는 중이다 보니 전투 중이라고 해도 대화할 여유는 차고 넘쳤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수도 아카데미에서 배워 왔다고 해서 다 이렇게 훌륭한 전략을 짤 수 있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보통 안 그래?”

“…그건 그렇지.”

토미가 알고 있는 릭은 호탕하고 단순한 성격이라서 생각이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기도 했다.

“우리 주군과 함께라면 우리도 평범한 시골 기사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가 아니고 분명 그렇다니까. 그러니… 크흠. 제롬 경?”

토미에게 말을 걸던 릭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활을 쏘고 있는 제롬에게 은근히 말을 걸었다.

제롬은 대화에 끼지 않았지만 그래도 둘이 하는 말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릭이 자신에게 말을 건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토리스 경.”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묻는 것은 그만큼 이 주제가 민감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이렇게 훌륭한 주군이라면 제롬 경도… 같이 모시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조금 했을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릭은 제롬을 꽤 어려워했지만 그래도 타고난 성격이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제롬은 릭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하게 화살만 당겼다.

그런 제롬에게 릭이 다시 말했다.

“제롬 경, 한번 생각해 주실 수 없습니까? 저희는 제롬 경이라면….”

“그만, 지금은 전투 중이오.”

중간에 말을 자르는 제롬이었지만 딱 잘라서 거절하지는 않았다.

토미는 그런 제롬을 보며 의외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평범한 시골 귀족인 포레스트 자작가에 익스퍼트의 기사는 과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제롬의 태도를 봐서는 아주 마음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크로이 경. 그대까지 무슨 말을….”

“기사는 주군을 잘 만나야 자기 능력을 마음껏 펼치는 법이죠. 그냥 생각이라도 좋으니 한번 고려해 보십시오.”

“…….”

제롬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꽤 깊은 갈등이 보이는 듯했다.

전투는 싱거울 정도로 일방적으로 끝났다.

완벽한 함정을 준비하고 그 안에 들어온 적을 학살한 결과는 전투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2,000명의 적들 중에서 살아서 도망간 자들은 반도 되지 않았고, 바람의 계곡은 적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거기에 비해서 아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적의 공격이 전혀 닿지 않는 절벽 위에서 일방적으로 화살과 낙석으로 공격을 했을 뿐이니 당연했다.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포레스트 자작님.”

제롬이 다가와서 밀턴의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형적인 이점이 너무 좋았기에 벌어진 결과요. 운이 좋았지.”

“그런 국면을 만들어 낸 것은 자작님의 책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운이라뇨?”

“아니, 역시 운이 좋았소.”

밀턴은 쓰게 웃으며 설명했다.

원래 바람의 계곡은 적이 진군하기에 최악의 길이었다.

그런데도 적은 여기를 몰래 통과하려고 했다.

면밀하게 사전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밀턴이 보기에 이 작전의 본질은 무모한 도박이었다.

모 아니면 도.

물론 모가 나오기 쉽도록 이것저것 조작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가 나왔을 때의 대비책이 전혀 없었다.

“결국 적의 자만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을 뿐이지. 내 책략은 스스로 자만할 수준이 아니오.”

‘69짜리 지력이니 말… 어?’

밀턴은 순간 자신의 스테이터스에 지력이 약간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69였던 지력이 74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게 메시지가 있었다.

[두 배가 넘는 적을 책략으로 물리쳤습니다. 보너스 포인트 +5가 주어집니다.]

‘오… 이런 것도 있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성과에 밀턴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런 밀턴을 바라보는 제롬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대단한 사람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이 정도 기량이면 훗날에는….’

순간 제롬은 전투 중에 영입 제의를 했던 릭과 토미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러시오? 제롬.”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작님.”

“싱겁기는… 갑시다. 결과를 보고해야지.”

그리고 밀턴은 상황을 정리하고 서둘러서 까마귀 요새로 돌아갔다.

대승.

밀턴이 거둔 전과는 고작 적의 병력 2,000명을 몰살시켰다는 결과 이상의 승리였다.

전투의 성과와는 별개로 바람의 계곡에서 적들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결과는 최악으로 치달을 뻔했다.

만약 거기서 적들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보급품이 잔뜩 모여 있는 상업 도시인 프라티노스가 털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적의 숨통이 트이는 것은 물론이고 역으로 서부 전선의 보급 전선에 막대한 지장이 생긴다.

양쪽이 합쳐서 3,000명도 안 되는 소규모 전투였지만 그 영향력은 서부 전선 전체에 미치는 것이었다.

당연히 넬슨은 밀턴의 이런 공적을 최대치로 인정해 주었다.

초반에 요새의 수성전에서 열심히 싸운 것부터 시작해 누구보다 먼저 적의 계획을 눈치챈 공적.

그리고 그 계략에 대한 대응책을 직접 생각하고 지휘해서 성공시킨 공적.

넬슨은 이 모든 공적을 꼼꼼하게 적어서 참모부에 올렸다.

참모부에서도 일개 개인이 세운 공으로서는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큰 전투 없이 피차간에 소모전만 지속되는 서부 전선에서 이 정도의 성과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자국인이었다면 단번에 작위를 한 단계 승작시켜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밀턴 포레스트는 외국인이었다.

참모부의 입장에서는 외국인 귀족의 참전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들이 자국의 전선에서 너무 뛰어난 전공을 올리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기도 했다.

딱히 논리적인 이유는 없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자존심 문제였다.

이제까지 외국인과 자국인의 평가에 있어서 은연중에 약간의 차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서부 전선의 참모부는 밀턴 포레스트의 전공 상당수를 까마귀 요새의 책임자인 넬슨 카디널의 용병술로 치장했다.

그 결과 넬슨 카디널은 자작에서 작위가 백작으로 올랐고 통솔 가능한 병력도 천인장에서 삼천인장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밀턴의 공적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대상이 되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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