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8화 (8/257)

제8화

“그게 그러니까….”

그리고 캐르버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내부 사정에 관련된 설명을 해주었다.

항상 공화국과의 소모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스트라부스 왕국은 귀족들의 자체적인 전쟁 참가를 독려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죄를 지은 귀족들에게 죗값을 대신해 하급 지휘관로 참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장교로 참전하는 자들이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밀턴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죄인이 전쟁에 참가를 하면 보통 노예병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장교로 참전하는 대신 죄를 감면해 준다니?

“그래도 귀족이니까요. 죄가 아주 무거운 귀족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죗값의 귀족들에게 그런 조건을 제시한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 셋은 무슨 죄를 짓고 여기에 온 겁니까?”

밀턴의 말에 캐르버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마레즈 카르디아와 버틀랜드 리가는 세금을 체납했다고 합니다. 말이 체납이지 사실상 횡령이었다고 하더군요.”

“별로 불쌍하지는 않군요.”

“그렇죠. 그 결과 5년 동안 이 요새에서 강제 복무를 해야 합니다.”

“다른 한 명은요?”

“루이스 워커. 그자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형기가 무기한인 걸 봐서는 아마 꽤 중한 죄를 저지른 듯합니다.”

“흐음… 그렇군요.”

“예. 그래서 저희처럼 자유 의지로 전쟁에 참가해서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는 자들을 향해서 강한 적대심을 드러내고는 합니다.”

“그런 거군요.”

사실 밀턴 역시 자유롭게 발을 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빚 갚아야 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내부에 다소 불안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밀턴은 그래도 까마귀 요새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별문제 없이 정기적으로 정찰을 나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큰 실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대기 중일 때는 제롬의 지도하에 쉬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이런 모습이 주변에서 보기에는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포레스트 자작님은 오늘도 수련이신가?”

“참 대단하신 분이야. 어떻게 지휘관이라는 분이 저렇게 부지런할 수 있지?”

밀턴의 이런 모습은 주변의 감탄을 받으며 요새 안에서의 평판을 올리고 있었다.

임무가 없을 때는 대부분 술에 찌들어 나태하기 지내는 지휘관들과 비교했을 때 밀턴의 행보는 그야말로 귀감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밀턴 스스로도 이렇게 열심히 수련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 경지에 잠이 오냐? 열수(열심히 수련)해야지.’

박문수의 전생을 자각하기 전에 밀턴은 스스로의 단련을 게을리했다.

아카데미의 교관들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지만 어차피 귀족가의 자제인 자신은 노력하지 않아도 미래가 보장된다는 썩어빠진 생각에 나태하게 하루하루를 날려버린 것이다.

만약 중앙 기사단에 들어가기라도 했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을지 모른다.

부대의 대장이 쉬지 않고 훈련을 하다 보니 그 밑에 있는 기사와 병사, 심지어 용병까지 훈련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위가 뛰면 밑에는 구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세계를 가릴 것 없이 군대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인장님. 천인장님이 찾으십니다.”

“이 시간에?”

“예. 중요한 볼일인지 요새 안의 백인장은 전원 모이라고 합니다.”

전령의 말에 밀턴은 하던 수련을 그만두고 넬슨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에 도착하자 이미 자신을 제외한 네 명의 백인장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리고 넬슨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모두 왔군. 그럼 갑작스럽지만 모두를 불러 모은 이유부터 설명하지.”

넬슨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한 장의 지도를 꺼내더니 본론을 꺼냈다.

“공화국의 병력이 대규모로 움직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 숫자는 1만 이상.”

“1만?”

“설마 전면전으로 나서겠다는 건가?”

위기감을 느낀 백인장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밀턴은 다르게 생각했다.

‘1만?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전면전 운운하기에는 적은 숫자야.’

하지만 이제까지 서부 전선의 전투는 대부분이 많아야 300명을 넘지 않는 소규모 단위의 소모전이 반복되는 정도였다.

거기에 비하면 1만은 확실하게 큰 숫자이긴 했다.

의문을 가지고 있는 밀턴과 달리 서부 전선에 오래 복무한 넬슨 카디널은 적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놈들이 노리는 것은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우리 쪽 전력을 소모시키는 것일 것이다.”

적의 전력을 깎아내는 것이야 당연한 노림수이지만 그것만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보통 적의 전력을 감소시키는 것은 전쟁의 목적이라기보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과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목적이라는 말은….’

순간 밀턴의 머릿속에서 팟, 하고 감이 왔다.

“서부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힐데스 공화국 내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그 말에 넬슨은 제법이라는 듯이 말했다.

“호오… 눈치가 빠르군.”

그리고 넬슨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올해 놈들은 상당한 흉작을 겪은 모양이다. 원래 식량의 자급률이 높은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곤란하겠지.”

“과연… 그래서군요. 그래서 이런 대규모 공세를 준비한 거군요.”

밀턴은 넬슨의 말에서 바로 상황이 이해가 갔다.

“상황이 이해가 갔나?”

“예. 뭐 대강은 갑니다.”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넬슨의 호기심 섞인 말에 밀턴은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아마도 적들이 노리는 것은….”

밀턴이 생각하기에 힐데스 공화국의 이번 침공의 목적은 스트라부스 왕국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선제공격이라고 판단했다.

흉작으로 인해서 식량이 귀해지면 군량을 보급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군의 약화는 필연적인 것이다.

아무리 단련한 정예병을 육성하고 신묘한 전략가가 지휘를 한다고 해도 군량이 떨어진 군대는 두려울 것이 아니다.

즉, 힐데스 공화국은 자신들이 약해진 틈을 타서 스트라부스 공격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 바로 지금의 선제공격이다.

아직 군량이 충분한 지금 공격을 강행해 스트라부스 왕국의 최전선에 최대한 피해를 줘서 적이 공세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라고 판단됩니다만? 혹시 틀렸습니까?”

밀턴의 설명이 다 끝나자 다른 백인장들의 표정에는 은은한 감탄이 떠올랐고 넬슨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혔다.

“자네 말이 맞네.”

넬슨은 밀턴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라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짐작이 가겠군.”

‘아카데미 전술 시험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밀턴은 넬슨의 거듭되는 귀찮음을 느꼈지만 일단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적의 목적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 목적을 저지하는 것이 우선이겠죠.”

밀턴은 테이블 위의 물 잔을 들어서 목을 축인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적의 공세는 우리가 공격을 하지 못하게 피해를 주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지만 바꿔 말해서 서부 전선을 굳건하게 지켜내면 적들의 목적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 눈이 녹는 시점에 우리가 군세를 이끌고 쳐들어가면 군량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놈들은 어쩔 도리가 없겠죠.”

그리고 밀턴은 테이블의 지도를 가리키며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즉, 이번 공세를 잘만 막아내면 내년 봄에는 서부 전선을 크게 전진시킬 수 있습니다.”

밀턴의 막힘없는 연설에 넬슨은 천천히 손뼉을 마주쳤다.

짝짝짝….

“훌륭하군. 레스터 왕국의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대강 출석 일수만 채우는 정도였지만 말이야.’

“자네 정도면 무척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했겠군. 대단해.”

“아니요 그렇지는….”

‘아슬아슬한 턱걸이 졸업이었지.’

“하하하… 그렇게까지 겸손할 것은 없네.”

“하하… 하하하….”

‘겸손 아니다. 이 아저씨야.’

아무래도 넬슨의 머릿속에서 밀턴의 평가는 처음보다 크게 올라간 듯했다.

그리고 넬슨은 모두를 보며 말했다.

“방금 들은 대로 적의 대규모 공세는 우리 전선에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히려 방어에 주력하며 적의 공격을 막아낸다. 이번에 놈들의 공격을 얼마나 잘 막아내느냐에 따라서 내년 봄의 전쟁까지 영향이 끼친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때 밀턴의 옆에 있던 캐르버가 말했다.

“천인장님. 적이 작정을 했다면 우리 요새의 병력만 가지고 적을 막아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걱정하지 마라. 이미 후방에 연락을 해서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니 1,000명의 지원군이 추가로 요새에 도착할 것이다.”

적의 병력 1만이 움직인다고 해도 험한 회색 산맥의 지형을 생각할 때 그 병력이 한곳에 집중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여기저기에 나눠져서 산발적으로 서부 전선 전체를 두들길 가능성이 크다.

“천인장님. 다른 요새에도 적의 행동을 알리고 방어를 단단히 하도록 방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을 아무리 탄탄하게 지켜낸다고 해도 다른 곳이 무너지면 서부 전선의 전력이 약화되는 것은 같을 것이다.

“그렇군. 혹시 모르니 전령을 보내도록 하지.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있나?”

“목책의 점검과 수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보급품의 점검도 해야 하고요.”

“좋다. 그쪽은 밀턴 포레스트 백인장, 그대에게 일임하지.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갔지만 그 대부분이 밀턴이 주도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에 캐르버가 다가와서 말했다.

“대단합니다. 포레스트 경은 정말 전쟁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과찬입니다. 프랜시스 경.”

“아닙니다. 천인장 님도 포레스트 경의 안목에 크게 감탄하신 듯합니다.”

“하하하….”

실제로 이번 회의에서 밀턴은 넬슨의 신임을 얻었고, 다른 백인장들 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어필했다.

캐르버는 그런 밀턴의 모습에 감탄하며 순순하게 칭찬했다.

하지만 모두가 캐르버처럼 속이 넓은 것은 아니었다.

‘거슬려. 소국의 시골 귀족 주제에….’

밀턴의 등을 노려보는 루이스 워커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같이 어울려서 행동하는 버틀랜드 리가나 마레즈 카르디아의 경우 밀턴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밀턴의 대단한 점은 일절 인정하지 않고 막연한 질투만 하고 있었다.

‘애당초 저놈의 말이 맞다는 보장도 없잖아? 천인장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놈의 말을 믿는 건지 모르겠군.’

루이스는 밀턴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딱히 근거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타국의 시골 귀족에 불과한 밀턴에게 자신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을 리 없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자존심이 근거라면 근거였다.

그리고 그는 이 근거대로 밀턴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보여주겠다.’

보통, 어느 조직이든 터무니없는 사고를 치는 타입의 인간이 보통 이런 생각을 한다.

1만의 군세가 회색 산맥을 넘기 시작했다.

밀턴의 예상대로 이 병력이 한곳에 집중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애당초 적들도 험악한 회색 산맥의 지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힐데스 왕국의 병력이 산악전에 강하고 익숙하다고 해도 1만의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면서 한곳에 집중시키기에는 회색 산맥이 너무 험난하다.

그 대신 1만의 군대는 몇 갈래로 나뉘어서 회색 산맥의 요새를 파상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서부 전선이 회색 산맥에 요지를 만들어 점거하고 있는 요새의 수자는 총 열 개.

이 열 개의 요새가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가면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까마귀 요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발사!”

넬슨 카디널의 명령을 받고 요새 위의 공병들이 활을 당겼다.

날아간 화살은 요새로 진격하고 있는 힐데스 공화국의 병력에 쏟아졌고 그들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면서도 꾸역꾸역 전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돌격! 공화국의 머저리들을 쓸어 버려라!”

요새의 문이 열리면서 한 무리의 병력이 밖으로 사납게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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