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우리들 서부 전선의 요새는 모두 열 개. 이 열 개의 요새는 회색 산맥의 주요 길목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밀턴은 넬슨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이 험난한 회색 산맥에서 모든 길목을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하며 밀턴은 지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는 바람의 계곡이군.”
“예. 지형이 험난하고 길이 좁기는 하지만 이동이 불가능한 지역은 아닙니다. 다만, 지형적으로 봤을 때 길이 워낙 좁아서 요새를 설치하지 않았죠.”
“그렇지. 거기는 세 개의 요새가 정기적으로 정찰을 하는 지역이고, 만약 적이 거기로 온다면 계곡 위에서 화살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유리한 지형이니… 굳이 요새를 설치할 필요도 없었지.”
“예. 굳이 방어적인 거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리한 지형입니다. 하지만 그게 맹점인 겁니다.”
밀턴은 강한 어조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평소 바람의 계곡은 적에게 있어서 최악의 행군로였지만 그건 우리가 평소대로 꾸준하게 정찰을 해서 적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놈들의 공세가 시작되고 전 요새는 수성에만 주력하고 있죠. 정찰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밀턴의 말을 들은 넬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계곡을 타고 놈들이 우리 본토를 침공할 예정이란 말인가?”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놈들이 바람의 계곡을 타고 이동하면 이대로 상업 도시인 프라티노스에 도착합니다. 우리 서부 전선의 보급 물자의 70퍼센트가 모여 있는 곳이죠.”
넬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애당초 놈들의 목적은 프라티노스였다는 건가?”
“힐데스 공화국에 흉작이 심각하다면 설사 이번 공격이 성공한다고 해도 놈들은 길고 괴로운 겨울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프라티노스를 공격해서 물자와 식량을 노획할 수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는 거군. 이런 개자식들!”
넬슨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을 철저하게 잠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놈들이 살금살금 뒷문으로 곳간을 털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밀턴의 말대로 프라티노스는 상업으로 규모가 큰 도시다.
그 점을 살려서 서부 전선의 전체 보급품 중에 70퍼센트가 그 도시에 비축되어 있다.
그걸 잃게 되면 반대로 자신들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바람의 계곡 쪽으로 정찰을 보내라. 놈들의 동태를 살핀다.”
“옛!”
“그리고 다른 요새에도 전서구를 보내서 바람의 계곡 쪽으로 정찰 병력을 보내라고 하라. 상황은 시급하다.”
“옛. 알겠습니다.”
천인장의 명령을 들은 전령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하루 후.
정찰병이 급하게 가져온 소식을 들은 넬슨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밀턴, 자네 말대로 바람의 계곡을 통해서 적이 이동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것도 2,000명이나 말이야.”
“역시….”
“어떻게 하면 되겠나? 이대로 요새의 병력을 움직여서 바람의 계곡을 틀어막으면 될까?”
“그러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는 듯합니다.”
“역시 그렇겠지?”
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적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요새를 공격하고 있다.
이 공격은 요새를 함락시킨다기보다는 적의 눈을 가리고 동태를 살피는 의미가 더 강했다.
만약 요새에서 병력을 빼서 움직이면 적들은 바로 눈치챌 것이다.
“아마 우리 병력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적들은 야전에서 공격을 하겠죠. 그리고 놈들을 어찌어찌 물리친다고 해도 요새 밖으로 병력이 나간 걸 알게 되면 바람의 계곡으로 행군 중이던 적들은 뒤로 물러날 겁니다.”
“그 대신 병력이 빠진 우리 요새를 공격해 올 테고 말이지.”
“예. 바로 그겁니다.”
“이거 완전히 외통수로군.”
넬슨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위기가 눈에 빤히 보이는 상황인데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방법이 보이지를 않았다.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하던 적들은 거기에 맞춰서 대응할 카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길은 어떤 거지?’
생각을 거듭하는 넬슨을 보고 밀턴이 말했다
“저기, 천인장님.”
“왜 그러나? 혹시….”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밀턴은 넬슨에게 자신이 생각한 해법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다 들은 넬슨은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
“옛. 천인장님.”
“당장 작전을 직접 진두지휘하게. 자네 머리에서 나온 거니 자네가 최고 적임자야.”
“하지만 저는 백인장일 뿐입니다.”
“지휘체계에 관해서는 내가 참모부에 언질을 해 두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밀턴은 즉시 움직였고 넬슨은 여기저기로 전서구를 날렸다.
서부 전선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밀턴의 예측은 정확했다.
힐데스 공화국은 이번 흉작을 돌파하기 위해서 적의 보급품을 약탈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먼저 1만의 부대를 움직여서 자신들이 공격할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일부러 드러냈다.
그리고 적들이 준비가 되자 서부 전선의 모든 요새를 두들기듯이 공격했다.
자신들이 이렇게 파상적인 공격을 보이면 적들은 틀림없이 꽁꽁 틀어박혀서 수성에 나설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실제 이 예상은 맞았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산악 요새는 모두 문을 굳건하게 틀어막고 수비에 들어갔다.
산악전에서 일단 버티기에 들어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군을 운용하는 것도 힘들고 공성 병기도 제한되고, 유일한 방법은 마스터라고 불리는 초인들이 나서는 것 정도인데, 그런 초인들은 국가의 중요한 전력이기 때문에 함부로 전장에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함락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발을 묶고 눈을 가리는 용도라면 충분했다.
요새를 맹공하는 척했지만 사실 공격의 횟수를 많이 늘렸을 뿐이지 공격 자체에는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약간만 밀릴 것 같으면 바로바로 후퇴해도 좋다는 명령을 전달받은 장교들은 요새의 공격보다는 병력을 보전하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그 틈을 타서 힐데스 공화국의 최정예 병력 2,000이 은밀하게 회색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바람의 계곡을 통해서 회색 산맥을 빠져나가면 스트라부스의 상업 도시인 프라티노스까지는 금방이었다.
“여기까지는 모두 순조롭군.”
“예. 그렇습니다. 프레드릭 대위님.”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을 이끌고 진격하는 남자의 이름은 프레드릭이라고 하는 젊은 남성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20대 후반 정도?
이 젊은 나이에 대위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유능하다는 증거였다.
실제, 지금 회색 산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략의 큰 그림이 모두 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유능한 만큼 프레드릭은 나이에 비해서 출세가 빠른 편이다.
대위라는 직위는 현장의 장교로서 거의 마지막까지 올라왔다고 볼 수 있었다.
평등과 자유를 표방한 공화국도 역할 분담을 위해서는 계급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투쟁으로 나라를 건국한 이들이기에 자연스럽게 군벌 국가와 비슷한 계급 체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명칭은 지구의 육군을 연상하게 했지만 국가가 군벌 국가이기 때문일까?
역할과 권한은 꽤 달랐다.
우선 최고 정점에는 총통과 세 명의 대장이 있다.
이들이 공화국의 정점에서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한다.
그 밑으로 중장, 소장, 준장들이 국가에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위 간부층이다.
대령, 중령, 소령까지는 전쟁의 전체적인 전락을 구성하는 인물이다.
군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위, 중위, 소위는 전쟁의 현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다.
보통 소위부터는 다른 나라에서도 기사와 비슷한 수준의 공권력을 가지게 된다.
즉결 심판, 사법권 행사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 아래로 하급 장교인 상사, 중사, 하사와 일반 병사로 병장, 상병, 일병, 이병 등이 있다.
프레드릭은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부터 시작해서 불과 5년 만에 대위에 올랐다.
뒷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고속 승진에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전공이 세워져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공적을 세우면 소령으로 진급하여 국가의 중앙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전선에서 전쟁의 일각을 전담하는 작전이 아니라 전국 자체를 크게 움직이는 전략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워야겠지.’
이번 작전은 프레드릭이 승진을 위해 구상한 회심의 역작이었다.
국가에 흉년이 닥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다른 이들은 걱정부터 했지만 프레드릭은 이것을 어떻게 기회로 살릴 수 있을지부터 고민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고민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꿀 작전을 만든 게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작전을 만든 후에도 상층부에 자기 작전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백방으로 손을 썼다.
그렇게 해서 결국 작전을 승인시켰고 자신이 모든 작전을 주관하면서 지금 회색 산맥을 넘고 있는 것이다.
그로서는 반드시 이 작전을 성공시켜야 했다.
실제 그는 작전을 성공시킬 자신도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거의 다 된 거지. 이제 우리 군이 바람의 계곡을 벗어나기만 하면 작전은 9할이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프레드릭은 적들이 자신의 작전에 완전히 말려들었다고 생각했다.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부대와 꾸준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어느 요새 하나도 빠짐없이 방어에만 주력을 하고 있을 뿐.
병력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멍청한 왕국 놈들 같으니라고. 이기고 있다는 행복한 상상에 취해서 죽어 버려라.’
전쟁의 한 국면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짜릿한 쾌감이 들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작전이 성공했을 때의 성과와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를 똑같은 무게로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좌절과 실패를 겪어 본 적 없는 프레드릭은 자신의 작전이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작전이 적에게 읽혔을 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프레드릭 대위님. 전방에 적이 설치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장애물?”
“예. 나무와 바위로 길을 막아두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말에 프레드릭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원래 이 계곡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정찰 구역이니까 장애물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프레드릭이 다시 물었다.
“행군에 지장이 있을 정도인가?”
“아닙니다. 약간 불편하기는 하지만 넘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냥 통과한다. 치울 시간이 아깝다.”
“예. 알겠습니다.”
힐데스 공화국의 남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산에서 뛰어놀며 자란다.
전투 중인 것도 아니고 약간의 장애물이라면 행군 속도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2,000명의 병력이 장애물을 다 넘어간 직후….
“조준!”
계곡의 위에서 누군가의 명령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발사!”
팅팅팅팅….
활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이다!”
“방패 위로! 화살을 막아라!”
“명령을 들… 크억!”
갑작스런 공격에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 2,000명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2,000명의 병력 중에서 누구보다 크게 당황한 것은 바로 이 군의 지휘관이었다.
“기습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프레드릭은 바람의 계곡에 적의 매복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회색 산맥의 스트라부스군은 틀림없이 요새의 방어에 주력하고 있다는 정보를 어제까지만 해도 받고 있었다.
지금 회색 산맥의 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스트라부스 왕국의 요새가 공격당하고 있다.
요새에서 병력을 뺐다면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자 프레드릭은 패닉에 빠졌다.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가득하고 여기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빠르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